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두 달 후면 이 신문, 자유의새노래를 창간하게 될 겁니다. 아무도 없는 한글날, 복지관 건물에서 매니저 ‘그린냥’을 필두로 개설한 녹림청월을 보고도 놀라면 안 됩니다. 반대진영 무찌르기 위해서 여론조작 일삼고 가면까지 쓰고 친밀한 척 연기하던 자료 눈으로 확인해보면 기막힌 감정부터 느끼게 될 겁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사실들을 글줄로 담기 위해 신문 제작에 열 올리게 될 테구요. 황당하죠. 필명 대한제국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백 서른하나 계정을 이용해 댓글 공작 펼친 걸까 물을 겁니다.
허나 그리 물어서는 곤란합니다. 시선을 돌려서 녹림청월은 무엇을 얻으려고,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백 서른하나 계정으로 여론조작 했는지를 물어야 비로소 보입니다. 필명 대한제국을 둘러싼 이 사태의 진상은 그들 녹림청월 자신의 욕망. 이것뿐입니다. 어떤 욕망일까요. 더 취재하다보면 보일 겁니다. 초딩 디시인사이드라 불리는 원류(源流)에선 찾을 수 없습니다. 내면의 솔직한 감정을 마구잡이 드러내던 지류(支流), 녹림청월에서 명확해집니다. 녹림청월 말하려고 쓴 편지는 아닙니다. 오늘은 다른 시선으로 보려고 합니다. 어른들 얘기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에게 스태프 역할 던져주고, 일선에서 물러난 어른들요. 유명세를 이용하는 건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린 어른들에게 주요한 덕목이겠죠. 그 인간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리 하나 던져주고 부려 먹는 것도 모자라 책 한 권 던져주고 사인만 갈긴다고 끝날 일은 아니죠. 정상적이지 못한, 지극히 중2병다운, 사춘기 흑화된 소녀들을 상대로 관리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책 한 권으로 끝날 문제겠습니까. 그때의 어른들도 인력 보강 대신 무책임한 열정페이를 요구했습니다. 잘하고 있다, “대단해 대한건아!” 한 마디 던지던 과거의 말들이 지금이라고 무엇이 다를까요. 아이돌 포토 사진만도 못한, 방 한 편 버려져 이제는 읽지도 않아서 외면 받은 그 책을 볼 때마다 어른들 욕망이 되살아납니다. 그럼에도 한 때의 기억이고, 과거이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버리지 않기를 잘했습니다. 기억과 함께 보관하기로 마음먹은 그 때의 결정처럼요. 지금도 그 책 겉면을 보면서, 손 안 대고 코 푸는 책임 없는 어른들을 증오합니다. 그러니 값비싼 노동으로 받아 낸 18권, 어른들에게 고마워 마십시오. 마땅히 일해서 받은 것뿐입니다.
사춘기 소녀들 모여든
철없는 공간 녹림청월
방조로 흑화한 그들은
여론조작이나 하겠지만
이후를 살아갈 당신은
나약한 이들 지켜주길
대대공작 일삼던 자들이 녹림청월을 어둠 속 장막으로 감춘지도 5년이 지났습니다. 어째서 15년 전 녹림청월에 의한 대대공작(對大工作) 사건을 지금까지도 거론하느냐 물을 겁니다. 먼 미래에는 매듭진 거 아니냐고 하면서요. 원류조차 바싹 마른지 오래입니다. 이 신문 창간호엔 상단에 배치한 녹림청월 발(發) 대대공작 사건보도 뿐만 아니라 반 지성으로 얼룩진 신앙 세태 비판하는 글도 실렸습니다. 지금은 참여교회 담임목사를 대단하다 자부할 테지만 시간만 지나보십시오. 다양한 어른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악질로 분류하고 말 겁니다. 그 인간의 수준을 알기까지 10년이 지나야 합니다. 인생 절반을 전체주의와 다르지 않은, 인간성을 상실한 집단에 몸담았다는 점에서 비극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보다 중요한 건, 현재에도 무책임한 어른들을 마주하느냐는 겁니다. 환경이란 담을 넘어보니, 과거의 삶에서 비극을 느낄 여력 하나 없더군요. 여전히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이제 곧 지류를 만들어 낸 원류를 벗어나 원류라고 생각했던 지류를 바라보며 두 가지 종류의 어른들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책임을 지느냐, 지지 못하느냐. 두 기준으로 보면 명확하게 그 어른을 따라갈지 말지를 알게 될 겁니다. 어른이라고 다 올바른 말들만 하지는 않습니다. 순진하고 착해서 그렇습니다. 좀체 남의 말 의심치 않고, 농담조차 먹히질 않으니. 고지식한 보수적 태도가 때로는 안정적인 삶으로 이어갈 동력일 테지만, 세상만사 일장일단(一長一短)일 뿐입니다. 그러니 어른들을 의심하십시오.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채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는 원류적 어른들이 많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듯, 방치 된 스태프, 필명 대한제국은 허망하게 무너졌습니다. 당신의 시간에선 그 자체를 비극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원류를 벗어난, 지류로 보일 원류 앞에선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보일 따름입니다. 멍청하고 어처구니없는 공간은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게 당연한 겁니다.
그분도 지류로 보이는 원류 앞에서 공허감을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곧 당신이 지지하게 될 그분의 기일입니다. 왜 그 세계로 갔을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저지른 사회적 폭력과 집단에 의한 공격은 명백합니다. 마침 포털 다음은 카페 게시글 작성자가 입력한 댓글에 작성자를 표기하기로 결정해 시행에 이르렀습니다. 녹림청월 같은 인간들이 줄어 들기야 하겠지만, 녹림청월 방치하던 어른들은 줄어들지 모르겠습니다. 미래에 도달할 저 역시 그런 어른이 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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