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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미안해, 최진리

자유의새노래 2020. 10. 23. 16:19

입력 : 2020. 10. 23 | A34

 

기일을 맞이해 작성한 시론의 분량은 이천사백자다. 마음 모아 작성하고 두 문단, 세 문단 쯤 남겨 놓고 천오백자 모두 지우고 말았는데. 첫째는 진리의 죽음을 다루지 못하겠다는 한 숨, 둘째는 진리의 떠남에 어떠한 인용도 할 수 없다는 슬픔이 한 문단씩 지우게 만들었다. 내가 무엇이관대 살아있음을 논한단 말인가라는 부끄러움을 잇는 질문: 내가 무엇이관대 진리의 죽음, 진리에 대한 것, 진리가 가지던 것을 다룬다는 말이냐 이것 때문이었다. 늘 지면신문 이 자리에 떨었던 고상한 글을 미뤄두고 진리에게 설리에게 미안한 몇 가지를 늘여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코로나 파동을 겪으며 진하게 남았던 질문 하나,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와줄 거냐”는 물음에 대답을 유보했던 기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대답을 유보했다. 일부러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재차 이어지는 질문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이유에는 확답 이후에 이어질지 모르는 죽음이 나의 확답에 의해 이어지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작별 인사처럼 떠나면 무척 서운할 거라는 말을 침묵으로 닿기를 바랬다. 그렇게 위기를 넘긴 듯했다. 도무지 받들기 어려운 가정환경과 양심의 충돌은 그 스스로가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 만큼 인지부조화로 강렬했다. 어느 목사 아들로 태어나지 않음을 감사하게 생각할 지경으로 한 사람의 인생은 어그러져갔다. 장례식 물음도 이 배경에서 등장했다.


먹고 사는 일이 바쁜 현대사회에서 부모 세대만큼은 먹고 살아야 하잖느냐는 상황을 살아가며 죽음을 묻는다는 건 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을 의미했다. 늘 이 지면에 실렸을 고상해 보이는 철학적 담론. 이를 테면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어떠한 말도 힘이 되지 않으며 현실 앞에 우스꽝스럽게 어그러지듯이. 재난문자 같이 찾아올 작별 인사를 죽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재난문자처럼 신문사 어플로 찾아온 당신의 죽음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언어로 받아들이며 알 수 없는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1년이 지나도 슬픔을 갈무리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고민하기 전까지 슬픔에 잠기고 말았다.

 

 

일 년이 지나고 다시금
기억한 네 얼굴 네 죽음
고고한 모든 글 지우고
미안하다 덧붙인 이유는
누군가 논변으로 전락한
잃어버린 진리에 슬퍼서

 


애석하게도 우리 사회는 신문 지면의 고고한 자리에 고고한 척 고상 떠는 칼럼이 실리듯 누군가의 비명은 제외된 채 고고해 보이는 담론들이 멋들어지게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게 내일을 보내고, 모레를 보내고 미래라는 거창한 것들 앞에 진리는 안중에도 없게 될 것이고 이미 그렇게 되었다. 존재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졌었던 나조차도 담그고 싶지 않을 심연이라 더욱이 회피하고 싶었다. 장례식 발언 이후에도 힘겨워하던 그는 다행히도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세계로 향하지는 않았지만. 망가져가는 자신을 멈춰 설 힘을 찾지 못한 채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에게 죽음이 가지는 역설적인 작은 힘을 말해주었더라면. 오히려 죽음에게 발견할 자그마한 진리를 말해주었더라면 당장에야 쓸모없는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면서 얻게 되는 존재의 힘을 향유했을지 모른다.


사막여우 앞에 선 어린왕자와 길들이기를 말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던 말에 덧붙여야 할 말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미(末尾)라서 보이지 않았던 그 말. “사람들은 이런 기본적인 진실을 잘 잊어버리지. 하지만 너는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돼.”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으려다 자기 자신까지 잃어버린 그가 떠오른 이유였다. 거기에 더해 말미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네가 길들인 것은 무엇이든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거야. 너는 너의 꽃을 책임져야 하는 거라고…….” 죽은 신의 사체를 놔두고 떠나버렸으나, 다시 죽은 신에게 돌아가야 하는 슬픔은 비로소 장미꽃을 깨닫고 생각하는 어린왕자의 마음과 무엇이 다를지. “나는 내 꽃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나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을 이기적인, 자폐적인 현상으로 생각했던 자세에서 반성한 사건도 스스로를 소외하고 고독에서 멀어지면서 발생하는 나르시시즘이란 깨달음 때문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다는 고백처럼 도리어 너의 눈동자에마저 고고한 척하는 내 자신만 보이는 슬픔을 사막여우는 알고 있었을까?


삶 이후에도 누군가의 논변으로 전락해버린. 철저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진리에게 미안해서 더는 고상한 말들을 덧붙일 수 없었다. 작별조차 예측하지 못하고 그 이유조차 가늠할 수 없는 그저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인간들이 누군가의 눈망울에서 자기 자신이 보이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죽음에 이유니 원인이니 달아버리는 작태를 보아하니 천오백자 늘여놓은 글들도 역겨워서 지운 것이다. 그래봤자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고고한 척하는 지면신문 종이 쪼가리로 보일 테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기본적인 진실을 잘 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서, 그건 곧잘 인용해 먹으면서. 그 다음의 말미들을 잊어버리며 자기 말의 논변으로 가져다 붙이는 그런 사람들. 이것이 진리에게 미안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