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 01. 05 | 수정 : 2019. 01. 05 |
니고데모가 찾아온 시각도 밤이었다. 랍비와 쿰란공동체는 밤에 율법으로 토론했다고 한다. 우연이 아니었다. 예수의 존재가 궁금했을 것이다.
학자들도 예수가 궁금했다. 복음서로 얼룩진 예수의 속살을 찾으러 라이마루스부터 슈트라우스, 불트만, 바르트를 지나 크로산, 마커스 보그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예수 논쟁은 복음서 아닌 인간 예수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다. 우리는 때론 농담으로 신 존재를 묻곤 한다. 네가 신이거든 돌로 빵을 만들라고. 때론 진지하게 고통 중에 묻곤 한다. 당신이 신이라면 살려 달라고. 때론 죽음 앞에 현존을 묻는다.
인간의 인식에 항상 신은 전지전능하다. 시내산에서 바알을 상대로 싸우며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고, 이사야서 창조전승도 우월한 신 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약한 존재가 어떻게 신일 수 있으며 보좌에 앉았겠는가. 니고데모도 생각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므로 표징들을 일으켰다고.
능력 없이 어떻게 신으로 군림하겠는가. 인간을 정복하고 세력을 확장하고 거대한 나라를 만들어 ‘신’의 세계를 넓힐 사명이 주어졌다.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너 신을 전파했다. 먼 조선에 이르러 술과 담배 대신 성서를 손에 쥐어줬고 조선에서 야소교는 어느새 대한예수교장로회란 두 기둥으로 성장했다.
예수가 붙잡힌 그 때도 밤이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찾아와 데려갔다. 신의 아들이라던 예수는 가야바의 집에선 한없이 나약할 뿐이다. 오죽하면 젊은이가 홑이불을 버려두고 맨몸으로 달아났을까(마가 14,50). 멀찍이 뒤따른 베드로는 예수를 바라만 보았고 세 번이나 함께한 기억을 부인했다. 어머니를 모셔와 인사청탁(마태 20,21)까지 했건만 그 때의 야고보와 요한은 어디로 간 걸까.
예루살렘에 입성해 성전에서 의자를 둘러엎은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고, 그늘 진 예수의 초췌함만 그을려 나타났다. 자신이 메시아란 증언에 분노한 군중이 예수의 얼굴을 가리고 침을 뱉고 주먹으로 희롱했다. 그들이 생각한 신은, 당하던 조롱을 한 순간에 그치게 할 전지전능한 존재였으리라.
예수가 태어난 그 때도 밤이었다. 예수가 왕궁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신의 사상을 전파하고 더 많은 사람을 천국으로 이끌기 위해, 신이 자신의 아들을 왕궁에서 태어나게 했다면 어땠을까. 믿을 수 없어 당신이 조그만 구유에 태어났음을 다시금 확인하고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구유에 나심을 마다하지 않으며 천한 목자의 찬송으로 당신의 시대가 개시되었으니.
보편적 신 양식은 全能
그러나 예수는 나약해
아리송한 말 건넨 예수
니고데모, 제자에게 言
모두를 덮자 죽은 예수
교회에 예수 심장 있나
상식적으로 많은 표징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신의 능력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다. 니고데모는 당연히 그가 하느님에게서 왔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말장난을 건넨다.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다시 태어남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밤하늘과 함께 니고데모는 감춰졌다. 머지않아 십자가와 함께 예수는 이 세상을 떠났다.
철없던 제자는 예수 앞에 누가 높고 낮은지를 겨루자(누가 22,26-27) 제자의 발을 씻기며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는 아리송한 말을 건넸다(요한 13,16). 마침내 끌고 간 스승을 넋 놓고 바라본 베드로의 얼굴도, 사랑하는 제자 요한도. 빵조각을 적셔 유다에게 건넨 그 때도, 밤하늘은 유다의 얼굴을 덮었고 밤하늘이 모든 것을 덮었다. 그리고 예수는 그 날 밤을, 그 날 밤들을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20세기 너머 종말론적 예언자이자 교사 외에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슈바이처는 연구자들이 만든 자신의 옷을 예수에게 입혔다고 예수가 낯선 사람이 되어야 함을 지적했다. 성장 서사로도 인간 예수는 설명되지 못했다. 애초에 예수는 정의 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0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그가 처참하게 죽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한다.
무기력한 교인들은 죽은 예수의 시체 앞에 곱상하게 앉아 울고 만다. 일상적 성폭력과 집단 따돌림, 횡령, 배제의 정치는 예수를 리와인드해 손목을 뚫고 십자가에 매달 따름이다. 심지어 그리스도 부활을 구호로 내세워 주인을 위시한 세력 확장에 혈안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예수의 심장은 어디에 있나.
팽팽한 좌우대립으로 또 다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 동안, 밤하늘에 감춰진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체 앞에 몰약 백 리트라, 34㎏을 가지고 왔다. 몰약은 고통을 덜어주는 성분을 지닌다. 밤하늘에 자신이 덮여진 것처럼, 예수의 아픔을 덜어주고픈 것일까. 예수를 그리스도라하면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결의한 상황(요한 9,22)에, 니고데모는 무덤을 찾았다. 전 재산 같은 몰약으로 예수의 아픔을 덜어냈다. 예수의 시체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내건 것이다. 그가 부활을 알았을까.
진정한 신 죽음의 시대에 고요히 선 존재가 있었다면. 그는 니고데모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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