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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슬픔을 거슬러 네 얼굴 쓰다듬고서

자유의새노래 2021. 5. 5. 22:36

이제 곧 청력을 잃는다던 상황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나무 바닥에 엎드린다. 열 두 살에 청력을 잃은 에버린 글레니(Evelyn Glennie)처럼 듣겠노라 다시금 들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루미는 건우의 솔직한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던 루미의 미소에는 슬픔도 있었고 희미한 즐거움과 애틋한 감정이 있었다. 진짜 얘기 좀 해보라는 말에 그 때 미워서 내친 게 아닌 것을 알지 않느냐던 건우의 음성 언어를 듣지 못해도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사랑은 음성 언어라는 한계를 뚫고 상대의 마음에 가닿는다. 늦가을임에도 냉기를 만져가며 오감을 느끼려던 루미의 슬픔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도처에 기온이 싸늘한 시대에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전시되고 소비된다. 계량할 수 없고 측정하기 불가능한 것들조차 숫자로 세어진다. 사랑하면 끝까지 갈 수 있다던 말조차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사랑을 어떻게 숫자로 셀 수 있고 아끼는 마음을 글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알면서도 넘어가는 무책임에 어쩔 수 없다고들 말한다. 어쩔 수 없어서 해고하는 것이고 어쩔 수 없어서 버리는 거고, 어쩔 수 없으니 잊는 거라고. 이별은 다음의 만남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어막이라고. 사회 갈등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돈 벌면서도 책임은 개인에게로 돌리는 기막힌 상황을 누가 버텨 낼 수 있을까. 숫자로 셀 수 있으면서도 현실의 벽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숫자로 세고만 정의와 사랑, 미래라는 가치가 공중분해 된다. 한 순간에 벼락거지가 되고도 또 하나 둘 숫자를 세어가며 쌓아 올린다.

일찍이 신 죽음의 시대를 경험한 본 회퍼를 소환하여 저 놈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지껄인다. 신의 죽음에조차 다가가본 일 없는 인간들이 기독교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를 걱정한다. 행동으로 드러난 본심은 교회가 없어지면 무엇으로 벌어먹고 살지를 궁리하는 것들뿐이다. 예수를 시체팔이하여 돈 버는 인간들일수록 코로나에 강한 척한다. 한낱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인간들이면서……. 이런 사람들은 외로움의 감정을 느껴본 일이 없는 자다. 외로우면 저렇게 살 수 없다. 정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은 이를 이용해 먹지를 않는다. 누군가를 적으로 세워두고 허수아비 논법으로 광기에 젖지를 않는다. 어떻게 부모의 상을 치루면서 지 할 일을 다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상주가 죽은 부모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술주정한단 말인가.


웃는 얼굴과 사랑도
數値로 얼룩져 간다
온 몸으로 느끼려던
미소 짓는 루미의 말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거니까


사랑하면 그 사람이 한 말의 의미를 곱씹고, 되새김질한다. 죽은 이의 기억과 말을 되풀이하며 슬픔을 곱씹는다. 너와 지내던 날들, 네가 했던 말들, 행동, 웃음, 냄새. 이걸 어떻게 언어로 말로써 표현할 수 있을까. 제자들은 하느님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뒤늦게 예수의 흔적을 느끼며 사랑을 깨달아간 제자의 공동체가 문자언어로 그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겠는가. 건우의 생각과 마음에는 루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청력이 살아있을 때조차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알았던 루미는 건우의 싫다고 거부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맨발로 시린 바닥에 엎드리지 않아도 이미 알았다.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도 서술하기 어려운 언어를 알고 있었다.

오늘도 죽은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생각난다. 뒤이은 수많은 박탈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난다. 생각보다 세상은 밝지 않다. 얼굴도 모르는 구조자 생각하며 죽음을 대비하는 시대다. 친구와 이웃의 죽음에도 책임지지 못하는 시대라서 슬프다.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이고 짐으로 떠넘겨진다. 시린 바닥은 루미뿐만이 아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린 바닥 민도의 온도는 당연하다. 민도를 비난할 수 없다. 그래서 약한 메시아를 기다린다. 혼자서 질 수 없는 십자가를 나누어진다면 가벼워질 수 있는 것처럼. 슬픔은 나누어 절감하기 힘들 테지만 짐이라도 나누어 질 수는 있지 않겠냐고. 그래서 사랑의 가치를 말한다. 돈으로, 상품으로, 비교로 살 수 없는 네 얼굴 네 입술. 희생하지 않아도 괜찮고 실패해서 넘어져도 괜찮다, 울지 말고 먹으면서 기운차리라고, 대신 그 짐 가벼우니까 건네 달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사랑해라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거 잘 아니까, 그 말 대신 들어주겠다던 말 한 마디면 되겠냐고.

웃는 얼굴조차 믿을 수 없는 오늘의 슬픔에 사람들은 훗날 루미와 건우가 만날 거라고 믿는다. 분명히 청력을 상실해 듣지 못함에도 사람들은 루미의 청력보다 보이지 않는 사랑에 집중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건우가 루미를 만났을까. 루미라면 청력을 잃어도 웃으며 꿋꿋하게 살아가지는 않았을까. 폭풍을 견뎌내고 살아줘서 고맙다며 루미의 그 얼굴 쓰다듬고서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신의 죽음과 함께 상실한 사랑의 가치를 보이지 않는 곳에다가 남겨놓는다. 신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실의 슬픔을 경험해야 사랑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슬프다. 신의 죽음보다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