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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51%

자유의새노래 2021. 9. 1. 23:24

가영이 누나에게 탈출을 권했어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1층 작은 예배실은 토요일 저녁이면 컴컴했다. 한편에 들어찬 사무실 미닫이 문 열고서 바라본 누나의 뒷모습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웃음이 많았고 미소가 은은했다. 한 숨을 쉬어가며 마치지 못한 그 일을 끝내 내 앞에 가져온 저녁이 떠오른 건. 그 일을 한 집사와 학생, 셋이서 만들어갈 무렵이다. 교회를 나오지 않으며 저절로 승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기억을 더듬었다. 자격증 시험을 위해서 주일 예배를 빠져도 되겠냐던 물음에 하나님 일이 더 중요하지 않겠냐던 대답과, 그 자리 떠난 누나의 온기도 사라지기 전 목사의 지껄이던 “쟤는 돈을 너무 좋아해” 한 마디는 지금도 황당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한심한 교회는 지금에서야 리빌드(rebuild) 운동을 펼치는 중이다. 웃기는 소리다. 내 사람도 못 챙겨서 뿔뿔이 흩어진 그 교회가 청년들 데려 온다고 티셔츠나 만들어서 찬양 집회 따위나 열고 있으니. 있을 때도 못 챙겨준 당신의 교회가 교회 밖 젊은이를 끌어나 올 수 있을는지. 기막힌 건 설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사람도 성숙해 간다. 그러나 이 교회 목사는 격(格)이 다르다. 성숙치 않은 퇴행적 단어들을 내뱉는다. 이슬람이 어쩌고 동성애가 저쩌고, 대면 예배가 안 되니 여의도 순복음 저 부지 팔아 2000억 차익 본 이야기나 지껄인다. 교인 수 300명도 안 되는 교회가 80만 대형교회 손가락질이다. 크기 얘기가 아니다. 한다는 설교가 증오의 정치나 작동시키며 말세와 소수자 탄압, 교회 생활 강요로 점철돼 프로파간다만도 못한 웅변이나 내걸고 있으니 기막힐 따름이다.


이 교회의 문법은 좆소라 불리는 부실기업과 다르지 않는다. 함께 성장한다는 이유로 되도 않는 희망, 미래, 천국, 열정, 성령충만 단어를 성경구절 명언처럼 섞으며 인재처럼 대우한다. 그러나 인력이 부족해 사람을 갈아 넣는다. 사람이 없으므로 모든 일이 주먹구구 이뤄진다. 사수도 없으므로 인수인계를 기대하지 말자. 일요일도 나와야 한다. 토요일도 요구한다. 급성장 시절 화려한 영광에 취한 채 그때의 열정을 교인들이 내보이길 바란다. 너희는 죄인이고 회개해야 산다며 가스라이팅을 진행한다. 그러다 교회를 옮기면 언급 금지 대상자가 된다. 심하면 신천지를 앞세우며 지옥에 갈 수 있다고 겁박한다. 꼬박꼬박 십일조를 내야 한다, 교회에. 좆소는 월급이라도 챙겨주지만 이 교회는 봉사라는 명목으로 한 푼도 챙겨주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마땅히 해야 할 봉사라며 ‘사역’이란 단어로 얼버무린다. 그런 교회를 누가 다니고 싶겠나. 탈출도 지능 순이라지 않은가.

 

 

가영이 누나가
교회를 나오며
자연스레 연락
끊겨 헤어지고
나 역시, 나와
오늘도 관계를
정리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9 사망원인통계에는 믿기 어려운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 제목 51%는 20대 사망 원인인 고의적 자해를 의미한다. 자살이란 단어 말이다. 헬조선이 무상하다. 더는 내려갈 곳 없어 이 세상을 떠나는 슬픈 청년들을 생각한다. 망할 좆소 욕지거리 내뱉으며 추노한다. 도무지 1% 되지 못한 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숫자는 생각보다 강하다. 어른들은 숫자에 약하다. 생산가능인구가 떨어지고 학령인구가 줄어들자 대학들이 벌벌 떤다. 아직까지는 숫자로 내세울 가짓수가 많을 테니 피부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크게 잃은 건 없을 테니 리빌드니 부흥이니 헛소리 할 여유는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리빌드 운동을 제창하던 눈망울엔 불안이 서려 있었다. 나와 같은 청년들이 없었다면 그 목사는 리빌드 운동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떠나간 청년들 숫자가 목사를 움직였다.


더 이상 청년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 사회생활 가르치던 어른들 목 주위가 서늘하다. 나이 들어 고독사하는 어른들이 많아졌다. 청년의 때에는 누구든지 연약하니 강해져야 하는 건 맞는 소리다. 사회생활 앞세우며 노동 착취하는 철없는 어른들이 문제일 뿐이다. 그런 어른들 혼내줄 방법은 그 공간을 벗어나는 일에서 출발한다. 태극기를 빙자해 정치권을 팬클럽 따위로 전락시킨 인간들을 쫓아내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지도자를 세우는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정치를 몰라도 괜찮다. 하나 둘 배워가면 된다. 앞으로도 모르면 나쁜 어른들을 답습해 갈 뿐이다. 더러운 어른들 문법을 배우는 이유도 앞으로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어른들은 순진한 청년들을 꼬드긴다. 가스라이팅도 이 단락에서 시도한다. 결국은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으므로, 구조를 뒤엎자는 얘기다.


리빌드 운동은 1123 운동처럼 실패할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면 콘셉트도 애매한 그런 중소형 교회부터 무너질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목사들의 걱정에도 “당신의 교인들은 신앙생활 잘 합니까”나 묻는다. 불쌍한 인간이다. 지금의 청년은 잘 안다. 증오가 생존과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런 인간들이 서울대 간 사람을 폄하하거나 숭상한다. 중간이 없다. 스스로 주체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랬다저랬다. 꿈조차 자기를 치장하는 귀걸이에 불과하다. 하나도 안 부럽다. 관계를 정리한 그 인간도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