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now]110 [단편소설] 문소혜에 관하여 “소원 하나만. 해달라는 거 다해줄 게.” 누가 봐도 혹 했을 거다. 동그래진 눈동자. 달아오른 얼굴.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빤히 쳐다보는 얼굴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마주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척 어색했다. 가슴에서 허벅지, 허벅지에서 벽시계로. 시선 처리가 다급해졌다. 도대체 뭐길래 해달라는 걸 다 해준다는 걸까. 넌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 그렇지만 난 그 한마디에 밤잠까지 설쳐야 했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도 같고. 어제였다. 내 마음을 들었다 놓은 같은 반 문소혜 말이다.“재수 없어.” 집에 돌아가려던 저녁 어느 날이었다. 문 꽝 닫고 들어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내 앞자리 문소혜였다. 째려보는 내 눈빛에 무안했는지 교실을 한번 훑는 것이었다. 나밖에 없다는 걸 확인했는.. 2024. 12. 31. 18:40 [팔짱만 껴도 좋은걸] 너와의 300일… 고마워, 사랑해 끝없이 이어진 걱정과 불안 그럼에도 “팔짱만 껴도 좋아” 여자친구가 아니었더라면…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푹푹 찌는 여름이었어도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을지로에 있는 커피한약방에 다다랐다. 급하게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했다. 쏟아지는 빗방울을 겨우내 피하고 당근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었다.그래도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이번엔 꽤 좋은 직장을 구했다. 하지만 언제나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이직에 성공하면, 사라질 걱정쯤으로 생각했지만 달랐다.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에 대한 걱정, 1년 후에도, 2년 후에도 나는 이 자리에 여전히 굳건히 서 있을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는 장거리 커플이다. 일을 하는 중에는 주말에만 만날 수 있다. 예상하지 않은 고용 한파에 나는 오랜 시간 백수 생활.. 2024. 12. 30. 22:45 [마감하면서] 소담한 저녁의 부활 회사를 다녀오고 도착한 집은 언제나 어둠뿐이었습니다. 짙푸르고도 고요합니다. 주말이 되면 소리 없는 풍경에 어디든지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문정동 시절 저의 삶은 어둠 속 별을 바라는 소담한 꿈을 품게 했습니다. 이번 겨울, 여자친구를 만났습니다. 회사를 관두었습니다. 전례 없는 이직 한파에 저는 오래도록 쉬었습니다. 혼자 쉴 때와는 달랐습니다. 늦게 일어날 일도 없었고 배를 굶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규칙적인 삶을 살면서 에세이를 써 내려갔고 이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지친 몸, 더욱 축 늘어져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매일 밤이 두려웠을 겁니다. 매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막연한 공포감이 압도했을 겁니다.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저는 스타벅스에서 짧든 길.. 2024. 12. 30. 19:14 [인류의 마음 박물관①] 라디오에서 들려온 ‘세상:소음’, 어른이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인걸 “밥은 챙겨 먹을 수 있겠어?”“나 열여덟이야. 어른 면허증 취득해야지.”정부는 ‘어른 면허증’을 도입했다. 사람마다 어른이 되는 속도는 다른데 모두 20살에 어른의 책임감을 갖는 건 불합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를 기점으로 사춘기 소녀가 어른이 되는 경우도 생겼고, 반대로 50살이 넘어서도 아이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권력자들의 상당수는 아이가 되었다. 이제 이들은 권력은커녕 어른 면허증을 따기 급급한 처지가 되었다. 면허증의 요건이 수록된 어른 사전이 나오기에 이르렀으니 말 다 한 셈이다.나는 여름비를 배경 삼아 어른 사전의 책장을 넘겼다. “어른에게 필수적인 자질은…. 하암.” 하루 종일 사전만 괴고 있자니 눈이 절로 감겨왔다. 수면제가 아주 따로 .. 2024. 11. 20. 19:00 [편의점은 요지경①] 어색한 낯, 언짢은 투, 살가운 척… 완전 꼰대 같은 교대 근무자 “‘또 오세요’는 무슨!” 께름칙한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 겉모습은 겉모습일 뿐, 지레 짐작했던 내가 바보였다 “’또 오세요’는 또 오란 소리 같잖아. ‘좋은 하루 되세요.’ 정돈돼야지.” 기분이 팍 상했다. 또 오란 말이나 좋은 하루 되란 말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첫 만남부터 어긋난 것 같았다. 다른 시간대 근무자 말이다. 나의 근무 시간은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다. 사장님이자 점장님은 연습 겸 오후에 나오라고 하셨다. 첫 만남은 순조로웠다. 가벼운 캡 모자를 쓴 중년 아저씨였다. 인상이 좋았다. 아르바이트생이 될 나에게 음료수 한 잔을 건넨 후덕한 인품이 마냥 좋았다. 그 할아버지(진) 근무자가 마음에 걸렸지만 말이다. 사장님은 너그러웠다. 포스기를 다루는 방법부터 냉장 진열대에서 매대 각 분.. 2024. 11. 2. 07:00 [주마등] 너에게만큼은 찐따로 보이지 않길 바랬는데 “진성아, 나 좋아하지 말아줘.”이게 무슨 말이지. 싶어 쭉 읽어 내려간 글은 320자 분량. 꺼림칙한 기분으로 속독했다. 대충 내용은 이랬다. “네가쓰는ㅋㅋㅋㅋㅎㅎㅎㅎ과도한자음들말야날남들보다좋아하는느낌이란생각이들어나는너한테관심없고좋아하는것도아니야난너와친하다고생각했지좋아하는그런사이로생각해본적없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 호감. 호감 정돈 가진 건 맞다. 하지만 좋아했다는 건 억울한 오해다. 고백한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디펜스하는 게 어딨나. 불쾌한 답장에 기분이 꽁했다.의자에 기대에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그 애랑 둘이서 채플에 빠지던 날이 떠올랐다.교통사고는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치기에 교통사고겠지우리 학교는 매주 화요일, 목요일 점심이면 채플에 참석해야 한다. 채플은 기독교.. 2024. 10. 22. 16:00 상품으로 포장한 가구의 편리함… 그곳에 여성은 없었다:「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展」 파격적이었다. 전시를 보고 나서도 여성에 대한 오명(汚名)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성성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굳게 믿어 왔다. 한 뼘도 진일보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들었다.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5, 6 전시실에서 내년 3월 3일까지 열린다. 신체성의 관점에서 1960년대 이후 아시아 여성 미술의 동시대적 의미를 새롭게 살피고자 아시아 11개 나라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 130여 점을 모았다. 근대성에 의문을 제기했던 작품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시를 통해 ‘내 밖의 존재와의 접속을 이끄는 예술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고 한다. 관람료는 5000원. 가사노.. 2024. 10. 12. 07:30 [지금,여기] 신나게 노느라 배고프지? 수일통닭으로 놀러와~^^ 말복에 찾아간 광주 양동시장푸짐한 상 넉넉한 인심에 흠뻑 광주에서 쉬는 동안 반년 간 네 번을 찾아갔다. 두 달에 한 번은 꼭 찾게 되는 양동시장에 있는 수일통닭.2만4000원이면 닭 한 마리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하필 말복(末伏)에 찾아가선지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이 나왔다. 이렇게 장사하다간 남는 게 있을지 싶을 지경이다. 늘 찾아가도 집에 갈 때면 배가 불러 남은 치킨은 포장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다. 양념이 듬뿍 묻은 치킨 한 조각에 제로콜라 한 잔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포장도 가능하지만 가서 먹는 것을 권한다. 포장 줄이 꽤 길기 때문이다. 말복이라 평소보다 줄지은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더운 날 포장해 먹는다고?’ 줄 선 사람들 사이로 가게에 들어갈 때의 짜릿함이란. 집까지.. 2024. 8. 24. 07:02 [지금,여기] 입안 가득 ‘사르르’ 상하농원에서 아이스크림 만들기 “도-전 !” 커다란 볼에는 소금이 담겨 있었다. 얼음을 붓고 살짝 으깨어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웅덩이에다 휘핑크림과 우유가 담긴 작은 볼을 장착해 왼쪽으로 열 번, 오른쪽으로 열 번 빠르게 돌리기 시작했다. 우유가 담긴 볼에 작은 막이 형성 되었다. 플라스틱 주걱으로 떼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곧 아이스크림이 되었다.상하농원 체험교실 A반에서 ‘과일공방잼 아이스크림 만들기’를 체험했다. 15일 오후 1시 30분, 시간에 맞추어 입실하자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이미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선생님의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험시간은 총 40분이었다. 친절한 설명 덕분에 체험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가격은 2인용 1좌석 3만5000원.블루베리, 초코시럽, 과자 등을 완성한 아이스크림에 뿌렸다. 여자친구와 한.. 2024. 8. 24. 07:01 [지금,여기] 상하농원에 가면 🐷아기 돼지도 있고 🐑양 친구도 있고 입구에서 바라본 농원의 풍경은 아늑했다. 무척 더운 여름이라 그런지 매미 우는소리만 가득했다. 광복절 연휴 상하농원에는 가족 방문객만 눈에 띄었다. 사람들로 붐빌 줄 알았지만 꽤 적막했다. 무척 신이 났다. 하루 반나절을 이곳에서 뒹굴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당장 눈앞 텃밭정원에는 땅콩 잎이 파릇하게 웃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상하키친과 햄공방이 서 있었다. 검은색 벽돌과 빨간색 벽돌이 촌스럽지 않았다. 나무들 사이에 숨은 공방 건물들은 땡볕에 서서 사진 찍게 만들 만큼 멋들어졌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점심이었다. 배가 고팠다. 상하키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주 운암동에서 두 시간… 말없이 뚜벅뚜벅 ‘고불길 탐방’원래 계획은 오전 중에 여자친구와 이곳 상하농원에 도착하는 일이었다. 하필 시내버스에서.. 2024. 8. 24. 07:00 이전 1 2 3 4 5 ···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