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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다시 정의를 생각한다

 

10년 전 화두는 정의였다. 경건한 삶 중심으로 신앙적 삶의 태도를 정의로 본 것이다. 그 시대는 현실세계보다 내면세계를 강조하던 그런 시기였다. 생각처럼 이뤄지지 않는 신앙의 삶은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높은 도덕심을 요구했다. 높은 도덕심은 ‘구별된 삶’이란 근거로 “아닌 것을 아니”라 말할 용기를 안겼지만 돌아온 것은 사회와의 완벽한 분리였다. 교회와 사회의 분리는 단어로도 명확히 드러났다. ‘세상’과 ‘교회’가 아이히만의 ‘언어규칙’처럼 정의가 아닐 수 있음을 은폐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머리는 정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몸은 정의롭지 않으니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세속 정권은 자아를 포함한 신앙 세계를 파괴하는 악마적 존재로 보았고 허상의 적을 낳았다. 보이지 않는 적이 정의를 공격하고 있으니 이에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한 것이다. 적화(敵化)는 정의를 지키기 위한 일념으로 사용한 도구였을 뿐이다. 어차피 신앙적 삶의 태도는 죽을 때까지 이뤄지지 않을 단계였다. 경건한 삶은 다시 말해 인격이란 결코 한 순간 변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와 완벽히 분리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경건한 삶의 태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적과 싸우는 프레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적화 프레임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에 대중을 상대하는 사람들에게 유효하게 쓰이는 방식이다. 보수 정권 시절 이념 프레임으로 상대의 입을 가로 막았던 무수한 사례. 반대로 정의라는 프레임으로 상대를 악마로 만들었던 무수한 사례를 비교해보면 정의와 아무 상관없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오히려 상대를 적으로 만들어 나의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발상이야 말로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만든다. 침묵의 공존 속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은 확증편향을 강하게 만들고 또 다시 침묵하게 만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정의라는 순수 선을 추구하며 발생하는 욕망이다. 지상 천국을 만들기 위해 헌금으로 대형 건물을 짓는 일이 정의와 무슨 상관인가. 무엇이든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정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정의롭지 않은 인간들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생각하고 믿으며 따르는 정의의 정의(定義)가 다르다. 부를 축적하는 것처럼, 정의를 독점하려는 태도도 정의와 무관한 일이다. 인간의 욕망은 정의일 수 없다. 정의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전체주의 논리는 발동한다. 악이 더 이상 악이 아닌 단계에서 인간의 무가치함은 인간 스스로를 잉여 존재로 전락하게 만들고 다시금 체제 논리에 복속하게 만든다. 단지 각자의 마음 속 욕망이 만들어 낸 결과라는 점에서 정의를 왜곡하는 일은 전체주의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正義를 나만의 것으로
우리만의 옳은 것으로
오해하는 敵化 프레임
오히려 정의는 조용히
은빛 小女처럼 멀리서
응원하고 있을지도

 


미성숙한 인간들이 정의를 내세우며 성숙함을 추구하는 섬광(閃光)을 볼 때마다 정의를 묻는다. 한 순간 타오른 욕망 뒤에 남은 재를 보면서 ‘고작 이런 걸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했나’를 묻는 것이다. 정의를 지켜내기 위해 모인 함성과 열기. 그 끈적이는 틈 속에선 결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교회의 부흥회는 그날의 콘서트로만 여겨야 할 이유다. 퇴행적 자의식은 사람들의 뜨거운 함성 속이 아니라 차갑고 고독한 공간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단 순간에 얻어지는 정의나,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인격이란 존재하지 않는. 냉엄함 속에서 고통과 고독함이 단단한 어른으로 만들기에 한 순간 타오르는 열기 또한 각자의 욕망에 불과할 뿐이란 사실을 가리킨다.


우리의 정의를 망가뜨리기 위해 만들어 낸 적화 프레임이란 망상은 현실 세계로 발 디딘 한 걸음에서부터 깨져갔다. 현실은 현실일 뿐이고, 적은 존재하지 않으며, 고로 우리의 정의는 정의가 아닐 수 있다는 반성이 그 시작이었다. 아닐 수 있음을 자각하는 일. 다시 정의를 정의하는 일부터 정초하자 적화 프레임은 하나 둘 해체되기 시작했다. 다시금 묻는 과정 속에서 정의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존재를 살펴보았다. 정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의견을 청취하고 반론하면서 베일을 거두며 하나 둘 씩 드러나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래서 남은 두 가지.


하나는 부끄러움이다. 아직도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미안함에서 묻어난 부끄러움. 정의라고 생각했던 게 알고 보니 착시였고 내 욕망뿐이었을 명백한 부끄러움. 그럼에도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는 겸손한 부끄러움. 이 부끄러움이 다시 정의를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정의는 고맙게도, 당신에게 달려가기 위해 부끄러움을 선사하면서도 결코 자신을 놓지 말라고 말해준다. 인간이기에 넘어질 수 있다고. 그러나 명백하게 잘못은 잘못이므로 부끄러워하라고 가르친다.


남은 한 가지는 인간의 욕망.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욕망한다지만, 그렇기에 나를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 욕망을 가지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남는다. 때로는 진취적인 삶으로 나를 이끌어줄 테지만, 욕망이 정의를 감싸 안을 때라면 언제든 나와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정의는 우리를 기다려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당신을 만날 때까지 끊임없이 달려가게 만든다고 믿는다.

 

정의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