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지지 않은 소녀의 시간, 초침은 지금도 움직인다: 「세계의 주인」

세계의 주인윤가은 감독 | 119분 | 12세+ | 2025 십여 분이었을까. 조금은 과장돼 보이는, 그래서 어색하고도 낯익은 주변 사람들의 웃음과 주인공의 미소. 아버지는 없지만 단란해 보이는 가족과 학교를 날아다니는 여고생 주인. 영화 초반, 오랜 시간 평범한 모습에 할애하던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스포일러 주의 성범죄 폭력성 주의 담임 교사가 건넨 농익은 사과에 호흡이 곤란한 척 너스레를 떠는 장난까지는 우연인 줄 알았다. 성범죄자 퇴거를 주장하며 사실상 서명을 강요하던 동급생 장수호(배우 김정식) 앞에서 버럭 소리 지르는, 그러니까 “나도 성폭력 피해자야”라는 섬뜩한 장면에서 나는 ‘도무지 농담일 리 없다’고 판단했다.

정의할 수 없는 사과… “미안해” 외마디에 담긴 의미:『완벽한 사과는 없다』

2024년 03월 25일
완벽한 사과는 없다 김혜진 지음 | 뜨인돌출판사 | 168쪽 | 1만1100원 리하에게 진실을 말하기엔 늦어버렸다. 리하의 인생을 박살낸 신지호가 내 친구라는 사실을 말하기엔 너무도 늦어버린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지호가 사라졌다. 이름 모를 고등학생이 죽었다고 한다. 지호의 이유 모를 강제 전학이 연이어 벌어졌다. 주인공 지민은 지호와 어려서부터 친했다. 애니메이션 피노키오를 보면서 마치 지민은 지미니 크리켓, 지호는 피노키오가 된 것처럼 굴었다. 지미니 크리켓이 피노키오의 양심인 것처럼 지민이도 지호에게 그런 존재였다. “네가 내 양심이야.” 도대체 지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이스크림 하나, 맥스봉 만치 친절한 정다온 같은 학원을 다니는 다온이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맥스봉 정도만 한 친절. 거절하기엔 애매하고 받기에는 머쓱한 미소를 들이밀고 보는 녀석이다. 지민에게도 그랬다. 가깝지는 않은데 아주 모르는 건 아닌 녀석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처음엔 지민이는 퉁명스럽게 대했다. 이내 경계심은 풀렸다. 편의점 사건 때문이다. 편의점에서 모르는 여자애들이 지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발끈한 지민이가 한 마디 거들었다. “틀린 말을 하고 있잖아. 강요하고 그런 일은 없었어. 그건 사고였다고.”(21,16) 그러니까 지호가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다 착한 고등학생 선배 엿 먹이려고 보드 한 번 타라 독촉했다가 죽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거짓말이라는 해명이었다. 이후로 다온이는 지민에게도 친절하게 대했다. 정다온 본인이 하고픈 말을 대신 해줘서 고맙다는 얘길 꺼냈다. 다온이도 지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온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특히 재희가 그랬다. 다온과 사귄 적 있는 재희가 자존심 부리기 시작했다. 다온이가 어장쳤다는 이유로 못 살게 군 것이다. 지민의 마음에서 양심이 발동했다. 학원을 나오지 않기 시작한 다온에게 프린트를 챙겨주기 시작한 것이다. 다온과 가까워졌다. 문득 다온이는 옹벽 위쪽 아파트 텃밭(53)을 가리켰다. ◇언덕 위의 세계 밖의 텃밭 안의 세계에 사는 우리하 다온이와 둘이서 도착한 텃밭엔 아무도 없었다. 밭주인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우리하. 지호가 가해자였던 그 사건에서, 피해자였던 그 아이.(57,8) 지민이는 혼란스러웠다. 편의점에서 변호를 한 건 지호였는데 다온이는 죽은 고등학교 선배를 말하고 있었다. 더구나 피해자로 알려진 우리하는 소문으로만 듣던 인물이었다. 리하 역시 소문에 못 이겨 전학을 갔고, 견디지 못해 죽음을 선택했다는 후문만이 무성했다. 리하는 아무렇지 않게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다온이도 텃밭에 토템을 세워 만들고 있었다. 언덕 위의 세계 바깥에는 텃밭 안의 세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지민은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기엔 피해자 리하는 아무렇지 않게 사는 듯했고 덮어 놓고 지내기엔 양심에 거리끼는 상황을 맞닥뜨렸다. ‘말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64,8)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기말고사 수행평가가 다가왔다. 지민의 마음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아른거렸다. 지민에게는 논리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따위의 말장난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행동의 문제’(65,6)였다. 사회 선생은 궤변이나 늘어놓는 것 같았다. “답이 없으니까 매번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걸 알기 위해서 배우는 거지. 사람의 일이란 게, 기계적으로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65,13)

[이야기 꿰매며] 누구에게나 못다 할 무언의 사연이 있어

2024년 03월 20일
여중생 은재가 까탈스레 행동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습니다.(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 최영희) 말 못 할 사연 말이죠. 자식뻘 사우에게 한글 좀 알려 달라 말하기까지 속으로 끙끙 앓은 찔레꽃 아주머니의 사연도 그렇습니다.(서울 사는 외계인, 이상건)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사연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연히 만난 리하가 알고 보니 내 가장 친한 친구의 피해자라는 사실 앞에 누구라도 할 말을 잃고 말 겁니다.(완벽한 사과는 없다, 김혜진) 진실을 마주하고 그저 도망갔더라면, 더는 이야기로, 우리 곁으로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진실을 말하지 않은 파렴치한 지민’ ‘그까짓 용서 않는 리하’라고 서로를 오해하고 말았을 겁니다.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목도해도(창밖의 아이들, 이선주) 견디기 어려운 폭력을 마주해도(싸우는 소년, 오문세) 다리가 벌벌 떨리는 건물 지붕 너머 밤방으로 기어간 호세처럼(안녕히 계세요, 아빠, 이경화) 용기를 내어 누군가의 사연을 물어봐야 할 때입니다. “이순정, 요즘 넌 어떠니…….”(열여덟 너의 존재감, 박수현)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마음 알기는 나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언제나 나 자신은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25시, 26시… 시간마저도 사들여 망가지는 사람들:『숲의 시간』

2024년 03월 18일
숲의 시간 김진나 지음 | 문학동네 | 192쪽 | 1만1000원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흠모할 수는 있으나 그 아름다움을 훔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아름다움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다. 욕망은 할 수 있으나 훔칠 수 없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가질 만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태계는 돈이면 모든 아름다움을 살 수 있다고 속삭인다. 자유와 사랑, 우정과 시간까지 모조리…. 그래, 모든 걸 돈으로 사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또 얼마나 편리하게 썩어 버릴까. 모든 존재에는 유통기한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도 정해진 시간이 있다. 정해진 시간을 무제한으로 만들려는 무모함이 돈의 존재와 인간의 욕구에서 출발한다. 이 책 ‘숲의 시간’에서 묘사된 도시 크룽을 보면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생태계로 직조된 크룽은 그 어떠한 공간 중에서도 기술집약적(16,2)이다. 누구든지 가진 자들의 주거지인 바탕 구역에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빈민들의 공간(17,2)을 따로 분리한 눈속임 도시일 뿐이다. 대부분은 젊은이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며 늙은이를 불안하고 게으르게 만든다. 도시는 점점 해 아래 잠식하지만 그 어떤 어둠보다도 뜨겁고 늪처럼 질척거린다. 망가진 도시에서 고장 나지 않은 사랑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망가진 도시의 망가진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빼앗으려 안달 나 있다. 따라서 늙은이들은 아름다움을 가지기 위해 젊은이의 젊음을 착취한다. 젊은이는 먹고 살아야 하므로 자신의 젊음을 값싼 노동력으로 내어 판다. 이들이 망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름다움을 욕망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생태계 때문이다. 이들은 분명히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조각품이나 사진, 노래, 공간에 의해 되살아나지 않는다. 오직 아름다움은 그 순간 빛을 발했다가 머지않아 사라질 뿐이다.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아름다움이 남길 바라는 욕망이 이들을 망가지게 만든 것이다. 그 아름다움이란 그리움이다. 다들 그때의 아름다움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말이다. 늙은이는 젊은이를 짓밟아서라도 그리워했고, 젊은이는 자신의 젊음을 허비해서라도 그리워했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밖에 사랑할 줄 몰랐다”(46,1) 애초에 크룽은 “동기와 욕구로 조직된 시스템”(55,9)이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자본주의로 직조된 세계다. 돈이 있는 자라도 그리움을 사들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야 했고 누군가의 노동력을 착취해야 했다. 젊은이는 값싼 노동력으로늙은이는 빈곤과 불안으로스스로 착취하는 도시 크룽  얼룩진 시간 정책욕망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삶조차 망가지고 허비하자끝없이 가난해지는 사람들크로노스社 “시간도

“그냥 사랑했을 뿐”… 썸머는 나쁜 년이었을까:「500일의 썸머」

2024년 03월 03일
500일의 썸머마크 웹 감독 | 95분 | 15세이상관람가 | 2009 그 애와 헤어지고부터 세상 모든 게 그 애로 보였다. 술 잘 쳐 먹으면서 못 마시는 척 내숭 떠는 리리코가 그랬고 음흉한 미소로 정치질이나 일삼는 직장 동료가 그리 보였으며 연애 사연에서 남친을 질질 끌고 가는 당찬 여자애가 그랬다. 애증의 감정이 깊어진 끝자락 실장님의 얼굴에서마저 그 애를 보았다. 이 영화도 그랬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애가 생각났다. ‘bitch’라는 단어까지도 모조리 닮은 모니터 앞에서 평행세계를 본 것 같았다. 톰이 썸머를 바라보는 콩깍지까지도. “아름다운 미소, 긴 머리카락, 귀여운 무릎, 목에 있는 하트 모양 점, 섹시하게 입술을 핥는 모습까지, 귀여운 웃음소리, 침대에 잠든 모습까지도, 그녀를 생각하면서 듣는 노래도, 그녀가 주는 모든 느낌, 모든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한 마디로…. 세상 사는 맛이 나요.”(13:37)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썸머에게 톰은 화가 난 걸까. “그녀를 증오해. 울퉁불퉁한 치아. 촌스러운 머리. 튀어나온 무릎. 징그러운 바퀴벌레 같은 점. 더럽게 입술을 핥아대고. 천박한 웃음도 싫어. 이 노래도 싫어!”(57:36) 그럼에도 썸머와 닮은 여자라면 누구라도 끌린다. 허나 더는 발견할 수 없는 썸머에 좌절하는 톰. 서로 좋아하던 순간에 멈춰버린 시간, 톰은 홀로 서 있는다. 그래서 화가 난다. 혼자만 운명의 시간에 서 있다는 사실에. 주인공 톰의 찌질한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고 성장해가는 어텀과의 첫 만남 앞에선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이제 썸머를 증오하지 않는다. 그가 나쁜 년이든 아니든 간에 더는 내 운명과는 무관한 사람이니까. 그저 스쳐지나간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니까. 이 모든 아픔을 겪고 마주한 새로운 계절, 500일의 끝에는 새로운 1일이 다가오는 사실에 주목했다. “추운 겨울 끝을 지나/다시 봄날이 올 때까지/꽃 피울 때까지/그곳에 좀 더 머물러줘”(방탄소년단, 봄날, 2017) 마침내 견디고 견디어내 만난

그저 귀엽고 섹시한, 권정열 너란 남자… [10CM 2024 Encore Concert ‘=10’ 후기]

2024년 03월 02일
“조금만 더 오면 안 돼/어제보다도 따뜻하게/나는 가만히 있을 게 아무 말 없이/You’re my everything everything everything” 첫 멜로디 한 소절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10CM(본명 권정열)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핸드볼경기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여자친구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멜로디, 뜨거운 체온이 전달 됐다. 되게 깊숙한 바늘이 가슴을 찌르는 듯 감동이 스며들었다. 한 달 만에 막을 올린 10CM 앵콜콘서트 ‘=10’을 가게 된 건 순전히 여자친구 덕분이다. 달달한 보이스 따뜻한 공연마냥 귀여운 줄만 알았더니팬들 마음 휘어잡고 뛴 무대 가슴 뛰게 부르는 이 노래친절한 노래 자막과 타이포꼼꼼한 소품과 선곡에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

2023년 05월 20일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 밥 길 지음 | 민구홍 번역 | 워크룸프레스 | 176쪽 | 2만2000원 예쁘다고 다 잘한 디자인일 순 없다. 눈길 이끄는 디자인이 상품성도 강한 것처럼 예쁜 디자인은 필요하다. 허나 정지 표시의 표지판에 꽃 그림이 화려하게 들어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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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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