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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부끄러움의 해방적 역할

입력 : 2020. 05. 10 | 디지털판

 

ⓒMBC

 

보면대를 내리치는 강마에 모습에서 10년 전과 다른, 역설(逆說)적 부끄러움을 느꼈다. 정확한 대사는 이렇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내가 여러분들을 실력 외적인 걸로 부당하게 야단친 적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준비를 잘 못해 와서 여러분을 헤매게 만들었나요? 없지요? 도대체 뭐가 문젭니까!” 사과 받으려던 악장의 표정은 굳었고, 주인공과 다름없던 연구단원들 표정은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었다. “사과 못하겠습니다!”로 운을 띄운 강마에가 일갈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단원들을 불리하게 대하거나 불공평한 지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를 주도한 악장도 더는 할 말을 잇지 못했고 자리에 앉아 덤덤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게 여우비 내리던 어제의 낮, 펑펑 울던 두루미를 향해 “이젠 울지 마!” 한 마디 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 해도. 부끄러움이 가져다주는 역설적 해방을 이해하기엔 조금도 부족함 없던 장면이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대개 남 탓을 한다. 남 탓하지 말란 말을 생각기도 전에 남 탓 화살이 내게로 돌아올 때도 많은 게 인간이다. 잘못을 깨닫거든 가장 먼저 드는 마음은 수치심인데 강마에 앞에서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 이유도 스스로가 부족하단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자격 없는 연구단원, 이름뿐인 자기 자리 앞에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지만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은 강마에의 지휘를 받을 만한 용기로 승화(昇華)됐고 수치심을 가져다 줄 강마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누군가의 귀에선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로 들려올 수 있었다.


강마에의 그 유명한 모욕. “똥덩어리” 한 마디에 전 국민이 극중 정희연을 잊어버릴 만큼 놀라운 파동을 안겼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정희연을 잊은 채 똥덩어리 하나만 마음에 남게 되었다. 유튜브, 신문, 텔레비전 할 것 없이 단어만 다를 뿐 똥덩어리 같은 일갈만 퍼붓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자칭 저격수. 폭로할 건 왜 이리 많은지. 내 속엔 내가 많다며 보름 동안 집 안에 갇혀서 지내온 사람들 마냥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막말을 퍼붓는다. 너도 나도 강마에로 빙의해서 삿대질로 똥덩어리 수준의 비난을 나열한다. 두루미처럼 악담 뒤에 숨은 따뜻한 당신의 마음을 번역하는 그런 끈끈한 우정과 사랑을 갖췄다면 모를까, 그런 로맨스도 에로스도 없다. 제 3의 눈으로 바라본 현상은 누구든지 볼 수 있고 지적할 수 있지만. 일단 열린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난과 비판은 자기 귀엔 오페라로 들릴지 모르나, 내가 듣기엔 형편없는 소음에 불과하다. 노이즈 그 자체인 것이다.

 

 

망각된 부끄러운 감정
범람하는 “똥 덩어리”
드라마조차 가르치는
부끄러움의 순기능에
자발적인 반성日記로
비추어진 나의 풍경

 


강마에 주위엔 노래가 존재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딱딱하게 입은 양복 주위에 두루미란 멜로디와 강건우란 멜로디, 캬바레 노래 소리도, 김갑용의 중후한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며 존재한다. 그 존재하던 노래들 사이에 강마에의 분노와 격변이 예측하기 어려울 만치 튀어 오르지만 강마에 자신의 실력이란 완벽함만 있었다면, 베토벤 바이러스는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되었을 것이다.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존재하는 사람들과 어우르며 강마에는 점차 사랑을 배워가고, 우정을 느껴간다. 먹고 살기 위해 잊어야 했던 인간의 조건들을 불혹의 나이에 뒤늦게 깨닫고 만다.


그런 완벽한 존재로 보이던 강마에 뒷골목 풍경에, 슬피 울고 실망도 하고 사랑으로 꺼져가는 완벽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파르르 떠는 모습은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마(魔)의 6개월을 견뎌낸 단원들도 강마에란 캐릭터가 가진 매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뭐가 문젭니까!” 고함을 지르는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이유도 연습과 실력을 갖춘, 도무지 거짓말로 이뤄내기 힘든 오늘의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범람하는 성장 내러티브에 염증을 느낀 시청자들이, 고작 10년 전 드라마에 향수를 느끼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바울이 경험했던 비참한 마음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인간 본성을 향한 절규였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로마7,24) 율법이란 테두리가 만들어 낸 딱딱하고 어두운 역기능을 바라보니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율법의 목적인 ‘죄를 드러내는 기능’(로마7,13)은 오히려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지시적 역할을 한다는 역설을 깨닫게 했다. 무엇이든 죽음에 임박했다는 사실이 공포를 가져다주고, 막말을 하게 만들 테지만. 반드시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인류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이면 누구든 경험할 부끄러움의 죽음 앞에 날마다 죽지 않으면 안 되는(1고린15,31) 삶의 지혜를 강마에의 풍경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제는 성장조차 브이로그(Vlog)로 담아내는 시대에 쓸모없는 감정 따위로 전락한 부끄러움이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소중하고 진정한 가치를 찾아 부끄러움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견디기 어렵고 받들기 곤란한 또 다른 선생님일 부끄러움은 너의 잘못, 너의 탓이 아니라, 나의 잘못. 나의 모습, 나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반성의 길로 이끌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