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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아기새는 날개를 펴 날았을까

자유의새노래 2022. 10. 27. 22:41

 

 

조금씩 누나에게 스며든 것도 이 무렵이다. 신앙에 눈을 뜬 누나의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누나라는 사람 그 자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누나를 알고 싶었다.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누나의 바라보는 시선에 맞추고 싶었다. 곁가지 누나에 관해서가 아니라 누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다. 눈을 마주하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원했다. 한갓 고등학생뿐인 내가 누나의 마음을 이해할 리 없었다. 고등학생이라서가 아니다. 서로 다른 환경이 누나를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스며든 마음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누나를 모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기에 먹먹한 가슴만 부여잡았다.

누나는 약대를 졸업한 후 선교사로 일하고 싶어 했다. 신학생도 읽지 않을 두꺼운 교리서 ‘기독교 강요’를 꺼내 들었다. 영적인 대화를 추구했다. 하나님의 일만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기를 바랬다. 누나에게 사람들은 선교의 대상자였다. 따라서 나를 성경 지식 물어볼 영의 눈이 뜨인 고등학생으로 보았다. 누나의 관심은 마음을 즐겁게 했다. 누구도 물어보지 않을 신앙에 대답하며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남들보다 대단하게 바라봐준 시선에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둘만의 공간. 세상은 미쳐 돌아가지만 우린 무해하고 올바른 신앙으로 세상에 맞서는 드라마 같은 감성이 등줄기 날개로 돋았다.

누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도 알지 못했다. 이성(二姓)의 감정을 모르던 탓이다. 단지 누나가 함께해 주길 바랬다. 좀 더 마음에 머무르기를 바랬다. 누나가 내 신앙이 아닌 내 마음에 관심 가져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누나와 사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누나가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누나의 쇄골을 보아도 누나는 누나였다. 누나는 나를 대단한 신앙인으로 추켜세웠다. 누나에게 나는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고등학생이면서도 누구에게나 ‘영적인 티’를 내는 담대한 신앙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신앙인이 아닌데’ 생각했다. 수능 앞둔 고등학생, 사람 좋아하는, 삶을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는, 그래서 고독을 느끼며 성서의 문체로 글 써 내려가는 고등학생. 남자아이.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 누나를 만나며 돋아난 날개에서 쓰라린 감정을 느꼈다. 생겨나면 안 될 하찮은 상처로 치부했다. 이미 자라기 시작한 날개를 찢을 수도 꺾을 수도 없었다. 다시 누나를 모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이젠 기억에조차 없는
꺾이고만 누나의 날개
아름다웠다는 것만이
닳아버린 마음에 남아
이카로스 날개 아슬이
해방의 경계선 너머에
디딘 순간만 기억한다

 


누나는 감정을 배제했다. 다채로운 감정을 ‘애정표현’ 이 한 단어로 정의했다. 정욕이란 이름으로 고등학생 남자아이를 밀어냈다. 오히려 누나는 신앙인 그 자체에 눈길이 가 있었다. 나를 표현할 수많은 정의 대신 ‘신앙인’ 이 한 단어에 욱여넣은 게 싫었다. 누나는 신앙에 방해될 인간관계를 정리했다. 5년 남자친구 관계도 구조조정했다. 오직 신앙, 그 하나를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수험생이었다. 메신저 한 편, 아래로 깔리는 대화방이 못 미더웠다. 필요할 때만 찾는다던 절망이 생각을 지배했다. 누나는 누나의 갈 길이 있었다. 나도 내 갈 길 걷다 우연히 누나를 만났을 뿐이다. 누나와 나는 같은 언어를 공유했지만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동그라미 같은 삼각형 관계였다. 삼각형이면 삼각형이고 동그라미면 동그라미지 삼각형 같은 동그라미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지금에서야 동그라미 같은 삼각형 관계가 실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능은 하다. 닳고 닳아 각이 사라지고만 과거의 삼각형이라면 말이다. 운 좋게도 각이 닳아 사라지기 전 누나와 헤어지고 말았다. 누나에게서 도망쳤기 때문이다. 날개가 다 자랄 무렵 가볍게 날아올랐다. 누나에게서 벗어나며 생각했다. 날개가 자라난 과정은 견디기 어려울 만치 고통스러웠다고. 고통의 크기만큼 단단해진 날개로 비로소 누나에게서 벗어났다고. 저 밑에서 누나는 새로운 날개가 돋아나기를 기도했다. 꺾이고만 옛 날개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누나의 옛 날개가 가장 아름다웠다. 누나도 나처럼 죄인의 몸을 입고 사느라 힘들어했다. 누나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무해한 사람이 되리라고 믿었다. 인생 처음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 형편없는 내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 나는 죄인도 아니었고, 신앙인도 아니었다.

날개를 펴 날아다니는 동안 바깥 세계를 구경했다.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을 경험했다. 복합적인 언어를 체험하며 사람의 관계를 맛보았다. 과거-현재-미래라는 건조한 시간 나열에서 벗어났다. 인생은 신의 손길로 구원받는 삶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고통 중에도 날갯짓 드넓은 지평으로 넘어설 때 살아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다시 누나에게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닳아 사라질 뻔한 동그라미 같은 삼각형이 떠올랐다. 망가진 줄 알았던 마음이 살아나고 있었다. 화색이 돋움과 동시에 다시 누나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달았다. 고고한 눈빛으로 새벽녘 여명을 눈앞에 두었다. 장렬히 빛나는 태양을 도도하게 바라보았다. 누나의 날개가 다시금 돋아났을까. 바닷물에 닿을 것 같으면서도 태양 빛으로 녹을 것만 같은 이카로스의 날개로 고3 첫 순간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