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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가난한 자”를 의미하는 파롤(parole)

자유의새노래 2018. 1. 7. 19:15

입력 : 2015. 12. 09 | 지면 : 2015. 12. 09 | A28

 

“기독교 인일 수록 더욱 믿지 않는다” 오늘날 상처받았다고 자부하는 이 사회가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기독교 인이라는 이름으로 내 건 부끄러운 모습들은 이제 숨길 수 없는 수준이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무언가를 해야한다’라는 결론으로 귀결하는 이 사회에서 정작 그 무언가를 지적하면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음이 가난한 자를 돌보겠다는 올해의 기치가 가리키는 모순과 다르지 않다. 지난 해 ‘자유의 새 노래’의 1면은 ‘가장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하는 한 해 되기를’이었다. 하지만 신문에서 밝힌 ‘가난하고 낮은 자’의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은 모두 분명한 이미지였지만 파롤만큼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한국 교회와 자아는 ‘가난한 자와 함께 하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랑그에는 헐벗고 굶주린 소위 마태복음 5장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구체적으로 대화하다보면 자기 멋대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들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가난한 자’로 우겨대고 있는 모순을 보았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의 의미에는 습관이나 자기 모순으로써 삶이 고단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자를 포괄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에, 내 주장에 동질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범주에서 탈락시키는 모순을 보았다.

 

 

가난한 자를 정의하는 바

서로 해석이 다를 것이다

왜 복음에서 떠났는지를

자아에서 문제를 삼아야

 

 

   누구도 가난한 자를 위해 무조건적인 헌신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장 대 재앙이 벌어지면 가족부터 살리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고 성경에서 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이 인간 본성과 다르다고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 정직해야 할 이러한 상황에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한국 교회가 깊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복음을 잘 듣지 않는다고 이런 사람들을 ‘복음을 들을 자(다시 말해 가난한 자)’의 항목에서 탈락 시켜야 할까. 하지만 지금껏 생각해보면 가난한 자들을 탈락 시킴을 통하여 “저들은 복음에서 스스로 멀어진 사람이다”는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만 했을 뿐이다. 그들은 왜 떠나야 했을까, 복음에서 멀어져야만 했는가에 대한 진정한 반성은 없었다.

 

   아무리 희생과 사랑을 베풀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만일 ‘이들은 내 사랑과 희생에는 변하지 않았으므로 가난한 자가 아니구나’하는 결론을 내세운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는 자의적 해석에 따라 ‘가난한 자’를 내 멋대로 탈락시켜버리는 소위 ‘우리식 해석’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강제로 사랑하고 베풀어준다면 가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므로 이 역시도 적절한 처사는 아니다.

 

   올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정한 ‘가장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하는 해’가 기도 제목이었다. 분명 시커멓게 쓰인 1면 기사에서도 ‘사회가 버렸다고 한 자’라는 구절이 있다. 그 구절을 보면서 어리석고도 무능한 인간의 자화상을 보았다. 이 때문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어느 누구든 자신이 만들어 낸, 자기 영광을 취하려고 가난한 자에게 봉사하고 싶어한다. 자기가 편하기 위해, ‘나는 이 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괴물과 같은 율법주의를 끌어 안고 있다. 이러한 율법주의가 사회 이상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자기의 영광을 취하고 자기의 의에 빠져 자위 행위를 하고 있는 모순을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하려면 이러한 이중적인 잣대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장 가난한 자들과 함께함에도 정작 자신의 주장과 다른 자들을 ‘배불렀다’라고 말하는 좌익들의 모순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인정이 자발적이면서도 자신에게 보여져 자아의 모순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죄인의 민낯을 보아야 한다. 아무리 노력하고 고생해도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한 인간임을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열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직한 열망은 경건함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며 사회가 변하지 않더라도 진정 가난한 자들을 위한 눈물이 되어 이 사회를 환하게 비추게 될 것이다. 우선 빛이 되려하기 보다 소금으로 감당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