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를 동경하던 그 녀석 입에서 꿈에 그리던 순간들이 사라지자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세달 전이다. 녀석이 좋아하던 꿈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시간의 검증이면 충분하다고 봤다. 정말 사랑하면 오랜 시간 지나도 소중한 꿈으로 새겨갔을 테고, 사랑하지 않았다면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말 거라는 검증이다. 일년하고도 반 년 남은 시간 서울대에 합격하겠다던 만들어진 이야기를 보면서 하느님을 만났다는 듯, 삶은 달라져갈 것이고 새로운 나날만이 드리울 거라 믿었던 학부 때 모습이 겹쳐 보였다. 착각 속에서 신을 만난 줄 알았던 완전한 믿음을 검증할 방법 하나 없었고 오로지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은 거짓은 서글픈 감정을 가리켰다. 박살난 꿈 조각, 빛 잃은 별 되어 잊혀서야 눈물을 머금고 나약한 소녀가 에둘러 한 조각, 한 조각 줍던 뒤늦은 당혹감을 보았다.
이 지면에는 여학생 이름 담긴 글 하나가 실릴 예정이었다. 여고생 그 녀석을 끌어당기는 별. 세 번 첨삭 두 번 탈고 끝에 마무리한 글 한 문단만 바꾸고 ‘교회 바깥 나서면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글로 탈바꿈해 게재한 이유에는 사실로 드러나지 않은 시간의 검증이 자리했다. 꿈을 가지라, 희망을 새겨라 따위의 글은 아니다. 그저 모름의 바다를 유랑하는. 어쩌면 답이 아니면서도 답일지 모르는 탈합치(De-coincidence)만을 예고할 뿐이다. 이해는 했다. 남들 열심히 공부하고, 촘촘하게 쌓아가는 듯 보이는 희망의 탑 고공행진 보면서 누구라도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끼지 말라는 법이 어딨겠나. 고작 신학교 하나 믿고 알량한 믿음 따위 맹신했던 10년 전 나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철든 녀석 앞에서 탈합치니 유랑이니, 헤매는 모름의 바다 따위 단어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의 검증은 그 때의 칼럼을 게재하려던 순간에도 보이지 않던 사실을 일러주었다. 서울대라는 단단한 반석 앞에 모든 바라던 것들이 일순간 녹아버려 사라지는 환상이란 점에서 모든 바라던 것들이 진정 바라던 것들이 맞는지를 묻었다. ‘너 밖에 없다’던 말도 서울대 앞에서 스러져 녹아버렸고, ‘사랑하는 일이잖아’하던 습관들도 단단한 반석 앞에서 스스럼없이 사라지자 가나안에 도착하고 비로소 하느님과 줄다리기 벌이던 그 때의 공동체가 떠올랐다. 신학교만 도착하면, 도달하면! 다 될 줄 알았던 착각이 허무하게 녹아 사라져 버렸다. 시간은 반 년 만에 검증을 마쳤다. ‘네가 가지던 그 꿈이 진짜인 줄 알았냐’며 감사 보고서를 내던졌고,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틀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렸다’ 조용히 읊조리며 적막한 대강당서 어둠 속 눈물을 흘렸다.
이상한 표준 만들고서
남의 삶, 부럽게 하니
불안 감정은 요동치고
나의 인생은 부끄럽고
늦게나마 꿈 조각들
주울지 아무도 모르듯
왜들 그리 사시나 왜
지금이야 유랑으로 말하지만, 불안히 외줄 타던 시절엔 유랑 같은 단어 따위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공포 그 자체였다. 헛발이라도 딛는 순간 죽을 것만 같았다. 교재라도 있으면 했다. 교재대로 살아가면 ‘아, 이만하면 충분한 삶이구나’ 자위라도 하지 않았을까. 어찌어찌 살아가다보니 지금으로 흘러왔고 오늘에 이르렀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한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며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고 말한다. 나쁘지 않은 말들이다. 꽤 단순하다. 어렵지 않다. 그러나 기어이 어렵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훈수 두는 인간들. 지금의 삶도 버거운데, 이후의 삶도 설계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이들이 있다. 천국과 지옥, 썩은 내 나는 주술적 단어를 읊조리며 인생이란 이런 거라고 오만한 말들을 내뱉는다. 그들은 표준을 만드는 자들이다. 자기가 표준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서른에는 취업할 것, 여자라면 서른다섯까진 결혼할 것, 네 살 차이는 만나지 말 것, 이런 사람 특징 네 가지를 나열하고 이래라저래라 지껄인다. 그 아래 동조하던 댓글들과 아멘들은 가관이다. 유유상종 따로 없다.
표준이란 단어는 매혹적이다. 모른다는 말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표준이 더 있어 보인다. 티키타카 못해도 괜찮은데. 밀당 못할 수도 있는데. 표준에 미달하면 스스로를 못난 사람 취급하는 행동과 정신이야 말로 표준에 달하는지. 싱어송라이터 박소은의 정규 앨범 ‘고강동’ 첫 번째 수록곡이 인상적이다. ‘인생이 박살나던 순간.’ 당혹스러움일까, 분노일까, 배신감일까. 처음 내뱉던 글줄부터 할 말을 잃는다. ‘아무것도 모르겠을 때/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네’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만들어준 표준이 맞는다고 생각하며 달려왔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하등 쓸모없는 현실 앞에서 이 노래가 떠올랐다. 시간의 검증은 이럴 때 유용하다. 시간의 검증은 가장 일차원적 방법이다. 이조차 견디질 못하고 사라져 녹아버린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맞는다. 서울대 앞에 녹아 사라져버린 그 녀석의 꿈처럼.
하지만 모른다. 애써 외면했던 그 녀석, 10년 후 그 소녀처럼 박살난 꿈 조각 하나하나 주우며 뒤늦게나마 제 로(路)로 걸어갈지. 뒤늦다는 말조차 틀렸음을 깨달을지. 박살나도 괜찮은데. 그래도 망가진 삶 아닌데. 끝까지 아껴주고 싶었는데. 힘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오늘도 이 칼럼, 미안하다는 말로 마치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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