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문제로 엄마와 싸우다 한 마디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렇게 힘들면 뭐 하러 교회에서 일을 하니? 안 다니면 되는 것을.” 맞는 말씀이라 할 말이 없었다.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교회를 다니고, 힘들면서도 무급으로 봉사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교회라는 시스템에 몸이 맞았기 때문이고, 교회를 나와서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나도 그런 사실을 13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이제는 일요일 아침 9시에 일어나도 예배당을 찾지 않는다. 그 흔한 대형교회 유튜브 스트리밍조차 청취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내 몸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몸이 되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교회를 나오고 군복무 마쳐서 돌아온 신학교는 여전히 형편없었다. 룸살롱 다녀오고도 아무 문제 없다고 항변하던 실천신학 교수는 여전히 믿음 좋은 척했고 선교학 교수는 강경한 신앙인이 되어 드디어 학과장 자리를 붙잡았다. 주여 칠창(七唱) 올려 부치던 신약학 교수는 목사들을 만나며 총장을 노렸고 선배 연줄 잡은 또 다른 신약학 교수는 승진을 엿보았다. 초라한 삼천 원짜리 참치마요 비비다가 조용히 물었다. “만일 여자 아이돌을 믿는다던 사람이 자기 삶의 변화를 말한다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맞은편 신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교회를 다녀서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졌다고 광고하던 인간에게 똑같은 논리로 들이대니 아무 말 못할 게 뻔했다. 이들 신학생이 굳게 믿던 진리는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 ‘인간의 전적 타락’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죄인인 사람이 선하게 살아도 지옥에 가는가. 반대로 예수를 믿는다던 사람이 나쁘게 살면 천국에 가는가. 왜 열심히 믿어도 인간은 여전히 죄를 짓는가. 기독교인보다 선하게 살아도 지옥에 가는가. 생각을 바꾸어보았다. 애초에 인간은 죄인인 게 아니라 그저 연약한 존재는 아니었을까.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욕망을 가지고 사는 것 아닌가. 욕망이 법률을 위배할 때 처벌 받는 것이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땐 그 욕망을 바르게 사용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성경의 시각에서 죄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선을 만들어낼 때 그 행위를 죄라고 말할 수 있는가. 기독교인들이 눈 가리고 저지르는 선한 악행도, 결국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닌가.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지극히 당연하고 생물학적 교훈을 깨닫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 스스로를 어리석게 생각하고 비참하게 바라보던 시각에서 자유를 맛보았다. 이 당연한 교훈을 깨닫고 더는 기독교가 내 몸에 맞지 않게 되었다.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었다.(2고린5,17)
어차피 기독교인들은
성경도 교리도 神조차
알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런데도 성경과 논문
읽으면서 대화하려던
내 아둔함을 반성한다
이제 성경을 치우련다
성 밖 예수가 부른다
지금도 개신교회는 자기 삶이 변화되었다를 근거로 예수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7-80년대엔 대형교회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주장한 수준과 다르지 않다. 지금도 대형교회 지어가는 과정 자체를 하나님이 허락했다고 믿는 교회도 존재한다. 황당한 일이다. 고작 벽돌 수십만 장 세운다고 하나님이 존재한다니. 잘 먹고 잘 사는 자본주의 논리가 구원의 증거라는 말인가? 보여줄 진리가 없으니, 진리와 비슷한 상품을 가져다가 팔아먹고 있으니. 교회 안 노동착취가 문제로도 보이지 않는 데엔 수준 낮은 목사들 때문 아닌가. 불리할 땐 교회만의 방식이 있다며 방어 논리를 펴고 유리할 땐 온갖 편법을 이용해 자본주의 논리로 교회 성장을 일궈내는 신앙이 올바르다고 보는가. 진리를 맨입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면 누구든지 그 진리를 맨입으로 이뤄냈을 것이다. 교회가 아니어도 충분히 인간의 인간됨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성공을 비아냥거리듯 “어차피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너 지옥!”을 말하며 하늘나라의 문을 닫는 이들은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마태 23,13)
그동안 기독교인을 이해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때로는 성경을 읽었고 논문을 찾아보았다. 전도사에게 연락해 묻기도 했고, 목사를 찾아가 의견을 들었다.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 입장에서 내 신앙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교회에 발 디딘지 20년이 지나서야 한 가지 교훈을 깨달았다. 기독교인들 생각한답시고,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차피 기독교의 허구를 깨달은 사람들이 교회를 탈출한지 오래다. 이제 본문비평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앉아 성경 구절을 찾아 큐티(QT)할 뿐이다. 어차피 자기들 경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신천지 마냥 성경을 외우기만 할 뿐이다. 이들에게 이사야서 거론하며 단일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의 변화를 가르쳐 봐야 소 귀에 경 읽기다. 세상 돌아가는 섭리만 공부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진리도 아닐 교리를 배운다고 내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에 발 디딘지 올해로 20년. 기독교와 관련한 모든 공부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성경이 아니어도 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아갈 어른이 된지 오래다. 청소년 문학 소설을 읽어도 그 뜻을 발견할 때 영적인 감격을 느낀다.
기독교를 벗어난다 해서, 예수와 나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10년이 지나도 버릴 수 없는. 낮은 자를 향한 예수의 마음.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었어도 당신을 사랑하려는 이 마음은 여전하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로마8,35) 맞다.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간 저들을 손가락질 하며, 배교자라 욕할지라도 예수는 그들을 사랑하고, 떠나간 이들도 예수를 기억한다. 이제 교회가 독점하던 예수라는 우상에 치를 떨며 예수와 손잡고 교회를 떠나련다. 오히려 진리는 교회 바깥에 있다.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보고 있다.”(이사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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