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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보이지 않는 나라를 꿈꾼다

박원순과 나경원이 맞붙던 시절의 이야기다. 종북(從北) 단체와 친밀하게 지낸다는 박원순 후보의 일설을 믿고 순진한 마음으로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의 답변은 간단했다. 정치는 단순한 이념으로 보는 게 아니라고. 이념으로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새로운 눈이 뜨이자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왜곡된 정치의 시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앙의 끝으로 달려가던 와중에 붙잡은 정치 이념이 보수적 깨시민으로 만든 후였다. 대학을 입학했다. 생각보다 ‘보이지 않는 나라’는 많았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가 대표적이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하느님 나라를 꿈꾼다. 보수적 성향의 시민도 보이지 않는 나라를 꿈꾼다. 대깨문이 박멸되는 나라. 진보적 성향의 시민도 다를 바 없다. 토착 왜구가 청산된 나라. 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우는 사회와 다른, 현실 세계에 입문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나라를 경험한다. 사회생활 단어도 ‘보이지 않는 나라’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사용한다.


슬프게도 코로나 파동을 겪은 이 시점에서도. 눈물 흘리지 않고서는 맨 눈으로 보기 힘든 ‘보이지 않는 나라’가 스며든다. 죽음. 고독사가 휩쓸고 지나간 집에서 청소하던 일꾼을 마주했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살겠구나’ 그리 생각했다. 현실은 달랐다. 보이지 않는 노동의 짐,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 좋소에서 또 좋소로 이직해야 하는 절망. 어른이 되고서야 자기 몸 하나 건재하기 힘겨운 대한민국이란 보이지 않는 나라를 보았다. 2020년에 발표한 통계청 사망원인통계는 20대 사망원인을 고의적 자해 51%를 꼽는다. 노인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한다. 같은 자료에서 고의적 자해는 50대부터 급증한다. 미친 나라다. 보이지 않는 죽음의 나라를 선택한다. 도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사람, 두 사람 떨어져 나가는 광경을 지켜만 보던 개개인이 무엇으로 바깥 경계로 내몰린 사람들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박원순과 나경원의 사투를 보면서 나경원이 이기는 것만이 이 나라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믿었던 것처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를 운운하며 보이지 않는 나라를 꿈꾸는 이들도 그저 보이는 대로 손을 뻗는다.

 

 

사람들이 죽어감에도
이념으로만 경직되어
증오 정치 내 뱉는다
나쁜 어른 소거하고
성실하게 사는 이들
목소리에 주목할 때

 


언젠가 보이지 않은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울컥했다. 저 사람은 오늘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편안하게 쉴 수 있을까. 저 부장은 돌아가서 혼자 무슨 반찬을 해먹을지. 팀장은 한 시간도 넘는 퇴근길 버스 안에서 쪽잠이라도 잘 수 있을지. 보이지 않는 노동의 나라 저 끝자락을 상상할 때마다 눈물이 차오른다. 하지만 눈물은 어김없이 분노로 바뀐다. 퇴근하고 내내 욕을 내뱉었다. 속이 타오를 때까지 욕을 했다.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비명에 스피커까지 틀어가며 제 할 말만 떠드는 인간들을 때문이다. 비명이라 말했다. 정치는 나약한 이들을 위해서 작동해야 하건만. 대깨문과 토착왜구 사이에서 성실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명이 양쪽 스피커에서 깨끗하게 사라진다. 계급으로 전락한 이들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나라’가 된다. 신학자 김진호는 저서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에서 ‘그 바깥’ 단어로 설명을 이어간다. 어느 누구도 그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나라로 향한다 하더라도.


왜곡된 정치관이 사라진 순간은 조선일보를 절독한 시점이 아니었다. 조선일보가 비로소 조선일보로 보일 때다. 보이지 않는 나라, 저 조선일보가 판을 짜고 프레임을 섬세하게 엮어내던 장인정신 깨닫고서 현실을 알아차렸다. 일찍이 보이지 않는 나라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 듯했다. 그런 어른은 서로를 ‘친구’라고 부른다. 높고 낮음을 구분하지 않으며, 동등한 인간으로 대한다. 인생 경험 가르치는 인간들의 맥락과 결이 다르다. 더불어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나라 속 친구는 서로가 서로를 끌어다주는 독특한 관계를 의미했다. 친구라 부르던 두 어른은 묵묵히 노동자로 하루를 살아간다. 서울대만으로도 이뤄질 수 없는 나라.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도 이뤄낼 수 없는 나라. 없는 셈 치더라도 숨길 수 없는 나라. 그저 파란나라 꿈꾸던 혜은이 목소리로 상상하던 나라. 정치인이, 종교인이 만들어 낸 허상의 보이지 않는 나라를 빗금으로 지우고. 나약한 자를 친구로 삼고 보이지 않는 나라를 살아가는 이들의 우정으로 다시 써 넣어 그려본다.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나라는 이념의 경도된 시각, 대깨문과 토착왜구라는 단어들 사이에서 이뤄질 수 없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을 외면하고 적대적 공범자들이나 바라는 증오의 정치 속에서는 그 나라가 설 수 없다. 참여교회의 리빌딩 프로젝트로는 어림도 없다. 다음 세대를 붙잡는다지만, 노동 착취조차 해결하지 못한 그 교회가 발버둥 친다한들 달라질 게 없다. 따라서 나쁜 어른들을 공론장에서 퇴출시켜야 한다. 필요 없는 논의를 소거하는 일. 아름다운 이름의 문정(文井)에서 그 나라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