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 09. 20 | 지면 : 2016. 09. 20 | A28
하나님의 은혜 이용, ‘좋으면 좋다’式 주장 문제
성구 인용하며 지적하지만 정작 자신의 잘못 못 봐
감정적 상황 없어도 잘못 깨닫고 용서를 구해야
말은 쉽다.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하면서 단순히 ‘자유 의지(free will)를 주기 위한 창조주의 뜻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정말 ‘자유 의지’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말로 성도를 기만하는 태도는 틀렸다.
또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받아들이자면서도 막상 가해자와 피해자를 혼동하며 ‘좋으면 좋다’는 논리로 단순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천박한 은혜로 맞바꾸려는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장이 틀리지 않았지만 그 태도와 행동은 틀렸다. 정작 자신이 피해자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면서 함부로 타인의 피해 받은 상황을 ‘하나님의 은혜’로 넘겨야 한다며 기만하는 것을 보고 반 기독교인이 된 사람도 많다.
고난주간이라 그런지 며칠 사이, 굵직한 일들이 벌어졌다. 관계가 파탄이 난 사건을 비롯해 가슴 아프고 삼일 정도 식음을 전폐한 정도의 고통스러운 일도 있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은 참 고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단한 인생을 겪으며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음을 깨달았다. 첫째 사건은 이러했다. 본인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면서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어리석음이었고 둘째 사건은 감정에 파묻히면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이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갈무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으면서 얼마나 자아가 오만하고 교만한 존재인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집단이 개인을 묵언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자아는 얼마나 개인을 증오할 수 있는 존재인지. 자아의 민낯을 보았을 때의 잔혹함. 끔찍함. 그 어떤 부정적인 용어를 사용해도 모자랄 자아의 부끄러운 모습은 마치 민낯이 아닌 나체를 드러낸 부끄러운 수준이다. 하물며 창조주 앞에서는 오죽하겠는가. 다섯 가지의 잘못이 드러나고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그래서 법은 무섭다. 흔히 누군가를 지적하는 것은 도덕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감정이 격화되고 심화하면 법적인 문제로 비화되기도 한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될 문제를 심각한 상황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흔히 성구를 인용하며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를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욕심’은 무엇인지를 보지 못한다. 인간은 그렇게 어리석은 존재다. 진리는 보편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될 것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려 투쟁하기에 인간의 삶은 더욱 고단해진다. 이러한 고단함을 마치 애국지사가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감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자신의 잘못은 무엇인가를 돌이킬 때 자아의 민낯을 볼 텐데 보고 싶지 않은 모습임에도 이를 인정해야 한다. 이는 어느 한 음악을 들으며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대형교회가 저지르는 모순이다. 감정적으로 민낯을 보게 된다고 회개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음악이 없어도, 감정적으로 눈물 흘리지 않을 상황이어도 자아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민낯, 나체를 드러내는 부끄러움을 깨닫고 피해를 받은 자에게 사과해야 한다. 용서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나체가 드러난 아담과 하와는 자아 인식을 회피하며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려버렸다. 자신의 어리석은 모습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관계가 깨어진 창조주 앞에서도 민낯을 인정하지 않았다.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자아의 정당화를 통해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 이게 문제다.
언어가 모호하고 애매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내는 건 자아의 민낯이 부끄럽기 때문일까. 언어의 장난 속에서 선과 악을 애매한 것으로 바꿔치기하여 마치 율법을 어긴 것을 죄인 것처럼 주장하는 자들을 흔히 ‘율법주의자’라고 힐난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야 말로 모호한 체제언어 속에 일상 언어를 숨기고 솔직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율법주의자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침을 뱉지만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정해야 한다! 뉘른베르크에서 일어난 여러 피고들이 서로를 고발하는 역겨운 장면을 지적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말은 시원했다. 히틀러를 비난하기보다 파벌 싸움을 해대는 회스(Rudolf Franz Ferdinand Hoess)의 모습을 그는 정확히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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