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 - Page 9

[팔짱만 껴도 좋은걸②] 펭-귄, 페—-ㅇ귄, 뽀뽀 —- 우

여자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한 애착인형을 데려왔다. 정확히 몇 월 며칠에 왔는지를 서로가 모르는 걸 보면 처음엔 별 감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갤러리에 저장된 걸 보면 애착인형의 첫 사진은 지난해 9월 20일이다. 9월 전후로 애착인형을 데려온 것이다. 인형을 산 건 10년도 더 됐다고 한다. 여자친구가 동생에게 부탁해 에버랜드에서 사 왔다는 것. 영혼 없는 눈망울, 무표정한 얼굴, 입을 여닫을 수 없는 부리. 여자친구는 애착인형더러 “킹 받는다”고 표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친구가 출근하고 집에 없는 동안, 장난끼가 발동했다. 여자친구가 벗어놓은 잠옷을 내가 애착인형에게 입혀 놓고 나간 것이다. 저녁, 여자친구와 함께 집에 도착했다. 나는 능청맞게 장난을 쳤다. “어? 오늘 출근 안했어요?” 여자친구가 맞장구를 쳤다. “뭐지. 그럼 난 뭐지.” 애착인형은 울 줄도 안다. “펭~귄” 여자친구 특유의 발음에 착안해 나는 “펭~귄”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도 재밌다고 따라한다. “펭~귄” 우리끼리만 맛있는 걸 먹으면 애착인형은 삐진다. “펭~~귄” 우리끼리만 재밌는 데 가도 애착인형은 삐진다. “페~~~~ㅇ귄” 그런 애착인형을 여자친구는 무척 아낀다. 내가 애착인형에게 뽀뽀를 하면 “펭귄OO 괴롭히지 마욧~!”이라며 걱정도 해준다. 그런 애착인형에게 새 친구가 생겼다. 올해 애착인형 2호를 데려온 것이다. 그것도 판교에서 온 녀석이다. 우리의 애착인형과

[커버스토리] 10년이 지나고 나에게 선물 받은 나의 방

10년 묵은 먼지를 털어내자 재채기가 나왔다. 이 정도 먼지면 바깥에서 털었어야 했다. 중학생 시절에 만들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미술 과제를 꺼내 들자 허술하게 관리한 그간의 세월이 먼지만큼 보였다. 뇌리에 남은 미술 선생님 이미지는 두 가지다. 섬세함과 예민함을 갖춘 바람에 우리들에게까지도 엄격함을 요구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이기적인 인간상, 또 하나는 부처상 앞에서 백발배로 성찰하며 자신의 예민함을 섬세함으로 가다듬던 인간상. 그 짧은 반 오십 살면서 자신의 삶을 바꾸어간 사람들 셋을 보았는데 그 중 한 분이 미술 선생님이었다. 자신의 장점이자 단점이던 예민함과 섬세함을 극대화해 끝내 자신의 성격조차 조각하듯, 하나하나 새겨나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런 어른이 가르쳐주셔서 고마웠다. 선생님은 신문지로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라 하셨고, 좋아하는 간판을 그리라고 흰 종이를 내주셨고, 배달 음식으로 남은 나무젓가락으로 탑을 쌓아보라 하셨고. 마지막으론 내 방 만들기라는 거대한 과제를 내주셨다. 즐거웠다. 왜냐하면 나는 늘 내 방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집에서 놀 듯, 학교에서도 놀아보라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선지 학교 가기가 가벼웠고 하나 둘 만들어가는 교실 속 광경을 느끼자 내 세상 같았다. 고입선발고사를 위한 미술 공부는 재미없었다. 지금도 머리에 남는 교과서 속 인물은 독창적인 팝아트 거장 엔디 워홀(Andy Warhol)밖에 없다. 점 하나 찍고 돈 세탁이나 하는 줄만 알았던 작품의 세계를 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편견을 집어치우고 말았다. 즐겁게 제작하던 10년 전 작품을 다시 손에 들었다. 내 방 어딘가에 잠자고 있는 작품들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지면은 여행을 떠나고 채워야 했지만, 코로나 파동으로 인해 방 꾸미기 기사로 갈음한다.

[15일의 기록] ①두 달의 서버 마비가 끝나고, 퍼피레드에 복귀하다

2020년 02월 15일
“ 퍼피레드 운영진이 복귀하자 이곳의시차도 시스템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망한다 망한다 하더니 진짜로 망할 줄 꿈에도 몰랐다. 2012년 무렵부터 적적해진 분위기에 망했다고 느꼈건만 서버 종료라는 마지막에 도달할 줄은 전혀 상상조차 못했다. 무언가 망하는 광경을 목격한 적 없어서 신기했다. 2016년은 세 차례를 제외하고 닫힌 서버 탓에 더는 그 세계에 접속하지 못했다. 2016년 8월 5일도 그랬다. ‘이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가 뜨겠거니 생각하고 접속한 퍼피레드의 마지막 풍경은 어딘가 낯설었다. 퍼피레드는 2015년 12월 6일 게시글을 끝으로 공지사항조차 업로드하지 않았다. ‘한게임퍼피레드 환불 일정 공지’가 박제된 상태로 몇 년간 유지됐다. 오죽하면 공지사항 네 개 글이 텍스트 상자처럼 눈과 몸에 각인됐으니. 일종의 믿음일까? 퍼피레드만큼은 ‘이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언제든 문 열어 당신들의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을까하고. 게임 업데이트는 고사하고 회사의 사정까지 상세히 밝히지 못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운영진은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마지막 약속을 건넸다. ‘퍼피레드 서비스 종료 안내’ 어느새 돌아온 2시간 반 서버 시차는 원상 복귀 됐고 몸이 기억하는 공지사항 사각형 상자에 짤막한 새 글을 느끼자 올 것이 왔다고 느꼈다. 더는 업로드 없었던 첫 글 ‘퍼피레드 서비스 종료 안내’가 가슴 철렁했고 신속하게 마지막을 준비하게 만들었다. 이럴 줄 알고 몇 해 전부터 텍스트 자료로 백업해 왔건만. 이제 정말 남은 시간은 보름 남짓. 황망할 틈도 없었다. 우리 모두 퍼피레드 마지막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아담하던 서재가 사라진다, 퍼피레드가 사라진다밤 10시가 훌쩍 넘어 미니파크는 고요했다. 두 달 전 꺼둔 조명 하나 둘 켜자 노랑 빨강 얼룩진 거대한 예배당 자태가 하얗게 드러났다. 이곳은 군 입대하던 새벽까지도 함께해준 나의 공간이다. 버뮤다 순복음교회, 대형예배당 한 구석 아래아 한글과 함께 집필 활동을 이어간 거대 서재인 셈이다. 당장 ‘파티&파티’를 열어 나처럼 충격과 당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예배 때 빼고 파티를 연지도 5년만이다. 사람들은 웬일로 하나 둘, 우리 교회로 접속했다. 그리고선 한결같이 황망함을 토로했다. 믿을 수 없다고. 나도 그랬다. 감출 수 없는 예언된 이별의 준비를 준비하러 아래아 한글을 열었다. 퍼피레드 서버 종료, 현실로 다가오다 그 동안 문 닫을 것이라는 예측과

[교회는 요지경] ‘청춘 반환 소송’ 한국 개신교회도, 내 시간 돌려내!

2020년 01월 17일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 풍경은 진지해서 웃겼다. 명찰 따위 부착하고 다신 보지 않을 듯한 단호한 발걸음은 싱글벙글 미소 짓던 표정과 제법 어울렸다. ‘열광적인 찬송 소리’ 멘트가 들려오자 두 손들고 열창하던 교인들의 흰 소복이 교회 밖에 설치된 대형 TV에서 기괴한 풍경으로 연출됐다. 이들은 자정이 지나 “야 이 씨XX아!” 강대상 뒤엎는 광경을 상상이나 했을까? 열광적 기도 속에 겨우 잠입한 KBS 카메라엔 김이 서렸고 흡사 흰돌산 기도원 같았다. 곧 휴거(携擧)가 불발 됐고 희대의 종교 사기극은 그 날로 끝인 듯했다. 신천지도 그랬다. 교회 방송실에서 근무하던 2008년. 그 때만 교인 수 4만 명, 10년이 지나 20만 명까지 불어난 엄연한 종교단체였다. 이젠 10만 명이 모여 수료식을 치른다고 하니 교회 밖 사람들은 신천지의 존재를 물었다. 한국 개신교회는 신천지의 존재에 까무러쳤다. 교회 출입구에 떡 하니 붙은 ‘신천지 OUT’은 부적처럼 견제해 대니. ‘청춘 반환 소송’에서 신천지 변호인 측은 이렇게 변론했다. “신천지란 사실을 나중에 밝힌 뒤에는 그만둘 자유의지가 원고에게 있었다.” 나도 교회를 다닐 땐 이런 교회였다는 사실을 알고서 다니지 않았다. 자유의지도 자라기 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자발적으로 10년이란 세월을 교회에서 지냈으니 더욱이. 신천지처럼 모략전도도 아니었고 다미선교회처럼 시한부 종말론도 없었지만 ‘천국과 지옥’ ‘앞자리에서 예배 드려야 은혜 받는다’ ‘영적인 세계’ ‘타락해가는 세상’ ‘주님 오실 날이 머지않았다’식의 메시지는 충분히 교회에 붙들어 놓을 장치가 되어 주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예배당 왼편에 마련한 컴퓨터 앞에 처음 앉는 순간 교인석에 앉았을 때완 차원이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70평 상가에서 건평 300 건물로 이사하고 방송실도 꾸려졌다. 그렇게 8년. 방송실은 교인들 뒷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처음 보는 뒤통수가 보일 때면 그런가 보다 싶지만. 익숙하던 뒤통수가 보이지 않으면 궁금증이 샘솟는다. 소문에 소문을 거쳐 방송실에까지 들려올 때면 이내 해소된다. 조용히 일하던 방송실까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도 교회는 자발적 착취를 이용해 교회라는 구조를 연명한다. 이 에세이가 편파적이라고? 교인석이라곤 다를 줄 아는가? 방송실 위치는 후미진 곳 구석이라 온갖 편파적 정보들이 난무한다. 사람은 자리가 만든다고 한다. 편파적 궁금증은 방송실에 앉았을 때부터 언제나 존재했다. 학창시절 교회에 날려 먹은 시절이 아까워 꿍쳐둔 원고를 끼적이려다 싣지 못했다. 근데 결정적 소문이 들려왔다. ‘청춘반환소송’ 장난감처럼 요지경 같던 교회에서의 풍경이 보이노라 말하겠노라. 교회는 실명 대신 적당히 ‘참여교회’라 부르겠다. 교회 사무실, 예배당, 식당, 유아실.

[시대여행] 다방 의자, 형광등 아래 “전도사? 할 만해”④

2020년 01월 08일
시대여행 <4> 의인 이후를 물으며 기도원으로 향한 2人 오래된 기도원 구석, 색 바랜 예배시간표 “사역할만하다”기에 생각해본 ‘삶의 자리’ 기도원으로 향하던 길목에 대풍이를 생각하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의로워지는데 그럼에도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겠네?” 끊임없이 회개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알다시피 인간을 죄인으로 보지 않는 입장에선 무의미한 질문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던가. 한 때 죄책감을 안고 살아도 봤고, 죄에 경도되어 강박증도 앓았지만 끝내 신앙의 건너편에 서자 비로소 인간이란 존재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인간은 원래 인간이다.’ 기도원은 산중에 서 있었다. 시내버스를 타고도 자동차로 6분을 더 달려야 도착한다. 가을임에도 산이라 오들오들 떨렸다. “저녁 먹으러 가자.” 토요일 저녁 몇몇 교인 분들이 식사를 마치려던 순간 들어온 모양이다. 대풍이 어머니께서 “아, 그 말 잘한다던 형제님이시구나! 부흥사하면 좋겠어요. 호호” “아이고~ 학교는? 졸업하고?” “아, 네…. 잠시 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윤대풍 이 녀석…. 도대체 날 어떻게 소개했길래! 어머님과 기도원 식구들, 대풍이를 담당하던 담임목사. 이렇게 예닐곱 구성원과 따로 식사했다. 자리에 앉자 식사에만 집중했다. 담임목사를 보니 향후에 대풍이가 어떻게 살아갈지 훤히 보였다. 대풍이는 목회학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한 장로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는 중이다. 교회 일이 꽤 힘들었는지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부터 들어왔다. 무슨 일로 그만두고 싶다는 건지, 소상히 들을 필요를 느꼈다. 도착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외관은 모르겠지만 내부는 꽤 오래된 건물인 듯 했다. 다방에서나 볼 듯한 소파에 올려진 ‘예배시간표’는 얼마나 모일까 묻게 했다. 벽지 사이 갈라진 콘크리트 벽면은 냉기가 머물다 사라졌다. 소변기에 물이나 떨어질지 걱정될 만큼 추웠지만 다행히도 동파는 아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자 화들짝 놀랐다. 엄지 크기 거미가 지네처럼 왔다 갔다 했다. 거미를 죽이고 매트 아래 바닥에서 대화를 나눴다. 기도원 원장님께서 흔쾌히 허락한 방에서. “전도사 생활 할 만해?” “응. 힘든 때도 있긴 한데 그래도 할 만해.” 힘든 때를 물었다. 전도사도 교회 일이니 인간적이고 편하지 않을까 싶을 테지만. 환상에 불과하다. 최저임금 위반에 퇴근조차 눈치주고 성탄절 공연이란 미명아래 쓸모없는 자발적 착취에 작정기도라는 이름으로 결속하기 바쁘다. 그 사이 안식년조차 없는 전도사들은 바쁘게 구둣발만 흔든다. 큰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큰 교회에서 일할 수 있으니 감사하라는 자부심은 어디에 근거한 걸까. 장로가 닦달한 건 아닌지, 말도 안 되는 업무량에 치여 사는 건지 물었지만 둘 다 아니었다. 다행이다. “성도님들이 전도사님이라 부르는데 몸 둘 바를 모르겠어. 주일마다 넥타이를 매고 가는데 성도님들이 ‘전도사님’ ‘전도사님’ 그러는데 나보다 대단하신 분들이 나한테 전도사님이라 부르는 게 편하지 않아.” 문제는 또 있었다. “교회에서 방언도 크게 못하고 찬양도 잘 못 불러서 그게 아쉬워.” 한국교회를 살리고 성장시킨 원동력은 주여 삼창이다. 순복음중앙교회라는 커다란 돔에 1만 명이 모여 새벽 4시까지 철야예배 했으니. 예배당에 모인 수많은 기도소리를 빌 하이벨스가 ‘많은 물소리’로 들을 만도 했다. 드럼과 기타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대 속에서 여의도를 시작으로 복음성가 열풍이 불었다. 장로교회서만 손뼉 치며 찬송 부르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 오순절 예배 시스템이 대중적 예배 방식이 되고 말았다. 오순절 예배는 열정적이다. 드럼과 기타, 피아노 덕분에 한층 감정이 고조된 나머지 경건과 엄숙이란 분위기는 사라진다. 대풍이와 나도 그런 순복음의 영향을 받았다. 순복음 아닌 교회가 교회 아니겠냐마는. 전도사로 사역하던 교회는 장로교회다. 자유의새노래에 자주 게시 중단을 요청하는 그 교회 부목사가 개척한 교회라 분위기는 오순절과 거리를 두는 듯했다. 캐주얼 복장을 즐겨 입는 대풍이가 정장까지 입을 생각하니 갑갑해 보였다. 그리스도교란 서양의 옷이 어색했던 전후(前後) 문학가 엔도 슈사쿠처럼. 올해를 끝으로 전도사 직을 사임하겠다고 계획까지 말하는 모습에서 그 다음을 물었다.
Today소랑 2026년 8월 24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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