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이었다. 전시를 보고 나서도 여성에 대한 오명(汚名)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성성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굳게 믿어 왔다. 한 뼘도 진일보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들었다.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5, 6 전시실에서 내년 3월 3일까지 열린다. 신체성의 관점에서 1960년대 이후 아시아 여성 미술의 동시대적 의미를 새롭게 살피고자 아시아 11개 나라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 130여 점을 모았다. 근대성에 의문을 제기했던 작품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시를 통해 ‘내 밖의 존재와의 접속을 이끄는 예술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고 한다. 관람료는 5000원.
가사노동, 통조림 같은 인생
세 작품은 메시지가 직관적이었다. 가사 노동에 대한 비평을 선보인 윤석남의 「엄마의 식사 준비」는 음울한 부엌의 분위기에서 손가락에 불이 나는 어머니의 쓰라림을 표현했다. 김혜순의 시(詩) 첫 줄에서부터 숨이 막혔다.
‘아버지의 폭탄이 터진 뒤라고 한다’
미국을 동경한 그 끝이 여성의 상품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류준화 「붉은색 살코기」 「아메리카의 열망」은 여성의 삶 단면을 한눈에 보여준 작품이다. 통조림과 여성의 얼굴 일부분을 나열한 작품에서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과 여성의 어떤 삶이 오버랩 되었다.
그저 누군가의 시선에서 여성은 밥하고 빨래하는 존재, 예쁘고 폭시(Foxy)한 이미지로만 비칠지 모르겠다. 씁쓸했다.
여성에게도 가혹한 사회
IMF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이었다. 1995년 MBC는 ‘여대생 취업률 조사 결과 평균 8% 미만’ 기사에서 “1991년부터 올해(1995년) 상반기까지 40대 주요 그룹 전체 신입사원 가운데 여대생이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8.1%”였다고 지적했다. 조금씩 오르던 취업률도 1993년부터 하락세를 보였다.
김인순의 「여대생 취업 구걸」 그 시절 여성차별적인 기업의 행태를 직관적으로 까발린다. 당시 과장급 이상 간부 사원 중 여성의 비율이 1%였고 이사 이상의 임원은 40대 그룹을 통틀어 6명뿐이었다고 하니. ‘현대’ ‘대림’ ‘롯데’ ‘동부’ ‘건영’ ‘대우’라 쓰인 임원은 한 자릿수에 불과한 수치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여대생을 조롱하는 듯하다. 마치 “이 정도면 대단한 성차별 철폐 아니냐”면서 말이다.
하단의 지면신문은 찾지 못했다.
편리하게 바뀌는 줄 알았는데
전시는 지하 깊은 곳에서도 진행됐다. 어두 컴컴한 방에 이르자 조이스 호의 「베라x일기」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상에서는 모델로 보이는 여성이 집안 곳곳 가구에 온몸을 구겨 넣고 있었다. 오래도록 불편한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불편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가구의 기능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여성은 편리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정주부, 현숙한 아내, 워킹맘으로 진화해 간다. 여성이 두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가구는 오직 남자와 여자가 한 이불을 덮을 수 있는 침대뿐이다.
모델이 불편을 무릅쓰고 가구 이곳저곳을 들어갔다가 나가는 퍼포먼스를 보인 데에는 이를 풍자하기 위함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보지’를 보지라 부르지 못하고
버자이너(vagina)라는 단어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성의 질을 말한다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의 성기.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보지’는 ‘음부를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남성은 ‘음경’이라고 부르지만 여성의 성기는 달리 부를 단어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나마 부를 수 있는 단어가 ‘버자이너’라니.
정재승 교수는 2019년 한겨레신문에서 여성의 생식기를 터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과학적인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연구도 부진한데 현실 세계는 얼마나 더 가혹 하던가. 딥페이크 사태는 국가적 재난이다. 한국 여성은 싫지만 몸은 좋아하는 모순된 태도로는 도무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접근하기 어렵다. 그래서 쿠보타 시게코 「비디오 시(詩)」는 서글펐다.
비디오는 버자이너의 복수
비디오는 버자이너의 승리
비디오는 박식한 자들의 성병
비디오는 비어있는 집
비디오는 벗어난 예술
비디오여 번영하라…
쿠보타 시게코「비디오 시」벽에 쓰인 시
안무·퍼포먼스·영상… 과감한 작품으로 현실 세계 드러내는 작가들
20분이 넘는 영상이었다. 사사모토 아키 「점 대칭」은 특유의 영상미가 더한 작품이었다. 달팽이 껍질의 정갈한 빛깔, 새 하얀 스펀지, 플라스틱 컵 뚜껑 등이 테이블 위로 지나간다. 구멍이 뚫린 아크릴 테이블은 우리가 사는 세계로 보였다. 가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투명 아크릴 테이블을 축으로 삶의 변화와 단계, 예측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탐구합니다.”
화면 속 물체는 마구 충돌하며 튕겨 나간다. 화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 오는 과정을 반복하며 작가는 나선(螺線)을 그린다. 그동안 성장 서사라는 이름으로 사용한 단어 나선이 달리 보였다. 나선을 그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작가의 모습이 마치 힘겹게 바깥으로 그려나가는 우리네 인생으로 비쳤다. 나선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까. 여성이라는 만들어진 캐릭터로 살아야 했을까.
“테이블을 축으로 반사되는 이들의 독특한 회전과 우연한 충돌은 복잡한 도시 속에 살아가는 개체들과 개인들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누구나 각기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는 외형을 달팽이 껍질로, 만들어지고 상품화 된 존재가 스펀지로 은유 되어 현대의 문제를 드러내는 듯했다. 이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면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세계에 개입했고, 춤을 춘다.
만들어진 캐릭터와 서사 속으로 개입하는 작가의 안무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전시 초반에 보았던 이데미츠 마코 「가정주부의 어느 날」도 인상적이었다. 1977년도 작품인데 부엌에서 요리를 하거나 전화 통화를 받는 내내 깨어서 잠들 때까지 텔레비전의 눈이 항시 주부를 바라보고 있는 영상이다.
감시 사회가 일상이던 근대의 특징을 드러내는 작품 같았다. 마치 감시하는 눈처럼 바라보는 장면이 아날로그 감성과 덧붙여 소름이 돋았다. 정확히 감시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편일지, 주부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사회일지, 아니면 자기 자신일지.
오노 요코 「컷 피스」는 과감했다. 9분 10초,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자르는 행위로 구성된 영상이었다. 실제로는 퍼포먼스로 초연(招演)했다고 한다. 속물적 여성미를 바라는 대중의 압박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옷감을 나눠주는 작가의 무궁한 헌신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옷감을 자르면 자를수록 모델의 아름다움이 드러나야 하는데, 비참함만 남는 건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작품과 작가에 대해 궁금하게 만들었다. 다양한 자료가 오노 요코 뿐만 아니라 그의 정황을 알게 해주었다. 전시장에는 무척 많은 여성이 관람하고 있었다. 전투복을 입은 남성도 있었고 우리처럼 연인으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우리 앞에 당도한 문제를 다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식의 연결은 삶의 지혜로 이어지리라고 믿으며.
전시장에는 무척 많은 여성이 관람하고 있었다. 전투복을 입은 남성도 있었고 우리처럼 연인으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우리 앞에 당도한 문제에 다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성의 몸을 있는 그대로, 주체적인 각자의 몸으로, 연결된 존재로 받아들이고 만나고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맛보기였을 뿐이다. 아쉽다.
전시는 방대했다. 두 시간도 모자랐다. 여러분은 조금 더 일찍, 오래 머물다 가시기를. 느끼지 못했던 씁쓸한 감정을 오롯이 느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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