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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현상

입력 : 2017. 01. 24 | 지면 : 2017. 01. 24 | A32


“미움 받을 바에야….” 명령이 떨어지고 긴 일주일간의 사투 끝에 지금까지 시간은 멈추었다. 명목상 범죄행위에 기인하는 다섯 가지의 죄악은 새로운 형태의 이별을 낳았고 “보고 싶다”, “다시 볼 수 있을 거야”라는 체념 섞인 안부 인사만이 당시의 적막한 슬픔을 위로하며 지금에까지 인사하고 있다. 선고 후 “이미 잊었다”는 말은 거짓말임이 드러났고 오늘까지 잊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자아의 악마성(惡魔性)’이요 ‘자학에 가까운 자기기만적 부정’과 ‘인간의 총체적 죄성(罪性)으로 인한 무기력’이다.


   인간의 사유하지 않음이 홀로코스트로 이끌었다고 주장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그가 주장한 바가 아님에도 자기 기만적이고 인간 무능력의 ‘현실 굴복’의 초석을 닦았다. 과거를 사랑하는 일념이 잡념으로 번지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고민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인간의 전적 타락에 순응하는 행위는 사유해야 함을 부정하여 ‘자학’에 이르렀다.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형식적인 언어만 난무했을 뿐, 잘못에서 교훈 삼기보다 자아 구타에 연연하여 희열만 느꼈을 뿐이다.


   유대인을 향한 분노를 추적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해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주의 깊게 맞서는 것이며 현실을 견디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이에 맞설 용기가 없었다. 모든 것은 자아의 탓이요, 처벌은 달게 받겠다는 체념의 후회뿐이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행동할지 받아들일 만한 용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아를 혐오하고 자학하는 현상이 벌어져 과거를 들여다보며 그리움을 느끼고 있다.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은 많다. 교훈 삼는다는 명목으로 잘못을 희석한다거나 아픔, 그 자체를 잊지 못해 트라우마(trauma)를 낳는다면 이는 과거를 대하는 자세가 잘못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때리는 것만으로 폭력이라 정의 할 수 없다”는 자아의 악마성이 가져다 준 결론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하나의 심적인 짐으로써 이를 빌미로 자아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앞으로 벌어질 문제에 대입하며 연장선인 마냥 주장한 것은 또 하나의 악마성이었다. 시간을 멈추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이 특정한 과거를 잊지 않는 현상이었다.


잘못에서 교훈 삼기보다 자아 구타에 연연했을 뿐

특정한 과거 기억하며 ‘지금 여기’를 망각하다

‘성서 신학’, 새 지표로 과거 매듭짓고 일어나야


   여전히 과거의 특정한 추억을 회상하며 마치 그 때가 지금보다 나았다는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과거를 대하는 넓은 콘트라스트(contrast)에 특정 부분만이 전부라고 바라보는 편협함 때문이다. 추억은 아름답지만 사태는 아픔으로, 아픔을 잊기 위해 추억을 회상하는 사이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미래는 고사하더라도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지, 당장 닥쳐오는 지금의 파도는 어떻게 넘길지 과거를 잊지 않으려고 현재를, ‘지금 여기’를 망각하고 있다.


   그렇게 현실을 망각하며 현재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9개월이 지났다. 지금의 아픔도 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날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이 더 좋았는걸”하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갔다. 그 때의 존재는, 당시의 자연은, 과거의 반종세력은 현재 존재하지 않은 채 회색빛이 감도는 곳에서 자아만이 그리움의 눈물을 흘릴 뿐이다. 회색빛의 콘트라스트에 빠져 나오기 위한 첫 발걸음은 다행스럽게도 ‘자유화 선언’으로써 내딛을 수 있게 됐다.


   모든 것은 창조주의 뜻이라며 책임 전가를 창조주에게 돌리는 타락한 신정론(神正論)에서 죄를 지은 존재는 인간이며 고통의 원인은 인간의 죄 때문임으로 선으로 이끄시는 창조주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는 사유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소위, 자유에 대한 책임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며 폭력을 저지른 주체는 자아였다. 처벌 받은 것도 자아였다. 지금도 처벌을 받아야 한다며 자학할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다. 이미 책임과 처벌은 끝났음에도 책임 이상의 처벌을 주장하는 건 더 이상 책임이 아니다. 또 다른 폭력이다.


   성서 신학을 준비하려는 움직임은 첫 목표이자 사유하고자 내딛은 교육적 지표다. 해야 할 일은 많으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격변과 혼란의 시대에 비로소 지표를 확정할 수 있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마가복음 2:22)”하는 교훈과 구두끈을 다시 조여 매는 설렘. 지금은 여기에서 겪어야 할 아픔을 매듭짓고 일어날 시간이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로써 존재하지 않다. 현재에서의 과거를 들여다보며 자학할 시간이 없다. 미래에서의 현재를 위해 아픔으로 남은 잿더미의 과거는 이제 갈무리해야 할 시간이다. ‘끝없이 펼쳐진 길 위’에서 허둥지둥할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