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셀라 시론 - Page 2

[에셀라 시론] 가난 선생님, 이제 울지 마세요

2025년 07월 17일
잔나비의 정규 4집 Sound of Music pt.1 수록곡 ‘무지개’에는 비장한 제목이 붙어 있다. ‘모든 소년 소녀들2’. 그 뮤직비디오에서 나는 서글픈 직감에 사로잡혔다. 바닥에 쓰러진 채 날지 못하는, 새의 형상을 한 인간. 그리고 멀찍이서 말끔한 정장을 입은 이들이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망원경인지 요지경인지 알 수 없는 쌍안경을 들고, 그들은 하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코 날 수 없는 이의 날갯짓은 외로워 보였다. 정장을 입은 다수의 사람들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그 몸짓은 이룰 수 없는 ‘시궁창에서 별 바라보기’ 같았다. ‘무지개’는 앞선 곡 ‘모든 소년 소녀들 1 : 버드맨’의 연작처럼 들린다. 두 개의 뮤비가 말없이 이어지며 메시지를 완성하는 것이다. 말끔한 교복을 입고 졸업 사진을 찍는 소녀와 소년들. 미래를 약속받은 듯한 모습으로 사회에 나아가는 희망에 찬 장면들. 그러나 제목이 가리키듯, 버드맨은 아기새를 의미한다. 갓날개를 펴고 꿈을 향해 발버둥치는 존재. 그리고 그 꿈은 결국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저 너머의 하늘만 바라보게 되는 운명으로 귀결된다. 이룰 수 없는 꿈, 닿을 수 없는 이상. 버드맨은 그렇게 다수가 되는 법을 배운다.

[에셀라 시론] 두 번의 실패와 좌절 앞에서

두 차례 실패를 경험하고 두 번의 좌절을 맞이해서야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변화라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 엄청난 용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얻는 선물도, 마음만 먹는다고 주어질 일시적 단호함도 아니다. 그저 순간의 선택으로 보이지만 인생 항로의 몇 도를 틀만한 강력하고 영향력을 가지는 엄청난 용기를 두 번의 좌절을 맞아서도 발휘하지 못했다. 바로 ‘나는 낡았구나’라고 생각한 끝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이유다. 전통적이고 당연했던 공간에서 벗어나는 순간 경험한 감정인 해방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현실이란 공간에 이르러서야, 해방 너머 풍경을 직시했다. ‘나는 낡았구나’ 좌절 앞에 변화의 필요를 깨달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코로나를 겪으며 사람들이 디지털 담론장에 몰려든다. 왼편에서는 철학자가 눈앞에 서 있는 존재를 가리켰고 오른편엔 세상 돌아가는 작동 방식을 기술자가 묘사한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강연이 연잇자 댓글에는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을 간증하듯 써 내려간다. 마이크를 들고서 발언권을 얻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인생철학을 설파하는 이를 관찰했다. 헬조선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만의 지식을 습득하셔야 한다고 가르쳤고, 댓글에는 동감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런 자신만의 인생철학을 획득하고 하나 둘 실천해가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 둘 지나쳤다. 철학자가 아니어도 살면서 경험한 진리 조각을 덧대어 자신만의 담론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가르치던 핵심은 주체적 삶이었다. 생각보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댓글이 많았다. 밤잠을 설치고서 입력한 ‘자는 방법’. 연애하고 싶어서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 있을 때’ 우울하고 불안해서 ‘우울할 때 듣는 노래’ 혹시나 경력이 없어도 괜찮을지 싶어서 ‘서른 취업’ 10년 전 ‘베토벤 바이러스’와 10년 후 ‘로스쿨’ 속 김명민. 가슴이 먹먹했다. 전례 없는 상황과 뜻밖의 여정에 헤매는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 게으른 탓이 아니다. 그저 기회를 준비할 뿐이다. 희망을 얻었다는 고백과 위안을 받았다는 꾸며내려야 꾸며낼 수 없는 담담한 문체 속에 오늘도 비경제활동인구 1,686만 명(2020.11.04)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닌다. 꼰대와 불편한 감정의 사건 사고 댓글창을 보지 않은지 오래다. 그러나 교훈과 감동을 주는 동영상 하단에는 즐거운 댓글이 연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임은 여전했다. 즐거운 댓글들 사이에서 즐거운 한 가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코로나 블루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하는 세계 속의 이들을 가로 막았다. 보수화가 대표적이다. 보수주의가 나쁜 게 아니다. 마땅히 바뀌어야 함에도 바꾸지 않으려는 반동과 다를 바 없는 보수화가 문제다. 청년 세대에까지 바꾸지 않으려는, 기어이 관성 속에 살려는 분위기가 흩날린다. 따라서 청년의 시간에 소확행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오늘의 행복을 찾는 광경이 서글프다. 즐거운 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교훈과 감동은 때로 살아갈 원동력이 될지언정 해결할 방도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나는 낡았구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그 밤저녁을 두 번이나 경험해서야, 두 번째로 찾아온 좌절 앞에 비로소 그 엄청난 용기의 실마리를 찾아내었다. 좌절 속에서 침대에 누워 울기만 하는 아이 앞에 무어라 말해 줄지를 먼저 생각했다. 당연히 “알아. 괜찮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말했을 것이다. “좀 잘래? 이따가 깨워줄게”라고. 당연하다. 지금은 슬퍼해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시간표엔 오늘의 좌절이 당연하다기보다, 차근히 진행해야 할 과목들을 미루고, 지우고, 다시 써서 붙인 ‘우는 시간’, ‘좌절 앞에 서는 시간’이기에 ‘울지 마라, 원래 인생은 고단한 거란다’ 따위의 하등 쓸모없는 말 대신 잠시간 잠들고 깨기까지 기다려줄 수 있지 않을까. 그 누워 있는 사람이 나였다면 내가 무어라 말했을까. 당연히 “알아. 괜찮아.”로 시작하는 앞서 나열한 말들 그대로 말해주지 않았을까. 내가 나를 위로하는 광경을 상상만 했을 뿐인데, 나와 내 관계가 돈독해졌음을 느꼈다. 뜻밖에도

[에셀라 시론] 51%

2021년 09월 01일
가영이 누나에게 탈출을 권했어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1층 작은 예배실은 토요일 저녁이면 컴컴했다. 한편에 들어찬 사무실 미닫이 문 열고서 바라본 누나의 뒷모습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웃음이 많았고 미소가 은은했다. 한 숨을 쉬어가며 마치지 못한 그 일을 끝내 내 앞에 가져온 저녁이 떠오른 건. 그 일을 한 집사와 학생, 셋이서 만들어갈 무렵이다. 교회를 나오지 않으며 저절로 승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기억을 더듬었다. 자격증 시험을 위해서 주일 예배를 빠져도 되겠냐던 물음에 하나님 일이 더 중요하지 않겠냐던 대답과, 그 자리 떠난 누나의 온기도 사라지기 전 목사의 지껄이던 “쟤는 돈을 너무 좋아해” 한 마디는 지금도 황당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한심한 교회는 지금에서야 리빌드(rebuild) 운동을 펼치는 중이다. 웃기는 소리다. 내 사람도 못 챙겨서 뿔뿔이 흩어진 그 교회가 청년들 데려 온다고 티셔츠나 만들어서 찬양 집회 따위나 열고 있으니. 있을 때도 못 챙겨준 당신의 교회가 교회 밖 젊은이를 끌어나 올 수 있을는지. 기막힌 건 설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사람도 성숙해 간다. 그러나 이 교회 목사는 격(格)이 다르다. 성숙치 않은 퇴행적 단어들을 내뱉는다. 이슬람이 어쩌고 동성애가 저쩌고, 대면 예배가 안 되니 여의도 순복음 저 부지 팔아 2000억 차익 본 이야기나 지껄인다. 교인 수 300명도 안 되는 교회가 80만 대형교회 손가락질이다. 크기 얘기가 아니다. 한다는 설교가 증오의 정치나 작동시키며 말세와 소수자 탄압, 교회 생활 강요로 점철돼 프로파간다만도 못한 웅변이나 내걸고 있으니 기막힐 따름이다. 이 교회의 문법은 좆소라 불리는 부실기업과 다르지 않는다. 함께 성장한다는 이유로 되도 않는 희망, 미래, 천국, 열정, 성령충만 단어를 성경구절 명언처럼 섞으며 인재처럼 대우한다. 그러나 인력이 부족해 사람을 갈아 넣는다. 사람이 없으므로 모든 일이 주먹구구 이뤄진다. 사수도 없으므로 인수인계를 기대하지 말자. 일요일도 나와야 한다. 토요일도 요구한다. 급성장 시절 화려한 영광에 취한 채 그때의 열정을 교인들이 내보이길 바란다. 너희는 죄인이고 회개해야 산다며 가스라이팅을 진행한다. 그러다 교회를 옮기면 언급 금지 대상자가 된다. 심하면 신천지를 앞세우며 지옥에 갈 수 있다고 겁박한다. 꼬박꼬박 십일조를 내야 한다, 교회에. 좆소는 월급이라도 챙겨주지만 이 교회는 봉사라는 명목으로 한 푼도 챙겨주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마땅히 해야 할 봉사라며 ‘사역’이란 단어로 얼버무린다. 그런 교회를 누가 다니고 싶겠나. 탈출도 지능 순이라지 않은가. 통계청이 발표한 2019 사망원인통계에는 믿기 어려운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 제목 51%는 20대 사망 원인인 고의적 자해를 의미한다. 자살이란 단어 말이다. 헬조선이 무상하다. 더는 내려갈 곳 없어 이 세상을 떠나는 슬픈 청년들을 생각한다. 망할 좆소 욕지거리 내뱉으며 추노한다. 도무지 1% 되지 못한 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숫자는 생각보다 강하다. 어른들은 숫자에 약하다. 생산가능인구가 떨어지고 학령인구가 줄어들자 대학들이 벌벌 떤다. 아직까지는 숫자로 내세울 가짓수가 많을 테니 피부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크게 잃은 건 없을 테니 리빌드니 부흥이니 헛소리 할 여유는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리빌드 운동을 제창하던 눈망울엔 불안이 서려 있었다. 나와 같은 청년들이 없었다면 그 목사는 리빌드 운동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떠나간 청년들 숫자가 목사를 움직였다. 더 이상 청년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 사회생활 가르치던 어른들 목 주위가 서늘하다. 나이 들어 고독사하는 어른들이 많아졌다. 청년의 때에는 누구든지 연약하니 강해져야 하는 건 맞는 소리다. 사회생활 앞세우며 노동 착취하는 철없는 어른들이 문제일 뿐이다. 그런 어른들 혼내줄 방법은 그 공간을 벗어나는 일에서 출발한다. 태극기를 빙자해 정치권을 팬클럽 따위로 전락시킨 인간들을 쫓아내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지도자를 세우는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정치를 몰라도 괜찮다. 하나 둘 배워가면 된다. 앞으로도 모르면 나쁜 어른들을 답습해 갈 뿐이다. 더러운 어른들 문법을 배우는 이유도 앞으로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어른들은 순진한 청년들을 꼬드긴다. 가스라이팅도 이 단락에서 시도한다. 결국은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으므로, 구조를 뒤엎자는 얘기다. 리빌드 운동은 1123 운동처럼 실패할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면 콘셉트도 애매한 그런 중소형 교회부터 무너질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목사들의 걱정에도

[에셀라 시론] 보이지 않는 나라를 꿈꾼다

2021년 08월 07일
박원순과 나경원이 맞붙던 시절의 이야기다. 종북(從北) 단체와 친밀하게 지낸다는 박원순 후보의 일설을 믿고 순진한 마음으로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의 답변은 간단했다. 정치는 단순한 이념으로 보는 게 아니라고. 이념으로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새로운 눈이 뜨이자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왜곡된 정치의 시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앙의 끝으로 달려가던 와중에 붙잡은 정치 이념이 보수적 깨시민으로 만든 후였다. 대학을 입학했다. 생각보다 ‘보이지 않는 나라’는 많았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가 대표적이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하느님 나라를 꿈꾼다. 보수적 성향의 시민도 보이지 않는 나라를 꿈꾼다. 대깨문이 박멸되는 나라. 진보적 성향의 시민도 다를 바 없다. 토착 왜구가 청산된 나라. 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우는 사회와 다른, 현실 세계에 입문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나라를 경험한다. 사회생활 단어도 ‘보이지 않는 나라’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사용한다. 슬프게도 코로나 파동을 겪은 이 시점에서도. 눈물 흘리지 않고서는 맨 눈으로 보기 힘든 ‘보이지 않는 나라’가 스며든다. 죽음. 고독사가 휩쓸고 지나간 집에서 청소하던 일꾼을 마주했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살겠구나’ 그리 생각했다. 현실은 달랐다. 보이지 않는 노동의 짐,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 좋소에서 또 좋소로 이직해야 하는 절망. 어른이 되고서야 자기 몸 하나 건재하기 힘겨운 대한민국이란 보이지 않는 나라를 보았다. 2020년에 발표한 통계청 사망원인통계는 20대 사망원인을 고의적 자해 51%를 꼽는다. 노인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한다. 같은 자료에서 고의적 자해는 50대부터 급증한다. 미친 나라다. 보이지 않는 죽음의 나라를 선택한다. 도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사람, 두 사람 떨어져 나가는 광경을 지켜만 보던 개개인이 무엇으로 바깥 경계로 내몰린 사람들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박원순과 나경원의 사투를 보면서 나경원이 이기는 것만이 이 나라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믿었던 것처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를 운운하며 보이지 않는 나라를 꿈꾸는 이들도 그저 보이는 대로 손을 뻗는다. 언젠가 보이지 않은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울컥했다. 저 사람은 오늘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편안하게 쉴 수 있을까. 저 부장은 돌아가서 혼자 무슨 반찬을 해먹을지. 팀장은 한 시간도 넘는 퇴근길 버스 안에서 쪽잠이라도 잘 수 있을지. 보이지 않는 노동의 나라 저 끝자락을 상상할 때마다 눈물이 차오른다. 하지만 눈물은 어김없이 분노로 바뀐다. 퇴근하고 내내 욕을 내뱉었다. 속이 타오를 때까지 욕을 했다.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비명에 스피커까지 틀어가며 제 할 말만 떠드는 인간들을 때문이다. 비명이라 말했다. 정치는 나약한 이들을 위해서 작동해야 하건만. 대깨문과 토착왜구 사이에서 성실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명이 양쪽 스피커에서 깨끗하게 사라진다. 계급으로 전락한 이들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나라’가 된다. 신학자 김진호는 저서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에서 ‘그 바깥’ 단어로 설명을 이어간다. 어느 누구도 그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나라로 향한다 하더라도. 왜곡된 정치관이 사라진 순간은 조선일보를 절독한 시점이 아니었다. 조선일보가 비로소 조선일보로 보일 때다. 보이지 않는 나라, 저 조선일보가 판을 짜고 프레임을 섬세하게 엮어내던 장인정신 깨닫고서 현실을 알아차렸다. 일찍이 보이지 않는 나라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 듯했다. 그런 어른은 서로를 ‘친구’라고 부른다. 높고 낮음을 구분하지 않으며, 동등한 인간으로 대한다. 인생 경험 가르치는 인간들의 맥락과 결이 다르다. 더불어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나라 속 친구는 서로가 서로를 끌어다주는 독특한 관계를 의미했다. 친구라 부르던 두 어른은 묵묵히 노동자로 하루를 살아간다. 서울대만으로도 이뤄질 수 없는 나라.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도 이뤄낼 수 없는 나라. 없는 셈 치더라도 숨길 수 없는 나라. 그저 파란나라 꿈꾸던 혜은이 목소리로 상상하던 나라. 정치인이, 종교인이 만들어 낸 허상의 보이지 않는 나라를 빗금으로 지우고. 나약한 자를 친구로 삼고 보이지 않는 나라를 살아가는 이들의 우정으로 다시 써 넣어 그려본다.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나라는 이념의 경도된 시각, 대깨문과 토착왜구라는 단어들 사이에서 이뤄질 수 없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을 외면하고

[에셀라 시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2021년 07월 12일
A를 물었으면 A에 대해 말하는 게 정상이다. 대학 이름을 묻지 않는 건 하등 필요없는 논점으로 이어지거나 대화의 핑퐁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대학 이름 대신 전공을 묻는 건 소통에서 실리적이다. 어떤 일을 하는지, 무슨 일이 가능한지 묻는 게 상대방의 관심사를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을 준다. 나아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살아온 배경을 묻게 되고 자연스레 대학 이름이 나오며 환경을 가늠한다. 하등 쓸데없는 소득 수준, 자가용은 가지고 있는지, 원룸에서 사는지 투룸에서 사는지를 묻지 않는다. 필요 없으므로 묻지 않을 뿐이다. 여럿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아도 단시간 안에 상대를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편리한 방법이 시간의 검증뿐이지 않을까.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시간의 검증만이 가능한 판단 말이다. 매번 시험으로 검증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질문이 적합한지, 질문은 어떻게 준비할지. 대답하더라도 평가가 올바른지 가늠할 길이 없다. 사람의 능력과 성향, 특질을 이해하는 작업이 가능할지 모른다. 사람들을 줄로 세워두고 점수로 매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부모가 개입했는지의 여부, 하다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는지 같은 드러나지 않은 매개들을 합산해서 평가해야 할지, 순수한 개인의 가능성만을 판단해야 할지 기준을 정한다고 하더라도 판단하기 매우 어렵다. 불가능에 가깝다. 표면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학력 수준이나 수능 점수가 판단 방법이 될지 모르나, 세상은 수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정치 분과가 그렇다. 정치는 누가 더 수능에서 고득점을 얻었는지에 따라 잘하고 못하고가 결정되지 않는다. 때로는 경험과 입담이 필요한 외교가 있고, 학자들의 고언이 절실한 경제가 있기 마련이다.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의 총합인 이 사회에서 권력의 분배를 위해 존재하는 정치 영역이란 서너 가지도 아닌, 수십만 가지의 문제들이 얽히고설켜있다. 대학 출신이란 정보도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 서면 누구든지 그리 묻는다. 대학 대신 전공을, 전공 대신 가능한 일을. 내뱉은 말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가다듬고 말 그대로 현실의 언어를 구사하는지 확인한다. 많은 정보를 읽어야 하고, 판단해야 하며, 대입해야 한다. 복합적이고 어려운 과정이다. 따라서 경험은 시간이란 물리 법칙이 작동하는 게 아닐까. 많은 사람들을 경험하여 실패라는 데이터를 축적해 미리 대비하는 것. 물론 경험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경험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경험이 무조건 옳은 게 아니라 경험에서 얻어지는 물리 법칙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현실 앞에 검증의 도구는 단단해진다. 공정한 룰은 이처럼 현실의 벽이라는 허상 앞에 한낱 무너질 모래성에 불과하다. 공정한 룰 자체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시험을 치를 수 없다. 인기 투표와 능력주의는 하등 관계가 없다. 정치인으로 적격인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시험 출제자는 신이라는 말인가. 애초에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걸, 수치화로 평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건 근대적 해결책일 뿐이다. 전체주의도 불가능한 인간들의 욕망에서 싹 텄다. 사랑도 매번 시험할 수 없다. 상대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테스트하는 줄 안다면 얼마나 불쾌해 할까. 그래서 신도 인간을 시험하지 않는다(야고 1,13). 인간을

[에셀라 시론] 슬픔을 거슬러 네 얼굴 쓰다듬고서

2021년 05월 05일
이제 곧 청력을 잃는다던 상황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나무 바닥에 엎드린다. 열 두 살에 청력을 잃은 에버린 글레니(Evelyn Glennie)처럼 듣겠노라 다시금 들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루미는 건우의 솔직한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던 루미의 미소에는 슬픔도 있었고 희미한 즐거움과 애틋한 감정이 있었다. 진짜 얘기 좀 해보라는 말에 그 때 미워서 내친 게 아닌 것을 알지 않느냐던 건우의 음성 언어를 듣지 못해도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사랑은 음성 언어라는 한계를 뚫고 상대의 마음에 가닿는다. 늦가을임에도 냉기를 만져가며 오감을 느끼려던 루미의 슬픔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도처에 기온이 싸늘한 시대에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전시되고 소비된다. 계량할 수 없고 측정하기 불가능한 것들조차 숫자로 세어진다. 사랑하면 끝까지 갈 수 있다던 말조차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사랑을 어떻게 숫자로 셀 수 있고 아끼는 마음을 글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알면서도 넘어가는 무책임에 어쩔 수 없다고들 말한다. 어쩔 수 없어서 해고하는 것이고 어쩔 수 없어서 버리는 거고, 어쩔 수 없으니 잊는 거라고. 이별은 다음의 만남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어막이라고. 사회 갈등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돈 벌면서도 책임은 개인에게로 돌리는 기막힌 상황을 누가 버텨 낼 수 있을까. 숫자로 셀 수 있으면서도 현실의 벽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숫자로 세고만 정의와 사랑, 미래라는 가치가 공중분해 된다. 한 순간에 벼락거지가 되고도 또 하나 둘 숫자를 세어가며 쌓아 올린다. 일찍이 신 죽음의 시대를 경험한 본 회퍼를 소환하여 저 놈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지껄인다. 신의 죽음에조차 다가가본 일 없는 인간들이 기독교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를 걱정한다. 행동으로 드러난 본심은 교회가 없어지면 무엇으로 벌어먹고 살지를 궁리하는 것들뿐이다. 예수를 시체팔이하여 돈 버는 인간들일수록 코로나에 강한 척한다. 한낱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인간들이면서……. 이런 사람들은 외로움의 감정을 느껴본 일이 없는 자다. 외로우면 저렇게 살 수 없다. 정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은 이를 이용해 먹지를 않는다. 누군가를 적으로 세워두고 허수아비 논법으로 광기에 젖지를 않는다. 어떻게 부모의 상을 치루면서 지 할 일을 다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상주가 죽은 부모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술주정한단 말인가. 사랑하면 그 사람이 한 말의 의미를 곱씹고, 되새김질한다. 죽은 이의 기억과 말을 되풀이하며 슬픔을 곱씹는다. 너와 지내던 날들, 네가 했던 말들, 행동, 웃음, 냄새. 이걸 어떻게 언어로 말로써 표현할 수 있을까. 제자들은 하느님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뒤늦게 예수의 흔적을 느끼며 사랑을 깨달아간 제자의 공동체가 문자언어로 그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겠는가. 건우의 생각과 마음에는 루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청력이 살아있을 때조차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알았던 루미는 건우의 싫다고 거부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맨발로 시린 바닥에 엎드리지 않아도 이미 알았다.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도 서술하기 어려운 언어를 알고 있었다. 오늘도 죽은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생각난다. 뒤이은 수많은 박탈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난다. 생각보다 세상은 밝지 않다. 얼굴도 모르는 구조자 생각하며 죽음을 대비하는 시대다. 친구와 이웃의 죽음에도 책임지지 못하는 시대라서 슬프다.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이고 짐으로 떠넘겨진다. 시린 바닥은 루미뿐만이 아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린 바닥 민도의 온도는 당연하다. 민도를 비난할 수 없다. 그래서 약한 메시아를 기다린다. 혼자서 질 수 없는 십자가를 나누어진다면 가벼워질 수 있는 것처럼. 슬픔은 나누어 절감하기 힘들 테지만 짐이라도 나누어 질 수는 있지 않겠냐고. 그래서 사랑의 가치를 말한다. 돈으로, 상품으로, 비교로 살 수 없는 네 얼굴 네 입술. 희생하지 않아도 괜찮고 실패해서 넘어져도 괜찮다, 울지 말고 먹으면서 기운차리라고, 대신 그 짐 가벼우니까 건네 달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사랑해라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거 잘 아니까, 그 말 대신 들어주겠다던 말 한 마디면 되겠냐고. 웃는 얼굴조차 믿을 수 없는 오늘의 슬픔에 사람들은 훗날 루미와 건우가 만날 거라고 믿는다. 분명히 청력을 상실해 듣지 못함에도 사람들은 루미의 청력보다 보이지 않는 사랑에 집중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건우가 루미를 만났을까. 루미라면 청력을 잃어도 웃으며 꿋꿋하게 살아가지는 않았을까. 폭풍을 견뎌내고 살아줘서 고맙다며 루미의 그 얼굴 쓰다듬고서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신의 죽음과 함께 상실한 사랑의 가치를 보이지 않는 곳에다가 남겨놓는다. 신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실의 슬픔을 경험해야 사랑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슬프다. 신의 죽음보다 더.

[에셀라 시론] 든든함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어

2021년 02월 28일
자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이유가 단지 내 생일에 몸살감기 걸려 한 발자국 내딛지 못할 때 집까지 찾아와 부축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네. 점심시간 방송실에 찾아갈 때마다 멋있게 일하던 성실함도, 그저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자정까지 컨테이너 자네 방에서 대화한 그 밤도, 고입고사 한 시름 놓았다고 먼저 집에 돌아가 서운했던 이유도, 자고 있는 선욱 깨어나거든 친구들과 박수치며 당황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던 정겨운 풍경도. 느껴지던 든든함이 못내 겨워 잊을 수 없었기 때문만도 아니라네. 과거 모든 기억들이 실오라기 남김없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자네에게 느껴지는 든든함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네. 모든 전통적인 것들이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무너지지

[에셀라 시론] 너라는 관성에서 벗어난다

2021년 02월 12일
켜켜이 쌓인 십여 년 전 써 놓은 글을 읽다 보면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자신만의 언어로 작성한 딱딱한 문체에 주목하곤 한다. 학창시절, 사람들과 일상을 주제로 한 대화보다 꽃과 나뭇잎, 하늘 구름 바라보며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일들이 더 익숙했다. 일상 언어를 습득하지 못할 만큼 집단과 공동체, 학교라는 공간과 교회의 장소에서 벗어나 고독함을 즐겼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목격한 아이히만의 상투적 언어처럼 일상 언어와 자신의 언어로 나누어 사용하던 시대였다. 유행어와 여자 아이돌에 관심조차 없어서 성경과 기도가 익숙해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고등학교 1학년. 0교시 수업 전부터 정독한 성경을 9교시 마치는 시간까지 틈틈이 읽었다. 빈 틈, 빈 공간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때로는 점심시간, 산책을 나서며 침묵의 공간에 머물러 무엇이든 관찰했지만, 캄캄한 교실 책상에 앉아서 뮤직비디오 보는 것만큼 낭비가 또 있을까 두 눈 감고 기도하듯 되뇌었다. 아이들이 허벅지와 가슴에 열광하며 다음 영상 재촉하던 모습에서 마치 외부인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聖)과 속(俗)의 이분화 속에서 신앙의 세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끌어당긴 신앙의 관성(慣性)이 외부인으로 만들었다. 고독한 연습을 이 무렵 시작했다. 미처 준비 못한 교과서도 반성의 여지라 생각하고 없는 상태로 지내보기로 했다. 대학교에서 신문을 읽으며 혼밥하던 습관도 이때의 고독한 연습 덕분이다. 빈 교실 어두워져 방언으로 기도했고 신기하듯 코딱지를 혀 끝에다가 발라도 아랑곳 않았다. 묵주까지 가져와 성경 읽던 옆에다가 두어도 밉지가 않았다. 외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교 후엔 커피와 신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빈 공간을 용납하지 않은 채 할 일에 열중하고 몰입했다. 앞만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독한 연습은 외부인의 신분에서 이뤄졌으니까. 모든 선생님과 친밀하게 지내온 덕분에 아이들과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붙들리지 않았다. 외부인에게 친구처럼 다가온 낯섦이 오히려 스스로를 견고하게 만들었고 성실하게 살아갈 힘을 제공했다. 신분 제도로 이해하던 피라미드 구조는 나와 상관없는 먼 세계의 것이었다. 학교폭력에 분개하여 관성으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던 이들에게 반항하던 이유도 애초에 그 세계가 나와 아무 상관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별난 학생이 유별나게 좋아하던 선생에게 이르기라도 할까봐서 교실 문 닫고 치고받아도, 아무도 모르게 문자 한 방으로 아이들 뒤통수 때리며 폭력에 대항했다. 철없던 실장은 싫어하던 선생에게 수업 중에 대답하지 말자고 단합을 요청했다. 비웃기라도 하며 그 실장 보라는 듯 당당하게 대답했고, 평소처럼 반응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식판 들고 친구의 말꼬리를 잡을 때면 대신 잡아뗐다. 정의실현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없어서 눈물만 흘리던 친구의 얼굴이 대항할 힘을 만들었다. 마침내 그 실장 녀석을 붙잡고 당기던 또 하나의 관성을 확인했다. 존경하는 선생님을 괴롭히고, 사랑하는 친구의 가슴을 찢어발긴 그 녀석이 가고자 적었던 고려대학교 공책에는 자기소개서란 제목이 자리했다. “나는 _______한 학생이다” “나는 _______ 같은 사람이다” 아직 채우지 않은 빈 공간을 보았다. 그 아이의 빈 공간은 내가 싫어하던 빈 공간과 달랐다. 허벅지 사이의 공허함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사라질 유행어도 아니었다.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되는, 빈 공간에서 불안을 읽었다. 자기가 버려둔 공책, 어디에 있느냐고 짜증내던 모습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지켜보며 조용히 불안한 목소리를 들었다. 관성처럼 그 애를 끌어당긴 힘은, 혼자서 실행하지 못하는. 반드시 누군가가 필요해 누군가로부터 의지해야 비로소 쓸 수 있는 빈 공간이었다. 고독과 거리가 먼, 그 애 여자친구 향기를 맡으며 과연 무엇을 채워 넣으려고 했을는지 궁금했다. “따라서 해당 대학의 인재상에 부합하며, 입학 후 입학할 만한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진심을 묻고 싶었다. 강제하던 야간자율학습 사라지고 매몰차게 뺨 때리던 나쁜 교사도 없어졌지만. 대중독재, 상위 포식자를 세우고서 스스로 노예 삼을 이 이상한 관성은

[에셀라 시론] 은진이를 바라보는 마음에서 슬픔을 느꼈을 때

2021년 01월 17일
눈망울을 마주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네” 한 마디가 전부였다. 말조차 잘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본지 러블리즈덕질일기에 실을 요량으로 참석한 러블리즈 오프라인 모임에서 본 생일 카페 기획자의 첫 인상이다. 눈동자를 마주치고 바라보며 대화하길 좋아하던 나조차 옷깃을 저미었다. 다소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사람 대할 줄 모르는 분위기를 느꼈다. 그는 홀로 배지를 팔다가 사라졌고, 집필하던 기사를 삭제해 싣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이돌 세계에 발 딛고서 경험한 이상한 분위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도 장충체육관 나서면서 약 먹었냐 물어보던 두 남성을 애틋하게 보지 않는다.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는 척할지언정 적어도 약한 부분 건드리며 비난하는 못된 짓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아픈 부분 드러내고 공격하는 문화가 익숙한 아이돌 세계는 멀리해야 마땅했다. 처음 러블리즈 좋아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지애의 생생한 낯빛. 수정의 우는 소리, 명은의 독특한 “-다요”체, 소울의 딱딱한 말투, 지수의 통통한 볼, 예인의 어리숙한 일상, 케이의 희망 담은 목소리, 미주의 서운한 표정. 완벽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세울 성적 하나 없어도 즐거웠다. 수정이와 예인이의 찌그러진 하트 손동작에 늘 웃었다. 언제라도 토라질 지애를 응원했다. 러블리즈는 이슬만 마시지 않았다. 트로트에까지 와 닿을 성장 서사는 안준영 피디의 구속과 함께 눈 녹듯 사라졌다. 한 여름 밤 꿈처럼 사그라진 그 때의 흥분과 동질감은 많은 이들을 덕질 세계로 이끌었다. 내 아이 키우는 마음으로 투표했다고 한다. 여성상품화와 다르게 남자 아이돌에게는 유난히 관대한 그 신문사 논조가 놀라웠다. 힘겨운 세상에서 내가 만드는 성공 신화였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무 말 섞지는 않았다. 나도 그런 성장 서사 매력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이 지나 수많은 진리의 죽음을 경험하고 도탄(塗炭)을 바라봤다. 거대한 한국교회 악의 체제에서 벗어났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굴레라 믿었던 그 속에서 한 발자국 내딛지 못한 현실을 발견했다. 아이돌을 제2오순절로 부른 이유다. 자기 착취적 문화, 뼈를 갈아 만드는 콘텐츠, 바짝 돈 번다는 왜곡된 삶에 대한 인식, 되도 않는 성적 운운하며 한낱 인간에 불과한 이들 멋들어지게 꾸며대고 자신에게 치장하는 인간들. 청년들과 학생들이 어른들의 나쁜 짓을 따라한다. 큰일이다. 1등 신문이나 해댈 밑장빼기를 인터넷 곳곳에서 또 보아야 한다니. 이루다와 알페스가 인터넷에 오르내린다. 대중을 욕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나. 모두가 울분에 차있다. 커뮤니티를 닫았다. 조선일보 구독을 해지했다. 뉴스데스크 생방송을 닫아버렸다. 대중의 말들을 멀리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공원소녀 서경이와 서령이의 목소리만 주목했다. “우린 지중해 어느 이름 모를 해변/길 잃은 것 같애 아무렴 어때/아주 멀리 간대도 나를 찾지 말아 줘/내 맘이야이야/내 맘이야이야” 외롭지 않았다. 사람 좋아하던 내게서 사람 한 명 찾을 수 없는 유일한 시기가 아닐까. 머릿속 정화되는 기분 속에서 자신에게 집중했다. 편안함이 전부가 아니었다. 마음의 존재와 가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음과 정신에서 가치와 의미들이 지면 신문 속 기사들 배치처럼 이동한다. 지각 변동이다. 마음 속 제일의 가치로 떠올랐던 자기 계발 코르셋이 사라졌다. 러블리즈가 지워졌다. 그 자리를 대체한 비비드 색채와 정갈한 언어의 시(詩)가 자리했다. 이제 시작이다. 마지막이 되었을지 모를 러블리즈덕질일기는 이렇게 꾸미고 싶었다. “나는 명은이다요”로 시작한 커버스토리 헤드라인, 한 면 가득 채운 명은이의 얼굴. 러블리즈 멤버들의 성향과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정다운 호칭. 베이비소울 특유의 입술 컷 자세를 움직이는 사진으로 모아 묶고. 여자 아이돌 꿈꾸는 어린 아이 성장기를 담은 ‘마법의 스테이지 팬시 라라’ 리뷰. ‘걸그룹의 조상들’ 서평. 아이돌 바바를 끝내고 성인 배우 채승하로 인사해 출현한 영화 비판. 그리고 보랏빛 저무는 당신들의 시대를 사설로 담아내 그 끝을 또 다른 여덟 면 속보로 채우려고 기획했다. 타블로이드 호외판도 러블리즈가 아니었으면 만들지도 않았다. 콘서트처럼 마지막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러블리즈덕질일기 섹션도 그 끝에 다다르지 않을까 상상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의욕도 은진이의 눈빛에서 느껴졌던 슬픔에 다다르자 깡그리 사라졌다. 시(時)를 쓰기 위해 발 디딘 인스타그램 세계가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뚜렷한 이목구비, 가공한 특유의 색채, 만들어진 감정과 장소들, 누가 봐도 비슷한 얼굴 앞 발걸음 떼고서 시선 없음에 집중했다. 교회에서 느껴졌던 똑같은 “아멘”들이 들리지 않는다. 상황과 장소를 가공해야 마땅했던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침묵의 세계로 귀환한다. 저녁노을 져 가는 도시 속 고요한 예배당에서 느꼈던 침잠함은 역겨운 모름의 바다 속에서 건져주던 고마운 시간이다. 이곳엔 가끔씩 솔직하지 못해 어리숙한 자신을 탓하던 소녀는 없다. 애꿎은 내러티브 탓하게 만들던 소녀 3부작도 없다. 앞으로도 없어야 하고 비어져야 한다.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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