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셀라 시론 - Page 3

[에셀라 시론] 가난 선생님, 이제 울지 마세요

2025년 07월 17일
잔나비의 정규 4집 Sound of Music pt.1 수록곡 ‘무지개’에는 비장한 제목이 붙어 있다. ‘모든 소년 소녀들2’. 그 뮤직비디오에서 나는 서글픈 직감에 사로잡혔다. 바닥에 쓰러진 채 날지 못하는, 새의 형상을 한 인간. 그리고 멀찍이서 말끔한 정장을 입은 이들이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망원경인지 요지경인지 알 수 없는 쌍안경을 들고, 그들은 하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코 날 수 없는 이의 날갯짓은 외로워 보였다. 정장을 입은 다수의 사람들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그 몸짓은 이룰 수 없는 ‘시궁창에서 별 바라보기’ 같았다. ‘무지개’는 앞선 곡 ‘모든 소년 소녀들 1 : 버드맨’의 연작처럼 들린다. 두 개의 뮤비가 말없이 이어지며 메시지를 완성하는 것이다. 말끔한 교복을 입고 졸업 사진을 찍는 소녀와 소년들. 미래를 약속받은 듯한 모습으로 사회에 나아가는 희망에 찬 장면들. 그러나 제목이 가리키듯, 버드맨은 아기새를 의미한다. 갓날개를 펴고 꿈을 향해 발버둥치는 존재. 그리고 그 꿈은 결국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저 너머의 하늘만 바라보게 되는 운명으로 귀결된다. 이룰 수 없는 꿈, 닿을 수 없는 이상. 버드맨은 그렇게 다수가 되는 법을 배운다.

[에셀라 시론] 파수꾼의 마지막 등불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가영이 누나는 달라진 게 하나 없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 날 만난 게 정말 반가워서 웃는 미소는 여전히 행복하게 만들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지금 여기’ 꿋꿋하게 서 있는 당찬 누나의 모습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달라진 외형 하나 있다면 양손 꽉 쥔 두 아이. 이제는 아이 엄마라는 게 믿기지 않을 나이다. 누나를 다시 만난 이유는 단순했다. 누나의 시선에서 바라본 과거의 내 모습이 궁금했다. 솔직히 말해 학창 시절 누나에게 빚진 마음은 둘째였다. 누나는 나와 10년 전 새능력교회를 함께 다닌 교우였다. 어렸을 시절 나의 민낯을 그대로 본 사람인 것이다. 기록가로서 눈망울이 빛나는 이유였다. 누나를 위해 나는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었다. 점심을 대접하는 일과 키즈카페 비용을 내준 일, 누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누나는 예민하고 까다로웠던 나의 학창 시절을 서슴없이 나열했다. “그때는 서운했더라” “그때는 미웠더라” “그때는 마음 아팠더라” 늘 누나에게 상처 준 일은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10년 지나서도 사과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련하고도 좋은 기억으로 남은 고맙기만 한 누나의 기억 속에 나는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사는 고등학생’이었나 보다. 그러다 달라지지 않은 누나의 성정(性情)을 발견했다. 잡초 같은 누나의 강인한 생명력을 발견한 것이다.

[에셀라 시론] 태초에 개발자가 doctype를 선언하시니라

2020년 01월 22일
드디어 신 죽음의 시대를 벗어나려는 걸까. 신의 명령에 주목한 시대를 신 죽음의 시대 이전이라 정의한다면. 신 명령이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함을 인식한 시대를 신 죽음의 시대라 명명할 수 있다. 신 죽음의 시대는 주체성의 개념조차 존재할 수 없는 세계다. 세계라는 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시대라는 점에서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는다. 오랜 시간 슬픔과 절망 속에 신이 다시 살아나기를 희망했건만. 신의 부활은 요원하고 세상은 바쁘게도 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신 죽음을 가리킨다. 아직도 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지만. 죽지 않았다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신 죽음의 시대라는 3년의 터널을 벗어난다. 그래서 마련한 새로운 이야기가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이다.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은 더는 신학과 철학, 존재론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말은 신학과 철학, 존재론이 독점한 시대의 끝에 마주했다는 의미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개신교회 상황은 사회에서 바라보기 민망할 만큼 구식이다. 존재론이 지시하지 못하는 영역에 발을 담그고 스스로의 존재를 다 고민했다는 자만심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신학과 철학, 존재론에 대응해 신 죽음의 시대 이후 세계에 도달하자 신세계를 경험했다.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세계는 정답에 메이지 않아도 좋다. 옳고 그름은 대화를 통해 타협할 수 있고 협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답이 없는 건 아니다. 무지개에 도라에몽 넣었다고 그게 올바른 과제가 아니듯. 신의 명령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바로 대화와 소통이다. 자아-타자-세계라는 존재에 하느님이 낄 자리도 없다. 이곳은 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붕괴된 세계다. 디자이너가 된 현대인은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고 만들어낸다.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으며 다양한 세계 속에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며 살아간다. “정답이 없다. 다만 나의 의견을 참고하라”는 조언뿐이다. 그 세계는 선악과 이후도 없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세우고 언약을 세운 후.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이 세계를 구한다는 흔하디흔한 내러티브가 없다는 말이다. 소박한 ‘캔버스’ ‘도큐먼트’ ‘페이지’라 이름 지은 백지장을 펼치면, 직접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 여기에는 구식 내러티브도, 신식 내러티브도 없다.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우리들 이야기를 담아 낼 수 있다. 구원도, 십자가도, 칼빈도 없다.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세계엔 경이로움이 가득하다. 새 레이어에 같은 소녀를 복제하고 브러쉬를 가져다 댄 채 노란색을 불어 넣고 오퍼시티(opacity) 값을 낮춰주면 따뜻한 불빛이란 생명력이 탄생한다. 누군가는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해 사람을 창조해냈다고 붉히지만,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복제된 사진을 보며 이를 작품이라 감탄하고, 그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며 공감한다. 파란 풀잎 바라보며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짝지어 부른다 한들, 이 세계의 따뜻함과 비교하기 어렵다. 이 조차 세상적 삶이고, 신자유주의 병폐라는 고상한 용어를 쓴다한들 다가오는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세계를 부정하기 힘들다. 어차피 세상은 달라지고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마귀·사탄·귀신의 음모라 해도 소용없다. 신 죽음의 시대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더욱 이 세계가 경이로 다가오기보다 마귀·사탄·귀신의 굴레에 씌운 세속적 세상이란 불쾌한 감정만 남을 것이다. 이제 신이 독점하던 신 죽음의 시대조차 끝이 났다. 신 죽음의 시대를 벗어난 이들은 블락캣(bracket)을 열어 웹 사이트를 구현한다. 포토샵을 열어 사진을 보정한다. 일러스트를 열어 미지의 세계를 그린다. 인디자인을 통해 기억과 미래를 담아낸다. 프리미어를 열어 과거를 새롭게 나열한다. 새로운 시대,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나는 ‘개시(開示)의 세계’라 이름 짓고 싶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에셀라 시론] 최진리를 기억하며,

2019년 10월 14일
걸그룹을 알기도 훨씬 전이었다. 지면 신문에 실린 모습을 바라보니 흐뭇했던 이유엔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를 느꼈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면 조신해야 할 것 아닌가, 아이돌이면 자중해야 할 것 아닌가, 공인이라면 적당히 할 것 아닌가.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과감히 자신을 내어 던진 모습에 저항하는 여자로 보였다. 응원해 마지않은 시점도 그 때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신학을 전공으로 두고 있음에도 후배들이 “왜 좋아하냐”고 물을 때 나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이 기사로 보였다. 기사에는 그의 감은 눈, 그의 옆구리, 그의 가벼운 옷차림이 담겨 있었다. ‘왜 논란의 아이콘이 됐나’ 질문은 보이지 않았고 여성이자 혼자로 남아 ‘세상을 등지고 맞선 자’만이 보였다. 걸그룹이었을 땐, 느껴지지 못한. 개인으로, 단독자로 남아서자 비로소 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이 논란의 손가락을 짚고 있던 그 때. 평생 알아가도 이해하지 못할 여자를 두고 세상은 마음대로 재단해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네가 그럴 자격은 있니? 네가 추해 보이지 않니? 네가 어그로
소랑 2026년 11월 5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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