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 01. 17 22:53 | A30
눈망울을 마주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네” 한 마디가 전부였다. 말조차 잘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본지 러블리즈덕질일기에 실을 요량으로 참석한 러블리즈 오프라인 모임에서 본 생일 카페 기획자의 첫 인상이다. 눈동자를 마주치고 바라보며 대화하길 좋아하던 나조차 옷깃을 저미었다. 다소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사람 대할 줄 모르는 분위기를 느꼈다. 그는 홀로 배지를 팔다가 사라졌고, 집필하던 기사를 삭제해 싣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이돌 세계에 발 딛고서 경험한 이상한 분위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도 장충체육관 나서면서 약 먹었냐 물어보던 두 남성을 애틋하게 보지 않는다.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는 척할지언정 적어도 약한 부분 건드리며 비난하는 못된 짓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아픈 부분 드러내고 공격하는 문화가 익숙한 아이돌 세계는 멀리해야 마땅했다. 처음 러블리즈 좋아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지애의 생생한 낯빛. 수정의 우는 소리, 명은의 독특한 “-다요”체, 소울의 딱딱한 말투, 지수의 통통한 볼, 예인의 어리숙한 일상, 케이의 희망 담은 목소리, 미주의 서운한 표정. 완벽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세울 성적 하나 없어도 즐거웠다. 수정이와 예인이의 찌그러진 하트 손동작에 늘 웃었다. 언제라도 토라질 지애를 응원했다. 러블리즈는 이슬만 마시지 않았다.
트로트에까지 와 닿을 성장 서사는 안준영 피디의 구속과 함께 눈 녹듯 사라졌다. 한 여름 밤 꿈처럼 사그라진 그 때의 흥분과 동질감은 많은 이들을 덕질 세계로 이끌었다. 내 아이 키우는 마음으로 투표했다고 한다. 여성상품화와 다르게 남자 아이돌에게는 유난히 관대한 그 신문사 논조가 놀라웠다. 힘겨운 세상에서 내가 만드는 성공 신화였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무 말 섞지는 않았다. 나도 그런 성장 서사 매력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이 지나 수많은 진리의 죽음을 경험하고 도탄(塗炭)을 바라봤다. 거대한 한국교회 악의 체제에서 벗어났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굴레라 믿었던 그 속에서 한 발자국 내딛지 못한 현실을 발견했다. 아이돌을 제2오순절로 부른 이유다. 자기 착취적 문화, 뼈를 갈아 만드는 콘텐츠, 바짝 돈 번다는 왜곡된 삶에 대한 인식, 되도 않는 성적 운운하며 한낱 인간에 불과한 이들 멋들어지게 꾸며대고 자신에게 치장하는 인간들.
다이아 은진의 눈에서
느껴진 공허와 슬픔은
이곳 세계의 이유들을
물으며 벗어나게 한다
찾아온 沈潛 속 물음에
삶은 유랑하는 거라고
청년들과 학생들이 어른들의 나쁜 짓을 따라한다. 큰일이다. 1등 신문이나 해댈 밑장빼기를 인터넷 곳곳에서 또 보아야 한다니. 이루다와 알페스가 인터넷에 오르내린다. 대중을 욕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나. 모두가 울분에 차있다. 커뮤니티를 닫았다. 조선일보 구독을 해지했다. 뉴스데스크 생방송을 닫아버렸다. 대중의 말들을 멀리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공원소녀 서경이와 서령이의 목소리만 주목했다. “우린 지중해 어느 이름 모를 해변/길 잃은 것 같애 아무렴 어때/아주 멀리 간대도 나를 찾지 말아 줘/내 맘이야이야/내 맘이야이야” 외롭지 않았다. 사람 좋아하던 내게서 사람 한 명 찾을 수 없는 유일한 시기가 아닐까. 머릿속 정화되는 기분 속에서 자신에게 집중했다. 편안함이 전부가 아니었다. 마음의 존재와 가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음과 정신에서 가치와 의미들이 지면 신문 속 기사들 배치처럼 이동한다. 지각 변동이다. 마음 속 제일의 가치로 떠올랐던 자기 계발 코르셋이 사라졌다. 러블리즈가 지워졌다. 그 자리를 대체한 비비드 색채와 정갈한 언어의 시(詩)가 자리했다. 이제 시작이다.
마지막이 되었을지 모를 러블리즈덕질일기는 이렇게 꾸미고 싶었다. “나는 명은이다요”로 시작한 커버스토리 헤드라인, 한 면 가득 채운 명은이의 얼굴. 러블리즈 멤버들의 성향과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정다운 호칭. 베이비소울 특유의 입술 컷 자세를 움직이는 사진으로 모아 묶고. 여자 아이돌 꿈꾸는 어린 아이 성장기를 담은 ‘마법의 스테이지 팬시 라라’ 리뷰. ‘걸그룹의 조상들’ 서평. 아이돌 바바를 끝내고 성인 배우 채승하로 인사해 출현한 영화 비판. 그리고 보랏빛 저무는 당신들의 시대를 사설로 담아내 그 끝을 또 다른 여덟 면 속보로 채우려고 기획했다. 타블로이드 호외판도 러블리즈가 아니었으면 만들지도 않았다. 콘서트처럼 마지막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러블리즈덕질일기 섹션도 그 끝에 다다르지 않을까 상상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의욕도 은진이의 눈빛에서 느껴졌던 슬픔에 다다르자 깡그리 사라졌다.
시(時)를 쓰기 위해 발 디딘 인스타그램 세계가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뚜렷한 이목구비, 가공한 특유의 색채, 만들어진 감정과 장소들, 누가 봐도 비슷한 얼굴 앞 발걸음 떼고서 시선 없음에 집중했다. 교회에서 느껴졌던 똑같은 “아멘”들이 들리지 않는다. 상황과 장소를 가공해야 마땅했던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침묵의 세계로 귀환한다. 저녁노을 져 가는 도시 속 고요한 예배당에서 느꼈던 침잠함은 역겨운 모름의 바다 속에서 건져주던 고마운 시간이다. 이곳엔 가끔씩 솔직하지 못해 어리숙한 자신을 탓하던 소녀는 없다. 애꿎은 내러티브 탓하게 만들던 소녀 3부작도 없다. 앞으로도 없어야 하고 비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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