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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34

[에셀라 시론]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현상 입력 : 2017. 01. 24 | 지면 : 2017. 01. 24 | A32 “미움 받을 바에야….” 명령이 떨어지고 긴 일주일간의 사투 끝에 지금까지 시간은 멈추었다. 명목상 범죄행위에 기인하는 다섯 가지의 죄악은 새로운 형태의 이별을 낳았고 “보고 싶다”, “다시 볼 수 있을 거야”라는 체념 섞인 안부 인사만이 당시의 적막한 슬픔을 위로하며 지금에까지 인사하고 있다. 선고 후 “이미 잊었다”는 말은 거짓말임이 드러났고 오늘까지 잊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자아의 악마성(惡魔性)’이요 ‘자학에 가까운 자기기만적 부정’과 ‘인간의 총체적 죄성(罪性)으로 인한 무기력’이다.    인간의 사유하지 않음이 홀로코스트로 이끌었다고 주장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그가 주장한 바가 아님에도 자기 기.. 2018. 1. 20. 21:47
[에셀라 시론]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때 입력 : 2016. 09. 20 | 지면 : 2016. 09. 20 | A28 하나님의 은혜 이용, ‘좋으면 좋다’式 주장 문제성구 인용하며 지적하지만 정작 자신의 잘못 못 봐감정적 상황 없어도 잘못 깨닫고 용서를 구해야 말은 쉽다.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하면서 단순히 ‘자유 의지(free will)를 주기 위한 창조주의 뜻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정말 ‘자유 의지’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말로 성도를 기만하는 태도는 틀렸다.    또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받아들이자면서도 막상 가해자와 피해자를 혼동하며 ‘좋으면 좋다’는 논리로 단순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천박한 은혜로 맞.. 2018. 1. 16. 21:45
[에셀라 시론] 묵언의 카타르시스(catharsis) 비공개 기사입니다. 2018. 1. 10. 13:19
[에셀라 시론] “가난한 자”를 의미하는 파롤(parole) 입력 : 2015. 12. 09 | 지면 : 2015. 12. 09 | A28 “기독교 인일 수록 더욱 믿지 않는다” 오늘날 상처받았다고 자부하는 이 사회가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기독교 인이라는 이름으로 내 건 부끄러운 모습들은 이제 숨길 수 없는 수준이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무언가를 해야한다’라는 결론으로 귀결하는 이 사회에서 정작 그 무언가를 지적하면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음이 가난한 자를 돌보겠다는 올해의 기치가 가리키는 모순과 다르지 않다. 지난 해 ‘자유의 새 노래’의 1면은 ‘가장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하는 한 해 되기를’이었다. 하지만 신문에서 밝힌 ‘가난하고 낮.. 2018. 1. 7. 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