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 - Page 10

[지금,여기] 뜨듯한 온천과 시원한 맥주 “캬, 이 맛이지” 끝없는 ‘오사카의 밤’ 「2박3일, 오사카여행③」

우드톤 단색의 고즈넉한 도시가 교토였다면, 오사카는 그저 화려하고 젊은 분위기의 도시였다. 우리는 나가호리바시를 기반으로 오사카의 도톤보리와 난바, 우메다, 나가자키초를 돌아다녔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큐카츠 토미타(牛かつ 冨田)다. 각자 구워 먹을 수 있는 큐카츠 전문점이다. 다행히 우리는 기다림 없이 바로 입장해서 저녁을 즐길 수 있었다. 와,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맛. 달달하고 고소하며 담백한 맛. 입 안에서 녹는 육즙이 끝내줬다. 현금만 받는 가게라 카드로 결제하지 못했다. 곧이어 낮에 예매해 둔 리버 크루즈를 타고 우리는 도톤보리 강을 누볐다. 베테랑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주변 관광객들이 선사하는 손인사에, 우리도 손을 흔들었다. 가까운 타지에서 느끼는 이색 풍경에 하나가 되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낮에는 여자친구를 따라 우메다 근처에서 쇼핑을 즐기기도 했다. 우리는 아식스 오사카 스토어에 방문했다. 스티브 잡스 같은 분위기의 직원이 우리를 맞았다. 여자친구가 둘러보는 동안, 나는 작은 소파에 앉아 쉬었다. 다소간의 긴 시간을 머무르는 바람에 여자친구와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며 나왔다. “失礼しました。(실례했습니다.)” 곧장, 직원이 90도로 숙이며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중한 인사에 깜짝 놀랐다. 작고 진심 어린 순간에서 문화적 감동이 남은 것이다. ❼오사카 아식스·마크 커피 ‘90도 인사’ 진심 어린 문화적 감동 카라멜마끼아또, 바리스타의 손맛

[광복홍콩 시대혁명] 거리로 나온 배경엔, ‘송환법 너머’가 있다

2019년 11월 18일
홍콩민주화운동은 범죄인 인도 법안 너머를 봐야 흐름이 보인다.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이유엔 자유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시회에 입장해 순서를 설명 듣고 곧장 사진을 살필 수 있었다. 가로로 길게 뻗은 좁은 통로 사이에도 사진과 설명이 붙어 있었고 사진 옆에는 한국어와

[광복홍콩 시대혁명] 우리는 이들과 2019년을 살아가고 있다:『신문에 보이지 않는 전인후과』 전시회

2019년 11월 18일
“사진 많이 찍어주십시오. 하지만 관계자들이 나오지 않게만 해주십시오.” 순간 떠오른 이미지는 한 순간 사진을 촬영해 사람 숫자를 센다는 중국 공산당 기술을 보도한 뉴스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붐볐다. 그리고 생각보다 신문과 방송

[내 맘대로 교회 탐방] 1945년 12월 2일, 이곳에 「경동교회」가 섰습니다②

2019년 09월 12일
11시 정각을 훨씬 넘은 시각. 붐비지도, 시끌벅적 않은 불편한 상황에 주보(週報)도 바삐 나눠주지 않았다. 이제 막 도착하자 조용히 건네받은 주보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부끄러울 만큼 고요했다. 한국의 진보적 교회로 유명한 경동교회는 해방 직후 일본 천리교(天理敎) 건물을 인수해 30여 명 어린이와 학생들이 첫 예배를 드리며 시작했다. 재밌게도 영락교회와 성남, 경동. 세 교회는 1945년 12월 2일 창립일이 동일하다. 적산불하(敵産拂下), 일본인 부동산이 교회로 넘어간 덕이다. 경동교회 시무 목사로 부임(1958. 12. 7)한 여해(如海) 강원용은 1965년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설립해 1970년, 전태일 열사 죽음에 대한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무슨 이유에선지 호출부호 HLKY, CBS 라디오 예배 중계가 외부 지시로 중지되고 마는데. 개인의 구원과 보수적 신학을 토대로 성장한 영락교회와 달리, 사회참여와 민주화 운동, 통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경동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고단함 속에도, 음악으로 꽃피우다 평범한 주일 밤 7시, 강원용 목사는 가수 조영남과 송창식, 최영희, 윤형주를 교회로 초청했다. 통기타 들고 단 위에 선 이들 가수는 미국 흑인 민요 ‘목화밭’과 ‘샤론들에 핀 백합화’ ‘주여 기억하소서’를 불렀다. 평범한 문화 행사 아니냐 싶을 테지만, 그 때는 1969년 11월 2일이었다. 지금이야 통기타에 드럼이 결합한 밴드형 예배가 익숙할 테지만. 딴따라 취급 받은 가수를 초청해 세속 음악을 예배당에서 부르게 해 청년은 몰려들었다. 영산싱어즈라는 밴드형 예배를 도입한 여의도 순복음교회보다 27년 빠른 셈이다. ‘새로운 리듬의 밤’이란 파격적 이름의 예배 때문일까? 가수 조영남은 73년 군복무 중 군(軍) 교회에서 특송을 부르던 와중에 김장환 목사 추천으로 이듬해 빌리 그레이엄 초청 전도 집회에서 성가를 불렀다. 교회 창립 15주년에 전자오르간을 구입하자(1960) 제 1회 경동음악회를 개최(1968)한 경동교회는 다양한 문화 행사를 선보였다. ‘성탄축하 무용과 연극의 밤’(1969), 마임극(1972), 부활절 연극 ‘살았다’(1974), 창립기념일 연극 ‘드고아에서 온 사람’(1974), 성탄음악회 ‘글로리아’(1974), ‘가시관 쓰신 왕’ ‘무덤의 여인들’(1975), 1982년엔 교회 옥상에서 다시 한 번 조영남과 윤형주를 초청해 가스펠송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유신독재 시절임에도 지면에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문화 행사를 향유한 것이다. 대화와 평화, 경동교회에 서린 가치 경동교회는 강원용 목사의 영향으로 사회참여 색채가 짙다. 강원용 목사는 전태일 열사가 저항할 때 ‘한 알의 밀알’(1970)을 설교해 연행됐고, 청계천 동화시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지역사회학교’인 야학을 시작했다(1976). 이듬해 동화모임 연극발표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는 위기도 겪었지만 사회참여를 강조한 세계교회협의회(WCC)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제 6차 총회까지 참여해 교회 일치 운동(Ecumenism)에 힘썼다. 강원용 목사가 강조한 건 대화와 평화다. 2010년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가 개최한 ‘세 명의 거인들이 바라본 이웃종교의 같음과 다름’ 학술대회에서 박종화 목사가 강사로 나섰다. 강 목사를 ‘이웃일 수 있고’ ‘이웃이어야 하는’ 종교 간 만남을 시작한 존재로 묘사했다. 이듬해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가진 ‘참 종교인이 바라본 평화’를 주제로 행사가 열렸다. 전(前) 조계종 총무원장 송월주 승려가 고인이 된 강 목사를 회상했다 “기독교의 사명은 세상을 기독교화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화하는 데 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된 것이라는 생전의 육성이 새삼 귓전을 울린다” 불교의 승려가 목사를 기억하다니! 미국식 추수감사절에서 민족 명절인 추석으로 옮긴 점도 독특하다. 문화 주도의 상징 가수 초청해 벌어진 통기타예배사건, 마임·연극·음악회·가스펠 페스티벌 문화 주도 사회 참여 주도 강원용 목사 영향에 지역사회학교 운영하다 간첩 사건으로 중앙정보부 연행되기도 도시 속 조화로운 교회 따뜻한 채광·적당한 조명·차가운 노출 콘크리트… 김수근 건축가 설계로 지어지다 재해석된 성서 하나의 성서로 설교하기엔 역부족, 구약─서신─복음으로 나눠 설교하자 감탄하다 경동교회 건물 곳곳에 묻은 친절의 손길 한 번은 와보겠다 마음먹은 지금의 건물도 대화와 포용을 생각하게 만든다. 거대하게 솟은 빨간 벽돌들은 이곳이 교회구나 생각이 들도록 한데 모였고 금빛 ‘경동교회’ 간판은 빨간 벽돌과 조화를 이룬다. 마치 카타콤처럼 어둡기도 하다. 정문에서 바로 보이는 출입문이 잠겨 오른쪽 계단,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 비로소 출입문을 찾았다. 빙 돌아 언덕을 향해야만 입장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알다시피 1981년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했다. 겉으로 봤을 땐 기도하는 손을 닮은 듯, 건물로 들어서니 적막감 속에 주일 예배를 기다리는 교인으로 고요했다. 자리가 꽉 찼다. 1층 중앙 빈 좌석만 보였다. 어색한 웃음의 청년을 맞이해 준 건 옆 자리 교인이었다. 96년 4월, 자체 제작한 ‘경동찬송가’를 모르던 내게 손가락을 짚어주며 도움 준 덕분에 어려움 없이 예배에 참여했다. 친절은 교회 건물 곳곳에도 남았다. 강대상 위 십자가를 말없이 비추는 빛은 채광(採光)이다. 역설적이게도 내부는 전부 콘크리트로 노출했다. 차가운 이미지로 남아버린 콘크리트이기 때문인지 적절히 배치된 조명은 오히려 따뜻했다. 만일 어두운 천장에 대고 플래시를 터뜨렸다면 과감히 드러난 민낯에 깜짝 놀라고 말 것이다. 예배당 왼편에 마련한 장(長) 의자에 비추인 채광은 조명이 없어도 훤했다. 예배가 끝나고 2층에도 올라가 봤다.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벽면이 사이에 세워져 정제(整齊)를 보였다.

[내 맘대로 교회 탐방] 경동교회 주보는 이렇습니다

2019년 09월 09일
오르가니스트의 아름다운 연주로 시작하는 경동교회 주일예배는 독특할 어떠한 건 없었다. 예배는 오전 11시 30분 정각이 시작했고 찬송가 67장을 부르며 첫 순서 ‘모임’이 진행됐다. 예배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모임’과 ‘말씀’ ‘보냄’. 예배 인도자인 목사와 교인이 복음서와 서신서를 교독하면 성가대가 송영(頌榮)을 부르고, 응답송을 교인이 부른다. 응답송의 경우 찬송가가 아닌 경동교회가 자체 집대성한 ‘경동찬송’을 부른다. 그 중엔 테제 찬송(찬양하여라)도 포함해 낯익은 풍경을 경험했다. 교인이 침묵의 기도로 한 주간의 죄를 고백하면 목사는 용서를 선언한다. 두 번째 순서인 ‘말씀’에선 구약의 말씀과 서신의 말씀, 복음의 말씀을 읽으면 경동찬송 한 절씩 부른다. 복음의 말씀까지 읽고 나서 찬송가를 부르고 교회 소식과 기도, 응답송, 성가대의 찬송이 마쳐지면 담임목사는 설교를 한다. 그 흔한 드럼과 기타 없이 전통적 예배에 교인과 목사는 성령의 일치를 요청한다. 복음성가와 결이 다른 경동찬송이 아니라면 어색하지도 않다. 성경을 봉독하고 교인들이 응답송을 부르는 광경이 가톨릭 미사와 비슷하지만 마지막 순서 ‘보냄’은 어떠한 파송 없이 봉헌과 보냄 찬송, 축도가 전부다. 목사가 두 손 들고 교인들 앞에서 축도한 후 오르가니스트의 후주와 함께 퇴장하는데. 파송이란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해서 파송이 아닌 건 아니다. 조용하다 해서 교회 문이 닫은 게 아니듯. 후주가 마쳐지면 교인들은 십자가 문을 통해 교회 건물을 나선다. 사람 키 보다 큰 십자가 스테인드글라스 앞에 서면 십자가가 세워진 광경을 목도한다. 교회처럼 세워진 걸까,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탑을 세운 걸까. 스테인드글라스뿐만 아니라 교회 건축물 이곳저곳, 어떤 의미를 가진 걸까 고민하게 만든다. 그렇게 교회를 나설 무렵, 스테인드글라스는 세상으로 보내는 예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인을 상징하지 않을까 상상해봤다. “세상으로 가라”(마가 16,15)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며. 섹션 순서 내용 전주 오르가니스트 연주 *모임 모임찬송 찬송가 67장 *모임 예배 부름 복음서 교독 *모임 송영 성가대

[내 맘대로 교회 탐방] 1945년 12월 2일, 이곳에 「경동교회」가 섰습니다①

2019년 09월 09일
조영남이 교회 옥상에서 공연을 펼치자 한국교회는 발칵 뒤집혔다. 동아일보는 1970년 9월 16일자 기사에서 “인기 가수의 팝송을 곁들인 새로운 예배 형식을 시도하여 일반 교역자나 많은 청소년 신도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며 기존 교회의 저항과 젊은이들의 관심을 보도했다. ‘京東敎會 새 形式의 파문’. 경동교회는 파격적 교회였고 강원용 목사는 과감한 성직자였다. 따라서 틀에 매이지 않았다. 교회는 곧장 두 의견으로 갈라졌다. 박자도 느리고 재미없는 찬송가 대신 팝송을 도입하자는 입장과 과연 바꾼다고 될 문제인가 회의적 시각이 충돌했다. 50년이 지난 현재 드럼과 기타 없는 교회는 없다.   옥상교회 위 조영남파격적 교회 행보 보이자 두 갈래 갈라진 한국교회 신 죽음의 시대?70년대 장충동 경동교회 하지 못한 일을 진행하다 ◇춘원도 혀를 차게 만든 교회 지상주의(至上主義) 50년이 지난 파격적 교회는 지금도 장충동에 우뚝 서 있다. 한국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춘원(春園) 이광수가 교회 지상주의를 “무엇이건 교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은 모두 악이라 하였다”고 비판했듯, 오늘날 교회는 EDM(Electronic Dance Music·전자음악)조차 어색해한다. 하여튼 뭔가 어색하고 이상하면 감정 판단으로 “하나님 중심주의”를 남용한다. 답답하기 그지없다. 2019년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교회보다 재밌는 건 많다. 이젠 청년들도 일상에 이리 치이고 저리치어 교회에 발도 들여놓지 않는 시대를 살아간다. 오죽하면 ‘신 죽음의 시대’라고까지 표현했을까? 경동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전략적 선택을 취하지 않았다. 옥상교회에까지 딴따라(?)를 부른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지코(ZICO)가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부르는 그런 느낌? 암만 생각해도 이 비유도 틀린 것 같다. (절레절레) 그런데 1969년 11월, 강원용 담임목사는 한국교회가 이제껏 하지 못한 일을 과감히 진행한다.

[주마등] 가영이는 어떻게 지내니?

2019년 05월 01일
이번 호 ‘주마등’은 교회 내 성범죄와 청년 착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독에 주의해 주십시오. “가영이는 어떻게 지내니?” 헤어진 지 6년, 어머니가 묻자 그간 잊힌 실루엣이 떠올랐다. 짧으면서도 길게 느껴질 1,825일, 어느새 결혼했단 소식을 우연히 접하자 어리벙벙 새벽까지 남아 졸며 과제하던 여명도 함께 떠올랐다. 여자친군 아니고, 같이 교회 다니던 누나 이야기다. 10년 전, 이백사십칠 제곱미터 예배당 앞자리서 벌떡 일어나 도착한 주일학교 아이들에 웃으며 반겨준 바보 같은 누나다. 워낙 활발한 교회 활동에 사모님조차 처음엔 신천지 아니냐 의심까지 한 순진무구 누나, 신가영. 누구든 야유와 함께 반응조차 않은 아재 개그에 깔깔 웃으며 “다신 그런 개그하면 왕따 당할 거라” 걱정해 준 우리 누나, 가영이 누난 어느 순간 조용히 교회를 떠났다. 인사 한 마디 없이. 떠나고서 발견한 한 가지 누나가 떠나기 직전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이란 메시지를 자주 접했다. 요즘도 교회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표현을 접하기 쉽다. 여주봉 목사가 펴낸 ‘예배회복’을 정독한 것도 그 무렵이다. 달리는 버스, 먼 대전으로 향한 작은 여행에도 1시간 30분 설교는 가슴을 뜨겁게 했다. 인간 예수도 죽음 앞에 슬피 울었고, 탁자를 뒤엎어 분통 터뜨렸고, 독사를 내세워 욕도 했으니 먹고 사는 문제 걱정 말라며 희로애락을 인간 몸으로 경험했을 예수도 내가 겪은 신앙의 매너리즘을 이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건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회개 아닌 진정한 회개를 외친지 10년이 지났다. 10년 전 위기가 10년 후에야 살에 와 닿게 시렸으니, 중고등·청년 사역 적임자로 소문난 전병욱과 이동현, 문대식 설교를 곰곰이 들어보면 왜 이런 설교에 시간을 허비할까 되물었다. 외로우니까. 혼자로 남기엔 무서우니까. 헬조선이란 거센 풍파를 맞닥뜨리기 버거운지라 하교하고 돌아간 교회에 학생들이 손에 잡은 피아노와 기타는 말이 없었다. 제도권은 참 든든하다. 나를 제도권에 숨기면 자연인 가영이 누나가 아닌 경건한 신앙인이자 주일학교 교사인 신가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혼자선 힘든 일도 제도권과 구조는 능히 해낸다. 교회만 할 수 있는 일은 매년 여름과 겨울, 수련회로 이어진다. 목사님의 고백, 목사님의 사과 여름과 겨울, 수련회 시즌이면 교회는 노아의 방주가 된다. 세상과 교회로 선 긋고 세상에 물들지 말라던 플라톤 뺨치는 이데아에 바울이 의도한 대로 메시지가 전달 된 걸까. 학생들은 노아로 변신했고 가영이 누난 강한 여성 에스더로 변신했고 때론 드보라로 나타났다. 선택 받은 자, 태아부터 너를 알았다던 예레미야의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 텐데, 목사님이 따로 부르면 의아했을 것이고,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영이 누나에겐 교회에서의 삶은 신가영의 당연한 삶이고 끊어지기 힘든 또 다른 신가영이었을 것이다. 목사님과 청년들이 함께 한 독일에서의 여행은 더욱 생생했을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을지, 이미 사라진 고문박물관을 뒤로하고 아쉬워하던 목사님 뒷모습에서 어젯밤 가영이 누나와의 잠자리는 누나에게 헬조선을 견뎌내야 할 잔인해질 기회였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너에게 외로움의 영이 느껴진다고 머리를 쓰다듬었을 땐 내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버릴 순간이었을 것이다. 영의 눈이 밝은 목사님은 누구보다 가영이 누날 알아주고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영적으로 알아봐준 목사님이 든든했을 것이다. 그런 목사님이 더듬거린 모습이 의아했을 것이고, “너 교회 망하는 거 좋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으로 시작하는 영적인 사과에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거울 앞에 초췌하게 섰을 것이고, 목사님의 명예를 단 칼에 쳐낼 정의로운 드보라 대신 말고의 귀를 자른 성급한 베드로가 서 있었을 것이다. 구슬프게 보이던 예수님 성화 편한 옷차림으로 목사님의 조수석에 앉은 새벽, 그때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선배는 말했다. “이 세상에 안 힘든 젊은이가 어딨겠냐”고. 누구보다 힘든 사춘기, 청년 시절을 알아주고 이해해 줄 거라 목사님을 굳게 믿었을 것이다. 집안 사정부터 어떻게 자라왔는지, 혼자 지내는 게 얼마나 외로울 지 누구보다 더 잘 알 테니까. 아라뱃길과 선유도공원을 지나쳤다. 서울에서 멀어지자 초조해졌고 집으로 데려 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런 방법으로, 외로움을 해결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돌아오던 길은 새벽이란 암흑에 가려져 이따금 가로등을 지나칠 때마다 목사님의 얼굴이 보였을 것이다. 외각으로 빠져나올 때 쯤, 너무도 멀리 와 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편한 옷차림으로 다가와 안아주고 입술을 닿으려 할 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너, 남자친구랑 너랑 뽀뽀하는 상상하니까 너무 질투가 난다.” 하지 말라고, 싫다고 말하지 못했다. 목사님 집에 붙은 예수님 성화는 구슬프게 우는 듯 보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을린 눈망울에 새겨진 살려달라는 비명을. 방송실에서 퇴근할 무렵, 유독 불 켜진 사무실에 혼자서 일하던 누나에게 도망치라 말 한마디 해주었다면. 가영이 누나가 자격증 시험 보러 목사님께 주일 예배를 빠져도 되느냐 여쭈었을 때 그 대답이 생각났다. “가영이 쟨 말야, 돈을 너무 좋아해. 사람이 돈에 매여선 안 된다고.” 선배는 옳은 말을 했다. “세상에 안 힘든 젊은이가 어딨겠냐”던 말을 목사님이 발화할 때 아 다르고 어 달라졌다.

하느님, 주님께로 가는 길이 멉니다

2018년 09월 09일
서울, 희망여행 <3> 장대비가 쏟아졌다. 확 내렸다가 금방 그칠 기세는 아니었다. 향린과 영락교회로 향하려다 피신해야했다. 예상과 달랐다. 명동성당을 마지막에 오려고 했는데……. 생각과 달리 여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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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3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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