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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최진리를 기억하며,

입력 : 2019. 10. 14 | A34

 

걸그룹을 알기도 훨씬 전이었다. 지면 신문에 실린 모습을 바라보니 흐뭇했던 이유엔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를 느꼈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면 조신해야 할 것 아닌가, 아이돌이면 자중해야 할 것 아닌가, 공인이라면 적당히 할 것 아닌가.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과감히 자신을 내어 던진 모습에 저항하는 여자로 보였다. 응원해 마지않은 시점도 그 때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신학을 전공으로 두고 있음에도 후배들이 “왜 좋아하냐”고 물을 때 나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이 기사로 보였다. 기사에는 그의 감은 눈, 그의 옆구리, 그의 가벼운 옷차림이 담겨 있었다. ‘왜 논란의 아이콘이 됐나’ 질문은 보이지 않았고 여성이자 혼자로 남아 ‘세상을 등지고 맞선 자’만이 보였다. 걸그룹이었을 땐, 느껴지지 못한. 개인으로, 단독자로 남아서자 비로소 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이 논란의 손가락을 짚고 있던 그 때.

평생 알아가도 이해하지 못할 여자를 두고 세상은 마음대로 재단해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네가 그럴 자격은 있니? 네가 추해 보이지 않니? 네가 어그로 끄는 줄 몰랐니? 행간에 그를 이데올로기에 집어넣어 정의하기 바빴다. 진정성을 논하며 그가 하는 행동, 그가 내민 언어, 미소까지. 위선과 거짓으로 해석하기 여념 없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에 자격이 필요하다며 조건을 내세웠다. 운동의 중심에 두고 싶던 인간들의 욕심을 나는 보았다. 아이돌의 시간이 끝났음에도 ‘논란의 아이콘’과 ‘이런 인간’으로 정의해 소비하기 바빴다. 동어 반복된 기사 속 관객이 되어 팝콘을 던지며 작금의 어처구니없음을 폭로함으로써 추한 여성으로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컬트영화(Cult Film)로 소비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열애설이 터지고 걸그룹의 위치에서 끌어내렸다.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로 소비하는 와중에 배우의 위치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인도 마음껏 연애할 수 없는. 걸그룹이란 이유를 들이댔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굴에 익명의 가면을 쓰고 물었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되묻는다. 누구 마음대로 인간을 정의하는가. 누구 마음대로 인간을 소비하는가. 누구 마음대로 선택마저 침해하는가.

 

 

"왜 좋아하냐" 묻거든, 
지면 신문을 가리키며 
'이런 사람도 있다'고 
불의한 질문 되물으며 
"선생님" 응원했건만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나도 그런 세상을 등진 자의 곁에 서고 싶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우리 사회에 남발했기 때문이다. 나의 선택보다 결과라는 이유로 집단을 강조하고, 묻지 않은 채 집단을 따라가야 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품앗이를 해야 하고. 집단에 맞춰 살아야하는 이 세상이 우스웠다. 청년이면 무엇이든 해보라는 말미에 달린 전제조건도. 어차피 나의 인생 어떠한 책임도지지 않을 거면서. 나는 그가 올린 열네 번째 데뷔 축하 글을 보며 매몰찬 사회를 향해 빅엿을 날렸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 저 편에서 날아온 초청장을 받아들면 유일하게 지체 않고 참석해 댓글 한 마디를 남겼다. “선생님”으로 시작한 댓글은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로 끝맺었다.

 


편하니까, 별거 아닌 내 자유라고 해명했다.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도 말했다. 나는 그 자연스러움이 좋았다. 그 자유는 너에게도 강요하지 않았고, 정의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다. 세상은 떠들썩하게 위법의 자유로 걱정했지만,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를 ‘법 안에서 자유롭게’로 표현했다. 나의 자유를 강조했듯 타인의 자유도 보장할 자연스러움을 그는 자유로 규정한 것이다. 타인의 자유를 위해 지금 당장의 손가락질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자유에는 진정성을 논할 필요가 없다. 나를 상품화할 이유도 없다. 타인의 자유는 곧 나의 자유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 앞에 당당했다. 그래서 걸그룹 이후, 그의 삶을 응원했다.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는 그를 “선생님”으로 부른 이유다.

그러나 이 모든 이미지도 완벽히 타인을 이해하고 있음을 담보하지 않았다.

나의 마지막 인사 속에 “네가 살아있어 즐거워”라는 응원이 숨어 있었지만. 이 모든 인사와 응원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내가 즐거워하는 동안 슬픔과 고통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존재에게 살아있음으로 해서 고맙다고 말했던 것인지 황망했다. 내가 무엇이관대 살아있음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노래 가사처럼. “오 어떤 단어로 널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세상 말론 모자라. 가만 서 있기만 해도 예쁜 그 다리로. 내게로 걸어와 안아주는 너는너는너”

당분간은 이 황망함을 잊기 어려울 테지만.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여전히 우리 앞에선 위험 앞에 이해를 추구하며 무관심과 냉소함 속에서 사건을 잊으려 하지 않은 채, 정의롭지 않음에는 정의롭지 않다고, 사랑하는 일엔 사랑한다고 외칠 것이다. 선생님은 자유를 가르쳤지만 나는 스스로 하는 법을 터득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상점 문을 벌컥 열 때도 저 먼 곳, 하트를 누르며 응원해 마지않았듯이 끊임없이 개인으로 남은, 세상과 맞서 싸우려는 이들의 편에 설 것이다.

 

 

 

기억해 나에게 가르쳐 준 꽃말의 예쁜 사연들과
슬픈 사랑을 담고 있는 빛나는 하늘의 별
너와 나의 많은 이야기들 사랑으로 속삭였지
혼자였을 땐 모르고 있었던 소중한 걸 알게 됐어
너무도 빠르지 시간이란 좋았던 우리의 기억만큼
우리가 함께 한 추억들도 이제 바람처럼
멀리 사라져 갔지
가까이 더 누구보다 함께 있고 싶었는데
너와 나를 지켜주는 건 우리라고 늘 믿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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