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Page 3

증인의 전도지, 외면 못한 이유

광주에 쏟아진 빗방울 412㎜는 말 그대로 극한 호우였다. 내가 타던 KTX는 16분이나 지연되고 말았다. 마지막 역도 목포역에서 광주송정역으로 바뀌었다. 나야 거기서 내리면 됐지만 김제나 목포로 향하던 이들은 안내 방송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한창 칼럼을 마감하던 길이었다. 한 시가 급한 상황이었지만 어떤 문장을 구성할지에 잠기고 말았다. 마지막 역이 바뀌었다는 갑작스러운 안내 방송에 옆자리 할아버지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을 스마트폰 화면을 노려다 보았다. 시간이 지나 할아버지는 화가 풀렸는지 모니터를 향해 손짓하더니 한 말씀을 건넸다. “글씨가 이렇게 작은 데 보여요?” 눈앞 마감보다는 할아버지의 화를 풀어드리고 싶어졌다. “그럼요. 잘 보이고 말고요.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말문을 터뜨렸다. 무려 한 시간이나 대화를 나눈 것이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내가 바라던 주제가 아니었다. 나라 걱정과 애국, 온통 가짜 뉴스로 가득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앞뒤 좌석에 아무도 없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나는 때론 맞장구를 치기도 했고, 할아버지를 치켜세워드리기도 했다. 이 또한 과거에 나 역시 애국 보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대답이었다. 그가 자신만의 애국 세계를 말할 때마다 나는 조심스레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무엇을 하러 호남 지역으로 내려가는지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이 캐나다에서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꺼낼 때마다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쓸쓸하고 외로운 단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야기에 이르러서야 나는 당신의 우국충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마지막 우리는 세 차례나 악수를 했다. 나는 그에게 축복해 마지않았다. 건강하시라고 말이다. 며칠 전 아시아문화전당으로 향하던 길목이었다. 칠순에 가까워 보이는 할머니, 여호와의증인이 내게 전도지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만의 신앙 세계를 말했고, 나는 조심스레 맞장구를 치다 이번 폭우 잘 견디셨는지를 물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었다고 한다. 주저리 이어지는 신앙 이야기에 나는 근처 다리 이름의 유래를 물었다. 물음을 통해 이 지역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 또한 나 역시 과거에 독실한 신앙인이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어디 가시는지, 어느 버스를 기다리는지, 이곳 근처에 사시는지를 물었다. 그는 중간중간 여호와를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증언했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인심 좋은 할머니가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두 손을 맞잡았고 서로를 축복했다. 애국 보수와 독실한 신앙,

전두환 시대의 부장

2022년 07월 11일
혼자서 한겨레와 조선일보 읽던 토요일 점심이었다. 다짜고짜 내 어깨를 치면서 부르는 손짓을 느꼈다. “다시는 도서관에 오지 마라”는 협박과 함께 문장 사이에는 욕설이

보고 싶은 얼굴, 채현국

2021년 04월 03일
가끔 엄마가 보는 드라마 내용이 궁금해 물어볼 때가 있다. 내용 이해가 될 만큼의 전달력 가진 드라마일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근데 저 드라마는 다르다고 말했다. 감동을

개신교회는 하고 싶은 말만 한다

2020년 07월 22일
한국 개신교 대중 동원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알만 한 교회 대형 집회에 수많은 교인들이 몰려들자 한 교인 분이 이렇게 말했다. “저 분들 다 지역 교회에서 모인 분들입니다.” 끝내 차별금지법 반대 청원은 10만 명을 넘어섰고(2020. 7. 7), 지난 8일 청원을 시작한 정부의 교회 소모임 행사 금지에 금지 청원만 오늘로써 42만 명을 넘어섰다. 수많은 목소리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무엇이 대안인지 고민도 고심도 없는 상황이다. 성서는 동성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못한다. 시대적 배경이 동성애조차 연구되지 않은 시절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동성애 연구는 시작된 지 100년 남짓, 바울 사도가

[교회 安 이야기] 신천지로 추정했던 ‘꿈을 그리는 사람들’

2020년 02월 24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였던 이정희 닮은 여성이 찾아와 그림이 어떻냐고 물었다.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그 그림이 어떤 느낌인지 설명했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아마 두 달 정도 이어진 것 같다. 정확히 언제까지 이어졌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첫 만남은 또렷하다. 8년 지난 지금에서 복기해 보면 그가 신천지 신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처음 도서관에서 접촉한 그 사람은 자신을 ‘꿈을 그리는 사람’이라 설명했다. 그래도 그를 쉽게 호칭하기 위해 이정희라는 별명을 붙였다. 강경한 친북(親北) 노선 걷던 이정희

철없는 어른도 성장은 합디다

2020년 02월 11일
‘진짜’라는 말 백 번 천 번 할 필요 없다. 직접 해봤다고 말하면 된다. 기억과 행동 대충 섞어도 괜찮다. 남들은 해보지 않았을 일이니까. 그래도 괜찮다. 사람들은 내 행동엔 관심 없고, 오로지 그 시점에 무엇을 느꼈는지만을 궁금해 할 테니까. 일상의 행복처럼 누구든 공감하되 세계 평화처럼 동떨어진 언어여선 안 된다. 대충 가능성 있는 성장 서사 눙쳐놓고 해봤다는 추진력 스까 놓으면 인생 선배로서 조언이 탄생한다. 독자 여러분은 ‘성장 서사’ 이 단어를 기억해 두시라. 성장 서사를 마케팅 요소로 사용한 이들은 유독 ‘진짜’라는 뉘앙스를 즐긴다. 말 그대로 자기 말이 진짜라는 말이다. ‘진짜’라는 단어를 한병철은 판매 논리(타자의 추방, 35)라고 지적했다. 판매논리는 남과 비교하는데서 시작한다. 말빨을 왜 키워야 하지? 계발을 왜 해야 하지? 성공을 왜 해야 하지? 공부를 왜 해야 하지? 독서를 왜 해야 하지? 존버를 왜 해야 하지? 왜를 묻기도 전에 말빨계발성공공부독서존버를 나열하고 나처럼 살고 싶으면 먼저 성공한 내 얘기를 들어보라 권한다. 진짜를 말하지 않아도 설명할 방법은 무궁무진한데도 말이다. 직접 보여주면 된다. 판매 논리를 숨기려 직접 보여주기를 실행한다.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는다. 직접 해봤으니 당사자가 더 잘 알거라고 비호까지 한다. 비호한 이유 한 가지 더, 헬조선 자체에 ‘희망’과 ‘의지’를 불어 넣었으니 이만하면 됐다는 논리다. 그러니 내 사람 그만 까고 문해력 딸리는 너희들은 책이나 읽으시라. 자존감 낮은 인간들은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구나. 쓰레기들의 끝은 어디일까? 대화 불가. 아이코, 이를 어쩌나. 좋은 일 한다고 했거늘 공정위 아저씨가 다가와 자꾸만 뭘 빼라고 말한다. 성장 운운하던 그 사람 이마에 괴팍한 단어 하나가 보였고 이 광경에서 데자뷔를 느꼈다. 자기 착취를 배경에 둔 인간들 행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배제의 정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더욱더 남들과 비교해댈 어휘력을 길러놓고 너희들과 다르다고 차별한다. 공간과 시간을 분리해 너의 시간은 발 디딘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혓바닥에 나오는 모든 말을 적으시라 가르친다. 스스로가 고립되고 그사세가 돼버려도 상관없다.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니 너희들은 우리에게 배우시라. 진짜 성장, 진짜 인간은 이렇듯 집단 사이 숨어버려 쨉만 날려댄다. 누군가 불편한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 착취적인 너희들은 무엇이 다르냐고.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직접 해봤다는 말 한 마디 충분하듯 밤새도록 되새김질 한다. ‘나는 ○○이 아니다!’ ‘나는 ○○과 다르다!’ ‘나는 진정한 ○○이다!’ 온갖 동네 뒤엎을 심령대부흥성회는 남들도 모르는 우리끼리 부흥성회로 비칠 뿐이다. 이쯤 되면 성장서사가 더 이상 성장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성장을 위한 성장, 배제를 위한 성장은 자가당착(自家撞着), 자기만족,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가 무너진 배경엔 인간을 죄인으로 보지 않는 새로운 시각 덕분이다. 카리스마 탑재해서 경영하던 아저씨들 꼬부랑 할배 되어 이빨 빠진

살기 위해 뭐든 하는 세상

2019년 08월 21일
“신학을 그만두고 약학을 전공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2018. 4. 18). 이미 미국 유학길 채비를 마쳤기 때문이다(2018. 1. 6). 목회학석사를 밟을지, 신학석사를 밟을지 고민하던 목소리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긴장감에 사로잡힌 상태였다(2018. 1. 10). 한 차례, 식어버린 치킨마요덮밥 앞에 훌훌 털듯 “아르바이트조차 부담스럽다”고 고백한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2018. 3. 20). ‘하긴, 나도 힘든 헬조선 너라곤 버텨낼 재간이 있겠니’ 생각하던 차 머지않아 그는 회심을 선언했다(2018. 3. 14). 썩어 문든 보수 교회와 운동권에 잠겨버린 진보 사이에 갇힌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로의 신앙인을 축원했다. 그 자유를 곧 과제 보이콧으로 행사했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지만(2018. 4. 29).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희망의 메시지, 부흥을 주도한 교회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빈자리로 가득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뒷좌석에 마주 앉아 두 손 들고 축도 중인 남자 앞에 고개를 떨궜다. 그 시절 희망과 할 수 있음은 지금 시대에 먹히지 않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제는 교회서 울리는 너스래미 들을 시간이면 콘서트와 뮤지컬로, 하다못해 넷플릭스로 시간을 때운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인구가 종교 가진 인구를 앞지른 지도 오래다. 두 손 들고 여의도에서 퍼져간 복음의 메시지가 그 시대에 희망이지 않았냐고 묻는다. 가끔은 빨래판에 올려둔 흰 교복 셔츠를 칫솔로 쓱싹쓱싹 문지르던 때가 향수로 돌아온다. 대형교회 향한 꿈은 내겐 빛나는 희망이자 내일을 살아낼 용기였다. 노쇠한 여든살 노인이 복음성가 1장을 부를 때면 눈물이 나왔는데 여전히 조용기 신화를 잊지 않은 탓일까. 번영신학 정점은 현실과 함께 허무하게 스러졌다. 왜 잘못을 논하는데 업적을 들이대나 싶을 테지만, 그렇다 치자. 시대가 변한 만큼 메시지도 발전해야 하지 않나. 그 시대에 은혜였다 셈 치자. 교인들을 무기력한 허상으로 좇아가게 만든 현실을 목도해도 된단 말인가.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한 1,2) 고백 앞에 눈물을 훔친 것처럼. 신앙으로 막 전향한, 알바조차 힘겨워한 남자 앞에 고개를 떨궜다. 나약해 보이던 남자는 누구보다 마음 속 진실함을 요구했다. 곧 관계가 파탄 날 것을 알았는지, 약학 전공한단 진솔한 연기도 보였다. 하나님 은혜가 필요하다던 신앙으로의 전향자에게 “희귀병을 앓고 있으니, 쉬어도 된다”고 말하자 당당히 조별 과제를 보이콧한 주체성에 감복했다. 자기보다 나약한 인간을 병신과 머저리로 치부한, 은혜를 가장한 연기에 감탄했다. 어차피 학부 시절 인간관계 파탄 내도, 당당히 아버지 빽으로 미국행 유학길에 오르면 될 테니까. 유학이 문제가 아니다. 갈 수 있다. 가면 된다. 가보라. 언젠가 신까지 팔아먹은 도피성 인생이란 현실 앞에 또 다시 좌절하고 죽음을 묵상할 테지만. 10년 전, 기독교 채널만 넌지시 시청하던 어머니께 조용기 실체를 토설한 아들이 떠올랐다. 저런 인간에게 돌아갈 헌금을 그만 내라던 아들에겐 그 시절도 은혜가 아니었다. 자유로운 인간이라 믿었던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죄라는 구도에 가둔 전략적 틀이란 사실을 선지자가 되어버린 아들이 말하고 있었다. 그 진실한 말을 그는 듣지 못했다.

성장 서사가 가르친 한 가지

2019년 01월 12일
“모든 것은 성장하며, 모든 것을 용인한다”는 말은 어느새 낭만이 되고 말았다. 무사고 300일이 무의미한 이유는 일상이며 굳이 의미를 부여한 말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일상을

수치심이 필요해

2018년 08월 15일
인간이 반성하기 위해, 필요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수치심을 제 빨리 거둬버리고 싶은 게 인간 심리다. 가능하면 빨리 거둬버리고 싶다. 잊어버리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살면서 수치심이
소랑 2026년 9월 1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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