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 - Page 9

[지금,여기] 뜨듯한 온천과 시원한 맥주 “캬, 이 맛이지” 끝없는 ‘오사카의 밤’ 「2박3일, 오사카여행③」

우드톤 단색의 고즈넉한 도시가 교토였다면, 오사카는 그저 화려하고 젊은 분위기의 도시였다. 우리는 나가호리바시를 기반으로 오사카의 도톤보리와 난바, 우메다, 나가자키초를 돌아다녔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큐카츠 토미타(牛かつ 冨田)다. 각자 구워 먹을 수 있는 큐카츠 전문점이다. 다행히 우리는 기다림 없이 바로 입장해서 저녁을 즐길 수 있었다. 와,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맛. 달달하고 고소하며 담백한 맛. 입 안에서 녹는 육즙이 끝내줬다. 현금만 받는 가게라 카드로 결제하지 못했다. 곧이어 낮에 예매해 둔 리버 크루즈를 타고 우리는 도톤보리 강을 누볐다. 베테랑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주변 관광객들이 선사하는 손인사에, 우리도 손을 흔들었다. 가까운 타지에서 느끼는 이색 풍경에 하나가 되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낮에는 여자친구를 따라 우메다 근처에서 쇼핑을 즐기기도 했다. 우리는 아식스 오사카 스토어에 방문했다. 스티브 잡스 같은 분위기의 직원이 우리를 맞았다. 여자친구가 둘러보는 동안, 나는 작은 소파에 앉아 쉬었다. 다소간의 긴 시간을 머무르는 바람에 여자친구와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며 나왔다. “失礼しました。(실례했습니다.)” 곧장, 직원이 90도로 숙이며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중한 인사에 깜짝 놀랐다. 작고 진심 어린 순간에서 문화적 감동이 남은 것이다. ❼오사카 아식스·마크 커피 ‘90도 인사’ 진심 어린 문화적 감동 카라멜마끼아또, 바리스타의 손맛

[15일의 기록] ①두 달의 서버 마비가 끝나고, 퍼피레드에 복귀하다

2020년 02월 15일
“ 퍼피레드 운영진이 복귀하자 이곳의시차도 시스템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망한다 망한다 하더니 진짜로 망할 줄 꿈에도 몰랐다. 2012년 무렵부터 적적해진 분위기에 망했다고 느꼈건만 서버 종료라는 마지막에 도달할 줄은 전혀 상상조차 못했다. 무언가 망하는 광경을 목격한 적 없어서 신기했다. 2016년은 세 차례를 제외하고 닫힌 서버 탓에 더는 그 세계에 접속하지 못했다. 2016년 8월 5일도 그랬다. ‘이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가 뜨겠거니 생각하고 접속한 퍼피레드의 마지막 풍경은 어딘가 낯설었다. 퍼피레드는 2015년 12월 6일 게시글을 끝으로 공지사항조차 업로드하지 않았다. ‘한게임퍼피레드 환불 일정 공지’가 박제된 상태로 몇 년간 유지됐다. 오죽하면 공지사항 네 개 글이 텍스트 상자처럼 눈과 몸에 각인됐으니. 일종의 믿음일까? 퍼피레드만큼은 ‘이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언제든 문 열어 당신들의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을까하고. 게임 업데이트는 고사하고 회사의 사정까지 상세히 밝히지 못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운영진은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마지막 약속을 건넸다. ‘퍼피레드 서비스 종료 안내’ 어느새 돌아온 2시간 반 서버 시차는 원상 복귀 됐고 몸이 기억하는 공지사항 사각형 상자에 짤막한 새 글을 느끼자 올 것이 왔다고 느꼈다. 더는 업로드 없었던 첫 글 ‘퍼피레드 서비스 종료 안내’가 가슴 철렁했고 신속하게 마지막을 준비하게 만들었다. 이럴 줄 알고 몇 해 전부터 텍스트 자료로 백업해 왔건만. 이제 정말 남은 시간은 보름 남짓. 황망할 틈도 없었다. 우리 모두 퍼피레드 마지막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아담하던 서재가 사라진다, 퍼피레드가 사라진다밤 10시가 훌쩍 넘어 미니파크는 고요했다. 두 달 전 꺼둔 조명 하나 둘 켜자 노랑 빨강 얼룩진 거대한 예배당 자태가 하얗게 드러났다. 이곳은 군 입대하던 새벽까지도 함께해준 나의 공간이다. 버뮤다 순복음교회, 대형예배당 한 구석 아래아 한글과 함께 집필 활동을 이어간 거대 서재인 셈이다. 당장 ‘파티&파티’를 열어 나처럼 충격과 당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예배 때 빼고 파티를 연지도 5년만이다. 사람들은 웬일로 하나 둘, 우리 교회로 접속했다. 그리고선 한결같이 황망함을 토로했다. 믿을 수 없다고. 나도 그랬다. 감출 수 없는 예언된 이별의 준비를 준비하러 아래아 한글을 열었다. 퍼피레드 서버 종료, 현실로 다가오다 그 동안 문 닫을 것이라는 예측과

[교회는 요지경] ‘청춘 반환 소송’ 한국 개신교회도, 내 시간 돌려내!

2020년 01월 17일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 풍경은 진지해서 웃겼다. 명찰 따위 부착하고 다신 보지 않을 듯한 단호한 발걸음은 싱글벙글 미소 짓던 표정과 제법 어울렸다. ‘열광적인 찬송 소리’ 멘트가 들려오자 두 손들고 열창하던 교인들의 흰 소복이 교회 밖에 설치된 대형 TV에서 기괴한 풍경으로 연출됐다. 이들은 자정이 지나 “야 이 씨XX아!” 강대상 뒤엎는 광경을 상상이나 했을까? 열광적 기도 속에 겨우 잠입한 KBS 카메라엔 김이 서렸고 흡사 흰돌산 기도원 같았다. 곧 휴거(携擧)가 불발 됐고 희대의 종교 사기극은 그 날로 끝인 듯했다. 신천지도 그랬다. 교회 방송실에서 근무하던 2008년. 그 때만 교인 수 4만 명, 10년이 지나 20만 명까지 불어난 엄연한 종교단체였다. 이젠 10만 명이 모여 수료식을 치른다고 하니 교회 밖 사람들은 신천지의 존재를 물었다. 한국 개신교회는 신천지의 존재에 까무러쳤다. 교회 출입구에 떡 하니 붙은 ‘신천지 OUT’은 부적처럼 견제해 대니. ‘청춘 반환 소송’에서 신천지 변호인 측은 이렇게 변론했다. “신천지란 사실을 나중에 밝힌 뒤에는 그만둘 자유의지가 원고에게 있었다.” 나도 교회를 다닐 땐 이런 교회였다는 사실을 알고서 다니지 않았다. 자유의지도 자라기 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자발적으로 10년이란 세월을 교회에서 지냈으니 더욱이. 신천지처럼 모략전도도 아니었고 다미선교회처럼 시한부 종말론도 없었지만 ‘천국과 지옥’ ‘앞자리에서 예배 드려야 은혜 받는다’ ‘영적인 세계’ ‘타락해가는 세상’ ‘주님 오실 날이 머지않았다’식의 메시지는 충분히 교회에 붙들어 놓을 장치가 되어 주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예배당 왼편에 마련한 컴퓨터 앞에 처음 앉는 순간 교인석에 앉았을 때완 차원이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70평 상가에서 건평 300 건물로 이사하고 방송실도 꾸려졌다. 그렇게 8년. 방송실은 교인들 뒷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처음 보는 뒤통수가 보일 때면 그런가 보다 싶지만. 익숙하던 뒤통수가 보이지 않으면 궁금증이 샘솟는다. 소문에 소문을 거쳐 방송실에까지 들려올 때면 이내 해소된다. 조용히 일하던 방송실까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도 교회는 자발적 착취를 이용해 교회라는 구조를 연명한다. 이 에세이가 편파적이라고? 교인석이라곤 다를 줄 아는가? 방송실 위치는 후미진 곳 구석이라 온갖 편파적 정보들이 난무한다. 사람은 자리가 만든다고 한다. 편파적 궁금증은 방송실에 앉았을 때부터 언제나 존재했다. 학창시절 교회에 날려 먹은 시절이 아까워 꿍쳐둔 원고를 끼적이려다 싣지 못했다. 근데 결정적 소문이 들려왔다. ‘청춘반환소송’ 장난감처럼 요지경 같던 교회에서의 풍경이 보이노라 말하겠노라. 교회는 실명 대신 적당히 ‘참여교회’라 부르겠다. 교회 사무실, 예배당, 식당, 유아실.

[시대여행] 다방 의자, 형광등 아래 “전도사? 할 만해”④

2020년 01월 08일
시대여행 <4> 의인 이후를 물으며 기도원으로 향한 2人 오래된 기도원 구석, 색 바랜 예배시간표 “사역할만하다”기에 생각해본 ‘삶의 자리’ 기도원으로 향하던 길목에 대풍이를 생각하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의로워지는데 그럼에도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겠네?” 끊임없이 회개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알다시피 인간을 죄인으로 보지 않는 입장에선 무의미한 질문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던가. 한 때 죄책감을 안고 살아도 봤고, 죄에 경도되어 강박증도 앓았지만 끝내 신앙의 건너편에 서자 비로소 인간이란 존재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인간은 원래 인간이다.’ 기도원은 산중에 서 있었다. 시내버스를 타고도 자동차로 6분을 더 달려야 도착한다. 가을임에도 산이라 오들오들 떨렸다. “저녁 먹으러 가자.” 토요일 저녁 몇몇 교인 분들이 식사를 마치려던 순간 들어온 모양이다. 대풍이 어머니께서 “아, 그 말 잘한다던 형제님이시구나! 부흥사하면 좋겠어요. 호호” “아이고~ 학교는? 졸업하고?” “아, 네…. 잠시 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윤대풍 이 녀석…. 도대체 날 어떻게 소개했길래! 어머님과 기도원 식구들, 대풍이를 담당하던 담임목사. 이렇게 예닐곱 구성원과 따로 식사했다. 자리에 앉자 식사에만 집중했다. 담임목사를 보니 향후에 대풍이가 어떻게 살아갈지 훤히 보였다. 대풍이는 목회학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한 장로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는 중이다. 교회 일이 꽤 힘들었는지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부터 들어왔다. 무슨 일로 그만두고 싶다는 건지, 소상히 들을 필요를 느꼈다. 도착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외관은 모르겠지만 내부는 꽤 오래된 건물인 듯 했다. 다방에서나 볼 듯한 소파에 올려진 ‘예배시간표’는 얼마나 모일까 묻게 했다. 벽지 사이 갈라진 콘크리트 벽면은 냉기가 머물다 사라졌다. 소변기에 물이나 떨어질지 걱정될 만큼 추웠지만 다행히도 동파는 아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자 화들짝 놀랐다. 엄지 크기 거미가 지네처럼 왔다 갔다 했다. 거미를 죽이고 매트 아래 바닥에서 대화를 나눴다. 기도원 원장님께서 흔쾌히 허락한 방에서. “전도사 생활 할 만해?” “응. 힘든 때도 있긴 한데 그래도 할 만해.” 힘든 때를 물었다. 전도사도 교회 일이니 인간적이고 편하지 않을까 싶을 테지만. 환상에 불과하다. 최저임금 위반에 퇴근조차 눈치주고 성탄절 공연이란 미명아래 쓸모없는 자발적 착취에 작정기도라는 이름으로 결속하기 바쁘다. 그 사이 안식년조차 없는 전도사들은 바쁘게 구둣발만 흔든다. 큰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큰 교회에서 일할 수 있으니 감사하라는 자부심은 어디에 근거한 걸까. 장로가 닦달한 건 아닌지, 말도 안 되는 업무량에 치여 사는 건지 물었지만 둘 다 아니었다. 다행이다. “성도님들이 전도사님이라 부르는데 몸 둘 바를 모르겠어. 주일마다 넥타이를 매고 가는데 성도님들이 ‘전도사님’ ‘전도사님’ 그러는데 나보다 대단하신 분들이 나한테 전도사님이라 부르는 게 편하지 않아.” 문제는 또 있었다. “교회에서 방언도 크게 못하고 찬양도 잘 못 불러서 그게 아쉬워.” 한국교회를 살리고 성장시킨 원동력은 주여 삼창이다. 순복음중앙교회라는 커다란 돔에 1만 명이 모여 새벽 4시까지 철야예배 했으니. 예배당에 모인 수많은 기도소리를 빌 하이벨스가 ‘많은 물소리’로 들을 만도 했다. 드럼과 기타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대 속에서 여의도를 시작으로 복음성가 열풍이 불었다. 장로교회서만 손뼉 치며 찬송 부르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 오순절 예배 시스템이 대중적 예배 방식이 되고 말았다. 오순절 예배는 열정적이다. 드럼과 기타, 피아노 덕분에 한층 감정이 고조된 나머지 경건과 엄숙이란 분위기는 사라진다. 대풍이와 나도 그런 순복음의 영향을 받았다. 순복음 아닌 교회가 교회 아니겠냐마는. 전도사로 사역하던 교회는 장로교회다. 자유의새노래에 자주 게시 중단을 요청하는 그 교회 부목사가 개척한 교회라 분위기는 오순절과 거리를 두는 듯했다. 캐주얼 복장을 즐겨 입는 대풍이가 정장까지 입을 생각하니 갑갑해 보였다. 그리스도교란 서양의 옷이 어색했던 전후(前後) 문학가 엔도 슈사쿠처럼. 올해를 끝으로 전도사 직을 사임하겠다고 계획까지 말하는 모습에서 그 다음을 물었다.

[시대여행] 잔잔한 세 남자의 인생에 스며든 노래방 속 작은 심령대부흥성회③

2020년 01월 08일
시대여행 <3> 노래방 선택에 실패한 세 남자 그럼에도 기어이 찾아낸 성가 다 함께 완창한 추억의 그 곡 제목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궁금하지 않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해야겠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로 경건의 포문을 열고서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찬송가를

[지금, 여기] 2019년 마지막 여명 이후 「LP와 함께」에 머문 발걸음

2019년 12월 31일
2010년대와 2019년의 마지막 해를 보내자 이내 추워졌다. 정처 없이 떠돌다 카페를 찾아 헤맸다. 그 전날 지도에서 탐색했건만 프랜차이즈 카페까지는 꽤 걸어가야 했다. 아무 데나 가겠다고 게으름 피워댄 탓에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2-30분 더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근처 다방의 따뜻한 커피라도 상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건물 이곳저곳 눈팅하다 2층에 쓰인 반가운 문구와 마주쳤다. “안에 계신가요?” 비좁은 계단엔 책들로 쌓였고 조명도 켜두지 않아 어둑했다. 2층 희미하게 번지던 조명에 의지해 걸어 올라가자 카페 유리문이 보였다. 사장님을 부르니 한동안 잠잠하던 좌측 가정집으로 보이는 통로에서 나오자 인사를 건넸다. 주황빛 감도는 카페에 자연스런 노란 옷을 보고서 사장이라 생각했다. 사장님이 손가락을 더듬자 주황빛 조명이 강해졌다. 아직 영업 종료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저녁 어간이라 커피는 마실 수 없어 3,500원 초코라떼를 주문했다. 하나만 주문하기 껄끄러워 디저트도 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재료 소진인 상황에 배꼽이 배보다 커질 상황이라 단념했다. 추억 돋는다 돋아, LP와 함께한 풍경 외투를 벗자 조금씩 영안 밝아지듯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계산대 옆 규칙 잃은 책들은 헌책방 느낌을 주었고 벽면 가득 채운 LP(Long Playing Record)가 카페 이름을 상기시켰다. 구석 화초들은 조명을 견제하듯 주황빛을 보정했고 가운데 흔들의자는 천과 쿠션으로 옷 입고서 앙증맞게 위치해 있었다. 푹신한 의자보다 단 위의 딱딱한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팔짱 낀 채 추위를 녹였다. LP로 도배된 맞은편 벽면엔 컬러 풍 ‘별들의 故鄕’ 흑백 풍 ‘에펠탑’ ‘빅벤’이 크고 작게 붙었다. 풍금(風琴)으로 보이는 악기 위 프레디 머큐리와 아무리 봐도 익숙하지 않을 4인조 가수 옆으로 옛 교과서와 다이얼 전화기가 놓였다. 팔짱 낀 채 중앙에서 카페를 둘러보니 사장님이 물었다. “저건 몇 년도로 보이세요?” “1960년대 같은데요?” 아니었다. 집에서 검색해보니 ‘별들의 고향’은 1974년 작이다. 구체적 년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벽면 에펠탑과 빅벤, 해금 위 머큐리만 알면 됐다. 카페 콘셉트는 7080에 맞춘 듯했다. 마침 책장에 꽂인 LP 앞 턴테이블과 오디오 스피커가 보였다. 90년생이 LP와 가까울 리 없다. MP3 대신 700MB CD를 구워 라디오 CD플레이어로 듣던 시절이 고작 10년 전이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모바일로 접속한 PC화면을 보자 와이파이에게 고마워하던 때가 엊그제였다. 알던 팝송도 별로 없어 사장님의 선의를 추운 몸 녹이느라 주목하지 못했다. 카페 이름처럼 LP 수백 장이 깔려 있으나 정작 LP를 못 알아보는 90년생 아저씨를 위해 사장님이 선곡을 이어간 것이다. 어렸을 때 본가(本家) 흔들의자는 거실에 고즈넉이 대기했다.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 졸음이 왔는데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편해 침대로 이동할 즈음 졸음이 물러가곤 했다. 베란다로 이동한 본가 흔들의자는 이제 곧 영원한 안식을 맞이할 듯 낡아 버렸다. 7-80년대 책만 쌓인 줄 알았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니 ‘코믹 메이플스토리 RPG’가 무척 정겨웠다. 그 62권 75권이 15권, 17권이면 더욱 반가웠을 텐데. 흔들의자와 만화책보다 레트로토피아로 이끌어준 건 냄새 덕분이다. 가게를 따뜻하게 데워준 가스난로에서 풍겨온 냄새. 초등학교 4학년까지 연통 달린 석유난로를 봄 겨울이면 봐야만 했다. 냄새가 지독해도 껴입은 파카에 교실로 도착하면 반 친구들이 삼삼오오 손부터 녹이던 풍경도. 어느 날부터 천장에 박아놓은 히터를 보며 “우리가 사는 시대가 좋아지고 있다”며 껄껄대다 아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쯧쯧. 냄새에서 끝나지 않았다. 완성된 초코라떼를 가지고 책상에 올려둔 채 노트북을 켜자 학부시절 도망 온 서점 한 구석이 떠올랐다. 인생은 쓴 거라며 아메리카노에서 달달한 인생을 꿈꾼다고 초코라떼로 바꾸던 그 해, 나는 전공을 포기했다. 에세이를 탐닉하고 과제엔 어떤 괴상한 단행본을 인용할까 간만보다 초코라떼를 마시곤 했는데 그게 벌써 2년 전 얘기가 되고 말았다. LP와 함께 난로 냄새, 오래된 흔들의자 7080 풍경 가득 안은 카페 초코라떼의 단맛 사장님 선의도 잊은 채 통화, 자유론 새도 부럽지 않았다 설렌 마음, 내년의 행복을 선언하며 사장님은 더 콜링(The Calling)의 “Wherever you will go”를 틀었다. LP는 아니었고 오디오 음악인 모양이다. 저녁 가을바람이 불던 15년 전 흔들의자에 앉을 때면 지금의 생생정보통 따위의 프로에서 에이브릴 라빈(Avril lavigne)의 “Sk8er Boi”가 BGM처럼 깔려 맛 집에서 엄지를 척 들고 또 올 거라던 칭찬이 보일 것만 같았다. 어쩜 들어봄직한 음악만을 틀어주셨을까 싶었지만. 죄송하게도 노래는 나중에 음미해야 했다. 선배와의 통화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했건만. ‘조금 있다가’가 5분이 될 줄은 몰랐다. 그새 카페를 둘러보고 사장님과 동해시 뉴딜 사업에 대한 대화를 마치고 이제 막 자리에 앉자 선배가 떠올랐다. 사장님 마음은 들뜬 상태다. 지난 하반기, 국비 250억으로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이곳 카페가 포함된 발한지구와 삼화지구를 개발하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발한지구는 ‘개항문화발전소’ ‘마도로스거리’ ‘복합문화공방’ ‘청소년창작거리’ ‘야시장과 호스텔’을 조성하고 개발할 예정이다. 카페 사장님도 지금의 콘셉트를 아이템 삼아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바꿀 게 있으면 바꾸겠다고 밝혔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선배와 통화 가능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랜 시간 통화하며 10년간의 회포(?)를 말할까 싶었지만. 더는 과거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굳이 케케묵은 2010년대를 논할 필요도 없었고. 과거 대신 현재의 시간에서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광복홍콩 시대혁명] “괜찮습니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나는 이 말을 하고 눈물을 삼켰다

2019년 11월 18일
대학 벽보를 훼손하는 이들과 자유를 억압하는 중국 본토에 “홍콩을 기억하며 함께하겠다” 우리는 연결된 자유 세계시민 홍콩이 자유를 되찾는 날까지 광복홍콩 시대혁명, 홍콩힘내 웃으며 말했지만. “준비되면 말씀해주세요”라고 카메라를 들자 한 문장도 제대로 내 뱉지 못한 채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하려던 메시지가

[광복홍콩 시대혁명] 신문에서 보지 못한, 파란 물감, 빨간색 피

2019년 11월 18일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사이로 흰 옷 입은 건장한 남성들이 몰려 들었다. 그리고 우산 든 시민을 무차별 폭행했다. 믿을 수 없었다. 카메라 든 기자까지 몽둥이와 각목을 들고 무차별 폭행하는 영상이 한국의 지상파 뉴스로도 보도됐다. 지하철에 난입한 흰 옷 입은 남성들은 성별 가릴 것 없이 때렸고, 한 언론사는 임산부까지 폭행당했다는 기사도 보도했다. 지난 7월 윈롱(위안랑) 전철역에서 벌어진 삼합회를 배후로 추정하는 무차별 폭행이 벌어졌다. 백색테러였다(2019. 7. 21). 시민들은 경찰에 신고했지만 “무서우면 밖으로 나가지 마라”며 전화를 끊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경찰은 사건이 발생하고 30분이 지나서 등장했다. 심지어 흰 옷 입은 용의자에게 “고맙다. 모두의 도움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어깨를 두드리는 경찰 지휘관 모습이 동영상으로 공개됐다. 시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늑장 대응한 것도 모자라 용의자에게 고맙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 언론도 홍콩 민주화 운동을 비중 있게 다루곤 한다. 그렇지만 전시회에 낯선 장면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우리 언론의 극명한 한계를 경험했다. 파랗게 물든 홍콩 시민들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경찰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강경하게 진압했다. 홍콩 경찰은 구룡에서 집회를 연 시민을 향해 빈백탄(주머니탄)을 발사했다(2019. 8. 11). 오른쪽 눈에
Today소랑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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