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A를 물었으면 A에 대해 말하는 게 정상이다. 대학 이름을 묻지 않는 건 하등 필요없는 논점으로 이어지거나 대화의 핑퐁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대학 이름 대신 전공을 묻는 건 소통에서 실리적이다. 어떤 일을 하는지, 무슨 일이 가능한지 묻는 게 상대방의 관심사를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을 준다. 나아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살아온 배경을 묻게 되고 자연스레 대학 이름이 나오며 환경을 가늠한다. 하등 쓸데없는 소득 수준, 자가용은 가지고 있는지, 원룸에서 사는지 투룸에서 사는지를 묻지 않는다. 필요 없으므로 묻지 않을 뿐이다. 여럿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아도 단시간 안에 상대를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편리한 방법이 시간의 검증뿐이지 않을까.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시간의 검증만이 가능한 판단 말이다.

매번 시험으로 검증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질문이 적합한지, 질문은 어떻게 준비할지. 대답하더라도 평가가 올바른지 가늠할 길이 없다. 사람의 능력과 성향, 특질을 이해하는 작업이 가능할지 모른다. 사람들을 줄로 세워두고 점수로 매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부모가 개입했는지의 여부, 하다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는지 같은 드러나지 않은 매개들을 합산해서 평가해야 할지, 순수한 개인의 가능성만을 판단해야 할지 기준을 정한다고 하더라도 판단하기 매우 어렵다. 불가능에 가깝다. 표면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학력 수준이나 수능 점수가 판단 방법이 될지 모르나, 세상은 수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정치 분과가 그렇다. 정치는 누가 더 수능에서 고득점을 얻었는지에 따라 잘하고 못하고가 결정되지 않는다. 때로는 경험과 입담이 필요한 외교가 있고, 학자들의 고언이 절실한 경제가 있기 마련이다.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의 총합인 이 사회에서 권력의 분배를 위해 존재하는 정치 영역이란 서너 가지도 아닌, 수십만 가지의 문제들이 얽히고설켜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다니
기막히면서도 기막힌
황당한 자기변명 속
욕망으로 탈 쓴 공정,
그런다고 달라지려나


대학 출신이란 정보도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 서면 누구든지 그리 묻는다. 대학 대신 전공을, 전공 대신 가능한 일을. 내뱉은 말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가다듬고 말 그대로 현실의 언어를 구사하는지 확인한다. 많은 정보를 읽어야 하고, 판단해야 하며, 대입해야 한다. 복합적이고 어려운 과정이다. 따라서 경험은 시간이란 물리 법칙이 작동하는 게 아닐까. 많은 사람들을 경험하여 실패라는 데이터를 축적해 미리 대비하는 것. 물론 경험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경험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경험이 무조건 옳은 게 아니라 경험에서 얻어지는 물리 법칙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현실 앞에 검증의 도구는 단단해진다. 공정한 룰은 이처럼 현실의 벽이라는 허상 앞에 한낱 무너질 모래성에 불과하다. 공정한 룰 자체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시험을 치를 수 없다. 인기 투표와 능력주의는 하등 관계가 없다. 정치인으로 적격인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시험 출제자는 신이라는 말인가. 애초에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걸, 수치화로 평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건 근대적 해결책일 뿐이다. 전체주의도 불가능한 인간들의 욕망에서 싹 텄다.

사랑도 매번 시험할 수 없다. 상대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테스트하는 줄 안다면 얼마나 불쾌해 할까. 그래서 신도 인간을 시험하지 않는다(야고 1,13). 인간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신조차(마태 10,30) 시험하지 않거늘. 얼마나 사랑하는지, 지금도 사랑하는지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심리학자들은 자존감이 낮다고 분석한다. 사랑에 정치적인 역학관계를 대입하는 이들도 다르지 않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공허감을 채우기 급급하다. 연인을 이용하는 행위는 시간의 검증이 아니라 몇 번의 대화로도 판단할 수 있다. 축적된 경험이 나를 아끼는지, 아끼지 않는지를 판단할 힘이 된다. A를 물었으면 A에 대해 말하는 게 정상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타인의 세계를 이해할 때 가능하다. 내뱉는 문법 속에 ‘너’ 대신 ‘나’만 가득하다면,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행동도 그렇다. 타인을 아끼지 않으면 웃으면서 험한 말, 험한 행동으로 학대한다. 가스라이팅이 그렇다. 따라서 그런 사람과는 가까이 않는 게 옳다. 나로부터 사랑하는 삶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의 욕망을 채우려는 불건강한 사고가 공정한 룰이라는 이름으로 부상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정의와도 거리가 멀다. 따라서 선택적이다. 누구에겐 강도 높은 수사를 요구하지만 내 사람에겐 침묵한다. 탈세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불과 같이 화를 낸다. 시험도 낭낭하게 통과한 직업군의 악질적 행위에는 침묵한다. 이게 공정인가.

A를 물을 때 A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처럼 사랑할 때 사랑을 말해야 한다.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직은 이럴 때 중요하다. 난 누나를 사랑하지 않아, 정직하게 말할 때 관계를 정리할 냉철한 판단이 선다. 구질구질한 사람은 달리 말한다. 다 너 때문이라고 말한다. 네가 나를 이용해 먹었구나, 한껏 드러난 허상의 배신감을 내세운다. 그래서 다음 사람을 만난다 한들, 똥차가 벤츠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