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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아이히만에게 말하지 않은 죄

자유의새노래 2018. 7. 11. 23:33

입력 : 2018. 07. 11 | 수정 : 2018. 07. 11 | 지면 : 2018. 12. 18 | A30

 

자폐적 세계가 무너질 뿐이다.

 

무너지지 않길 바랬지만 현실이란 홍수 속에 속수무책 당한다. 버려야 산다. 무거워 부유되지 못하면 죽는다.

 

생존을 위한 기억 투쟁이 정체성으로, 공동체로, 이데올로기로 살아남았다. 선을 추구한다는 공리성마저 상품화 돼 살아남기 위한 내러티브로 주목 받는다.

 

이제 냉전체제로도 먹히지 않는다. 진부해진 냉전을 선과 악, 새 이념으로 주목해 주위를 환기시키는데 성공했다. 사면초가 중 생존전략이다. 기억은 어느새 집단 전유물이 되었고, 신학은 자폐가 되었고, 존재는 상품이 되어 살아남기 위한 부유물로 변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기억은 일기로 몰아세웠고, 하나의 투쟁도구를 완성하려 소거와 보충으로 일관했다. 이제 거대해진 투쟁도구마저 가라앉자 마지막 발악이나 하는 듯하다.

 

누구든 틀렸다는 방법론 지적을 존재 부정으로 오해한다. 인식 오류를 존재 오류로 비약함에는 부정의 힘 때문이다. 부정도 힘이다. 존재마저 부정으로 정당함을 무너뜨릴 수 있다. 감성주의도, 교회로 상처받은 이들도 미신이란 방법론 부정에 존재가 흔들렸다. 괴명에도 죽음을 불사한 채 자신 속 악마를 규정해 평범하기 그지 없는 문제를 찾았다.

 

말 바꾸기 아니냐고 말한다. 일관성을 위해 인지부조화를 받아들인다고 죽음을 피하나. 문제를 귀담지 않고 인식조차 않은 채 현실을 적으로 만들어 인간 속 악마를 타자화하는 건 말 바꾸기보다 비열한 생존 방식이다. 이 마저도 투쟁으로 비화하며 성숙 내러티브로 해석하는 꼴이 우습다. 보이지도 않는 적을 상정해 쉐도우 복싱하는 것도 유행인가?

 

본질로 돌아가자며 어제 죽은 담론을 우상화하는 행위가 지겨워졌다. 상품화되지 않은 진부한 서사담론이 외면 받는 이유에 진정성이나 논리를 모른다 탄식하는 건 부끄럽지 않은가. 시장에 내던졌으면 상품을 발전시키던가. 아예 내던지질 말던가.

 

 

살기 위해 부유물로 전락해

무거워진 투쟁을 위한 도구

 

부정함이 평범한 문제 찾아

이데올로기 미신서 벗어나

 

현실에서 무관심 여전해도

침묵하지 않으며 천착해야

 

 

다시 자기 세계에 환원한다. 끝없이 메아리치는 가공조차 안 된 방 하나에. 자화자찬으로 시간을 끈다. 그 방이 이데올로기란 사실을 모른 채 시계도 없는 방에서 서서히 찬란했던 옛 영광으로 회귀한다. 늙어가 죽음으로 향한다는 진리를 잊은 채 나는 살아있다고, 괜찮다며 죽음을 불사한 반성을 회피한다. 자기 시계 속에 끝없이 매몰되고 만다.

 

“아니다”와 “틀렸다”는 기회다. 신앙은 배타적복음주의 앞에, 이념은 사회 앞에, 미신은 자폐적 자화상에 허물어졌다.

 

대안을 넘어 현실을 극복함에는 대안이, 대안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독하고 절망스러운 지금을 충실히 살아냄에도 공포와 불안은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현실이 고통을 가져다주어도 존재를 파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지금의 고통을, 이해 못할 아픔을, 견뎌내야 함을 현실이 말한다는 것 역시 우리는 안다.

 

그래서 존재를 물었다. ○○○는 누구인가. 사형수는 살 가치가 있나. 여성은 물체가 아니지 않냐고. 인식에 갇혔다는 현실이 건넨 조언도 드러났다. 드디어 자폐 현상에서 벗어날 틈을 찾아냈다. 비로소 타자가 보이며 자화상을 인식했다. 다시, 타자를 재인식했다. 만들어진 존재 당위를 보았다.

 

첫 걸음일 뿐이다. 이데올로기는 여전하다. 꿈에서 지금 깨어났을 따름이다. 해방을 논해도 이상적이라며 존재 죽음으로 해석하는데, 별 도리가 없다. 그야말로 또 좌절이다.

 

그래도 침묵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알지 않은가. 인간은 만들어진 허상에 머물 때 망가진다는 걸. 자폐적 세계가 무너질 뿐이라는 현실 앞에, 악은 타자가 아닌 사유하지 않음이란 자명함을 무관심 속에도 외치지 않겠나.

 

천착의 고통이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과정이란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덤볐을까. 사유를 포기했던 아이히만에게, 정언명령 오류라는 자폐적 해석을 지적했다면. 이내 찾아올 존재 존립이란 초석의 흔들리는 공포를 견뎌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