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 - Page 3

[팔짱만 껴도 좋은걸②] 펭-귄, 페—-ㅇ귄, 뽀뽀 —- 우

여자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한 애착인형을 데려왔다. 정확히 몇 월 며칠에 왔는지를 서로가 모르는 걸 보면 처음엔 별 감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갤러리에 저장된 걸 보면 애착인형의 첫 사진은 지난해 9월 20일이다. 9월 전후로 애착인형을 데려온 것이다. 인형을 산 건 10년도 더 됐다고 한다. 여자친구가 동생에게 부탁해 에버랜드에서 사 왔다는 것. 영혼 없는 눈망울, 무표정한 얼굴, 입을 여닫을 수 없는 부리. 여자친구는 애착인형더러 “킹 받는다”고 표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친구가 출근하고 집에 없는 동안, 장난끼가 발동했다. 여자친구가 벗어놓은 잠옷을 내가 애착인형에게 입혀 놓고 나간 것이다. 저녁, 여자친구와 함께 집에 도착했다. 나는 능청맞게 장난을 쳤다. “어? 오늘 출근 안했어요?” 여자친구가 맞장구를 쳤다. “뭐지. 그럼 난 뭐지.” 애착인형은 울 줄도 안다. “펭~귄” 여자친구 특유의 발음에 착안해 나는 “펭~귄”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도 재밌다고 따라한다. “펭~귄” 우리끼리만 맛있는 걸 먹으면 애착인형은 삐진다. “펭~~귄” 우리끼리만 재밌는 데 가도 애착인형은 삐진다. “페~~~~ㅇ귄” 그런 애착인형을 여자친구는 무척 아낀다. 내가 애착인형에게 뽀뽀를 하면 “펭귄OO 괴롭히지 마욧~!”이라며 걱정도 해준다. 그런 애착인형에게 새 친구가 생겼다. 올해 애착인형 2호를 데려온 것이다. 그것도 판교에서 온 녀석이다. 우리의 애착인형과

[커버스토리] 10년이 지나고 나에게 선물 받은 나의 방

10년 묵은 먼지를 털어내자 재채기가 나왔다. 이 정도 먼지면 바깥에서 털었어야 했다. 중학생 시절에 만들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미술 과제를 꺼내 들자 허술하게 관리한 그간의 세월이 먼지만큼 보였다. 뇌리에 남은 미술 선생님 이미지는 두 가지다. 섬세함과 예민함을 갖춘 바람에 우리들에게까지도 엄격함을 요구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이기적인 인간상, 또 하나는 부처상 앞에서 백발배로 성찰하며 자신의 예민함을 섬세함으로 가다듬던 인간상. 그 짧은 반 오십 살면서 자신의 삶을 바꾸어간 사람들 셋을 보았는데 그 중 한 분이 미술 선생님이었다. 자신의 장점이자 단점이던 예민함과 섬세함을 극대화해 끝내 자신의 성격조차 조각하듯, 하나하나 새겨나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런 어른이 가르쳐주셔서 고마웠다. 선생님은 신문지로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라 하셨고, 좋아하는 간판을 그리라고 흰 종이를 내주셨고, 배달 음식으로 남은 나무젓가락으로 탑을 쌓아보라 하셨고. 마지막으론 내 방 만들기라는 거대한 과제를 내주셨다. 즐거웠다. 왜냐하면 나는 늘 내 방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집에서 놀 듯, 학교에서도 놀아보라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선지 학교 가기가 가벼웠고 하나 둘 만들어가는 교실 속 광경을 느끼자 내 세상 같았다. 고입선발고사를 위한 미술 공부는 재미없었다. 지금도 머리에 남는 교과서 속 인물은 독창적인 팝아트 거장 엔디 워홀(Andy Warhol)밖에 없다. 점 하나 찍고 돈 세탁이나 하는 줄만 알았던 작품의 세계를 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편견을 집어치우고 말았다. 즐겁게 제작하던 10년 전 작품을 다시 손에 들었다. 내 방 어딘가에 잠자고 있는 작품들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지면은 여행을 떠나고 채워야 했지만, 코로나 파동으로 인해 방 꾸미기 기사로 갈음한다.

[인류의 마음 박물관③] 별스럽고, 색다른 낯선 얼굴의 너… 다르니까 스며들 수 있는 거지

2025년 03월 20일
그곳엔 끝없는 자연 티 없는 풀, 꽃, 잎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나타난 무리 생소한 낯, 눈, 결이 내 가슴을 두드렸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알프스의 능선 위로 하얗게 쌓인 구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도시는 진작 점이 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따분한 회색빛 도시들은 어느새 흙 내음을 머금은 산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동화 속에서 미끄러져 나온 것만 같아….” 한때 이곳의 기억은 할머니가 타계하신 후로, 마음속 무덤에 영원히 묻어두기로 다짐했었다. 그리움과 맞이하는 아침이 아파서.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이 산장의 냄새는 변치 않나 보다. “주디야, 다 왔다. 어서 내려서 짐 챙기고 올라가 있어.” 산장은 사람의 손길이 한동안 닿지 않았음에도, 내가 마지막으로 집에 작별을 고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벽난로 위에 사진들만이 누렇게 빛바랜 채 손 인사를 하고 있을 뿐. “아직 그대로네.” 손끝으로 액자 위에 수북이 쌓인 먼지를 가만히 쓸어냈다. 그 순간, 투명한 유리 표면에 반사된 창가의 은방울꽃이 시야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애지중지 키우던 은방울꽃. 누군가는 별스럽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 꽃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 무언가가 나를 조용히 이끌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홀린 듯이 창가 앞에 서서 은방울꽃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눈물처럼 맑고, 아득한 그리움을 닮은 향을 풍기는 은방울꽃. 향을 음미하며, 은방울꽃이 뿌리내린 흙을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미세한 입자들이 살갗을 서늘하게 간지럽혔다. “앗 차가워. 뭐지, 차가운 금속 같은 게 안에 들었는데?” 손안에 닿은 건, 다름 아닌 열쇠였다. 한순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만 같았다. 열쇠가 비정상적으로 작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뭐해? 얼른 짐 풀어.” 어느새 엄마는 집 안으로 들어와, 짐을 풀고 계셨다. 열쇠를 손아귀에 꼭 쥔 채, 조심스럽게 주먹에 감췄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간지럽혔지만, 풀지 않았다. “나…. 당분간 할머니 방에서 지내는 거지?” 말끝이 살짝 떨렸다. 아직 남아 있는 할머니의 향기와 손때 묻은 것들이 방 안에 선명하게 가득한데, 문턱을 넘어서기가 조심스러웠다. 창으로 스며든 태양의 눈물이 할머니의 방 안을 한가득 비췄다. 열쇠를 더 꽉 쥐었다. 마치 태양이 지배하던 산장을 잠식하려는 그림자의 정체를 밝혀내려는 듯이. 그로부터 며칠 후, 마침내 이 열쇠가 꼭 들어맞는 문을 발견하게 됐다. 선반 위에 놓인 먼지 쌓인 액자들을 닦으며 추억에 잠겨있을 때였다. “어? 저게 뭐야?” 액자 위로 어떤 형체가 반사되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벽지와 똑같은 색으로 둔갑해 있는 작은 문이었다. 호기심에 못 이겨 그 문으로 한발 한발 다가갔다. 며칠 전, 화분에서 발견한 열쇠가 꼭 들어맞았다. 심호흡을 한 번 가다듬곤 “하나 둘!” 문을 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인류의 마음 박물관②] 감정필름관, 추억을 인화해드립니다

2025년 01월 20일
“공간은 시간을 간직한다던 네 말, 진짜더라. 네가 없는 집에 앉아 있으면 늘 하던 대로 소파 한쪽에 기대곤 해. 네가 평소에 앉던 자리를 바라보면, 괜히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자주 가던 카페에서는 우리가 늘 앉던 창가 자리가 눈에 들어오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 공간들에 우리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남겨둘 걸 그랬나 봐. 갈 때마다 네 흔적이 희미해질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단 말이야.” 창문에 내려앉은 입김이 사라지기 전, 서둘러 너의 이름을 새긴다. 하지만 석 자를 다 쓰기도 전에, 넌 허공으로 증발해버렸다. 지워진 이름을 손으로 문지르는 것만큼이나 덧없이, 주머니 속에서 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냈다. 사진 한 장. 그것이 모든 걸 시작했다.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들은 사실, 마르지 않는 바다였다. 언제든 파도가 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기억들. 처음엔 발끝만 스쳤던 물이, 어느새 가슴까지 차올랐다. 파도는 점점 거세져 귓가에 닿았고, 그 순간 네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완전히 지배해버렸다. “도연아, 그 전설 들어봤어? 우리 엄마가 나 어릴 적에 들려줬던 건데, 월식이 뜨면 이 근방에 감정필름관이 나타난대. 그런데 아무에게나 보이는 건 아니라더라. 떠난 사람이 너무 그리운 사람한테만 보인대. 나중에 월식 뜨면 이 골목길같이 걷자. 혹시 모르잖아? 전설의 감정필름관을 보게 될지도.” 어설프게도 너의 바람은 네가 바람이 됨과 동시에 산산조각 나버렸고, 남은 건 그 약속을 기억하는 나뿐이다. 그럼에도 혼자서라도 그 약속을 지키고픈 마음은 왜일까? 발걸음은 어느새 네가 말한 골목길로 향했다. 그 길 끝에, 너의 온기가 미약하게나마 남아있길 기대하는 강아지처럼. 지도는 없었다.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파고들고,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밭에 갇힌 듯, 길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 달빛만이 희미하게 길을 비출 뿐이었다. 그 빛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둠을 밝히는 저 빛에도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며 끈질기게 걸었다. “으아, 이게 뭐야?” 얼마나 걸었을까. 길을 밝혀오던 달빛이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눈동자를 강렬히 휘감았다. 무대 조명이 망가져 이상한 곳을 비추는 것처럼. 잠시 후, 눈을 감싼 붉은빛이 서서히 거둬졌고, 눈앞에 작은 주택이 나타났다. “감정 필름관….” 간판 아래로 유리구슬들이 오묘한 빛을 반사했다. 꽃잎처럼 나풀대는 옷깃을 지그시 잡았다. 그러곤 그곳을 향해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다가갔다. “우와… 신기하다.” 가까이서 보니 구슬들은 서로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저마다의 자아를 가진 것처럼. 손을 뻗어 구슬 위에 가만히 얹었다. “오랜만에 오는 손님이네.”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리자!” 분명 구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귀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뇌에서 구슬들의 말소리가 퍼졌다. ‘텔레파시 같은 건가…?’ 다시 구슬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또다시 말소리가 뇌리에 퍼졌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 봐!”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면 그냥 납득하게 된다고 하던가. 얼빠져서 한참 구슬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두터운 음성이 들렸다. “거기 손님인가?” 고개를 돌리자 흰머리가 빼곡한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가 소문으로 듣던 감정필름관인가요?” “맞네.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직접 보니 어때? 신기하지? 그나저나 날씨도 추운데 얼른 들어가자.” 안은 화려한 외부와 달리, 부드럽고 포근한 분위기였다. “순간이 담긴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아요.” 이상하다. 할아버지와 초면인데도, 봄바람 끝자락에 머문 친근함이 느껴졌다. 비유하자면 할아버지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굳은 생각들을 망치로 노크하는 것 같았다. 미약한 떨림에도 굳은 생각들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 단 한 번의 노크라도 해주길 기다렸던 것처럼. 애써 그 부스럼을 담으려 다시 애썼다. 그러나 그 부단한 노력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눈물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빠져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은 눈물로 흐려져 있었고, 할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이고 계셨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것처럼. 그분은 조용히 내게 유리병을 건네곤, 이곳에 흐르는 눈물들을 담으라는 손짓을 했다. 할아버지는 다시 건네받은 유리병을 몇 번 흔드시더니, 내 손에 든 사진을 가져가시곤 그 위에 눈물을 부었다. 그러자 눈앞이 뿌옇게 변하더니…. 사라지는 너의 흔적 남은 건 ‘사진 한 장’ 그립고 보고싶어서마르지 않는 바다 외길 헤매고 헤매다 나타난 전설 속의 감정필름관 믿고 또 믿는 심정으로부서지는 굳은 기억들

[작품 해설] 문소혜에 관하여: 연애 계약서와 감정의 충돌… 학보사에서 벌어지는 달콤 로맨스

2024년 12월 31일
연결 기사[단편소설] 문소혜에 관하여 이 작품은 학보사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두 인물의 감정적·심리적 성장과 관계의 변화를 밀도 있게 그려낸 성장 로맨스다. 작품은 두 주인공, 우다원과 문소혜의 얽히고설킨 감정선을 중심으로 일과 사랑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이야기를 전개한다. 학보사를 둘러싼 다양한 사건과 갈등은 단순히 플롯을 구성하는 요소를 넘어, 인물의 내면과 성장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이를 통해 작품은 독자에게 삶과 관계의 복잡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학보사와 두 사람의 첫 만남작품의 도입부에서 소혜가 다원에게 접근하는 장면은 단순한 제안에서 시작된다. “소원 하나만,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라는 대사는 소혜의 성격과 두 사람의 관계를 암시하는 중요한 장치다. 다원은 이 제안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점차 소혜의 계획에 휘말리게 된다. 소혜와의 첫 인연은 단순히 직업적 협력을 제안하는 듯 보이지만 소혜가 가진 목적과 감정은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소혜의 ‘근로계약서’라는 명분 아래 다원을 학보사에 끌어들이는 모습은 단순히 권력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을 넘어 소혜의 직업적 열정과 숨겨진 감정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신문 제작과 연애의 병렬 구조학보사라는 공간은 단순히 일터가 아니라 다원이와 소혜가 함께 성장하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무대다. 작품 속에서 신문 제작 과정은 두 사람의 감정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초기에는 소혜의 주도 아래 다원이 모든 일들에 끌려가는 듯 모습을 보이지만 소혜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다원을 지시하고 때로는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정도로 날카롭게 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다원은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둘의 관계는 단순히 갑을 관계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마감을 앞두고 소혜가 “쓰레기!”라며 원고를 구겨버리는 장면은 두 사람 사이 갈등의 정점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다원에게는 자존심의 문제이자 자신감에 도전받는 순간이며, 소혜에게는 자신의 완벽주의와 다원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두 인물은 서로에게 감정을 쌓아가며 관계의 방향성을 정립해 나간다. 소혜의 이중성소혜는 두 얼굴을 가진 인물로 업무 중에는 냉철하고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지만 연애 관계에서는 다원에게 다정하고 귀여운 면모를 드러낸다. 이중적인 태도는 다원에게 혼란과 동시에 강렬한 끌림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소혜가 “다원아, 이 단어 봐봐”라며 편집을 요청하면서도, 플러팅과 같은 태도를 섞어내는 모습은 그녀의 복합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이중성은 소혜가 일과 사랑,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모두 소중히 여기며 두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단순한 로맨틱한 관계를 넘어 그녀가 가진 인간적 고뇌와 성장의 여정을 드러낸다. 연애 계약서와 감정의

[팔짱만 껴도 좋은걸①] 너와의 300일… 고마워, 사랑해

2024년 12월 30일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푹푹 찌는 여름이었어도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을지로에 있는 커피한약방에 다다랐다. 급하게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했다. 쏟아지는 빗방울을 겨우내 피하고 당근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래도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이번엔 꽤 좋은 직장을 구했다. 하지만 언제나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이직에 성공하면, 사라질 걱정쯤으로 생각했지만 달랐다.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에 대한 걱정, 1년 후에도, 2년 후에도 나는 이 자리에 여전히 굳건히 서 있을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장거리 커플이다. 일을 하는 중에는 주말에만 만날 수 있다. 예상하지 않은 고용 한파에 나는 오랜 시간 백수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여자친구와 만난 지 300일. 을지로 커피한약방이 떠올랐다. 여자친구가 물었다. “불안하지 않아요?” “왜 안 불안하겠어요. 하지만 그때, 일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었을지 싶어요.” 나는 직장을 그만 두고 여자친구네 집에서 살다시피 지냈다. 오히려 직장을 그만두면서 더욱 가까워진 것이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가치들을 배웠다. 시간이

[마감하면서] 소담한 저녁의 부활

2024년 12월 30일
회사를 다녀오고 도착한 집은 언제나 어둠뿐이었습니다. 짙푸르고도 고요합니다. 주말이 되면 소리 없는 풍경에 어디든지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문정동 시절 저의 삶은 어둠 속 별을 바라는 소담한 꿈을 품게 했습니다. 이번 겨울, 여자친구를 만났습니다. 회사를 관두었습니다. 전례 없는 이직 한파에 저는 오래도록 쉬었습니다. 혼자 쉴 때와는 달랐습니다. 늦게 일어날 일도 없었고 배를 굶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규칙적인 삶을 살면서 에세이를 써 내려갔고 이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지친 몸, 더욱 축 늘어져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매일 밤이 두려웠을 겁니다. 매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막연한 공포감이 압도했을 겁니다.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저는 스타벅스에서 짧든 길든 글을 집필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여자친구의 손을 잡았습니다. 집에서는 함께 저녁을 해 먹었습니다. 집에는 온기가 돋았고 입맛이 살아났습니다. 화려하진 않아도 소담한 식탁에 매일을 웃을 수 있었습니다. 제로 콜라를 마시면서 바깥양반의 여행기도 곁들었습니다. 가끔은 완성한 지면을 보여주면서 신문 브리핑도 하며 자랑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건 아니지만 엄청나게 놀라운 삶의 연속이 이어졌습니다. 혼자서라면 단 한 달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게으름과 나약함이란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테죠. 절망스러운 상황에 여자친구가 저의 등불이 되어주었습니다.

[인류의 마음 박물관①] 라디오에서 들려온 ‘세상:소음’, 어른이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인걸

2024년 11월 20일
“밥은 챙겨 먹을 수 있겠어?” “나 열여덟이야. 어른 면허증 취득해야지.” 정부는 ‘어른 면허증’을 도입했다. 사람마다 어른이 되는 속도는 다른데 모두 20살에 어른의 책임감을 갖는 건 불합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를 기점으로 사춘기 소녀가 어른이 되는 경우도 생겼고, 반대로 50살이 넘어서도 아이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권력자들의 상당수는 아이가 되었다. 이제 이들은 권력은커녕 어른 면허증을 따기 급급한 처지가 되었다. 면허증의 요건이 수록된 어른 사전이 나오기에 이르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나는 여름비를 배경 삼아 어른 사전의 책장을 넘겼다. “어른에게 필수적인 자질은…. 하암.” 하루 종일 사전만 괴고 있자니 눈이 절로 감겨왔다. 수면제가 아주 따로 없었다. 그럴 때마다 탁상시계를 노려보며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무엇보다 내일 난 어른 면허증을 꼭 따야 했다. 동료의 모함으로 회사를 퇴사하게 됐기 때문이다. 낱장이 된 달력은 어느새 월세 기한을 선명히 가리켰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난 어른이 돼야 하니까. 어른은 삶을 책임져야 하니까. “괜찮아. 이것도 스쳐 지나갈 소나기일 뿐이야. 어른 면허증만 따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연신 중얼거렸다. 간절한 주문처럼. *** 눈이 기어코 졸음에 승복했나 보다. 눈을 떠보니 시계는 어느새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고?”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그새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내일 시험인데도 불구하고 꾸벅꾸벅 조는 나를 책망하는 소리 같았다. 아니면 창틈으로 빗물이 새어 바지가 젖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눈치채지 못한 나에게 내리는 벌일까. 저렴한 월세방이라 노후된 창문이 위태로워 보이긴 했지만 바닥까지 흠뻑 적실 줄은 몰랐다. 화들짝 놀라 창 틈새를 청 테이프로 간신히 막고 헌 옷으로 급히 바닥을 닦았다. “세상에, 집이 이 모양 이 꼴이 될 때까지 곤히 잔 내가 대단하다.” 헌 옷을 폐의류가 될 때까지 바닥을 박박 닦을 때쯤 집은 제 모양을 찾아갔다. 그래도 찝찝한 건 매한가지라 바닥에 침구를 깔고 누웠다. 그제야 한숨이 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밤 11시 30분을 가리킨 시계는 날 원망 섞인 눈으로 다그쳤다. “그래, 넌 항상 이런 식이었어. 책임감부터 부족한테 어른 면허증을 딸 수 있겠어?” “맞아, 네가 어른이 되는 건 한낱 백일몽일 뿐이야. 포기하는 게 빠를걸.” 절망은 그을린 잿더미의 가루로 피어올라 내 시야를 가렸다. 급히 못다 읽은 어른 사전을 집었다. 그러나 글씨는 가루비처럼 빗나가기만 했다. 큰일이다. 내 상태를 보니 내일 시험을 종칠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책과 씨름하길 1시간째. 난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잠이라도 푹 자둬야 또렷한 정신으로 시험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지금까지 외워온 것만이라도 잘 쓰자.” 눈을 감자 어둠이 밀려왔다. 무수한 양들이 암흑 속에서 춤을 추었다. 자신을 다 헤아리기 전까진 잠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파도와 바다가 둘이 아니듯, 두려움은 날 붙들고 잠 못 들게 했다. 급한 마음에 양을 한 마리, 두 마리 세 보았지만, 셀수록 양이 더 불어나는 건 왜일까. 심장을 두른 얇은 실을 잡아당기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얇은 실이 심장을 더 지탱하기 힘들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귓가에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휴대용 라디오 소리였다. 두려움에 손을 휘젓다 전원 버튼을 잘못 건드렸나 보다. 어둠 속에서 라디오를 끄려고 손을 뻗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서하의 라디오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다들 감정의 강둑이 메말라 버린 지 오래되셨죠? 눈물조차 날 틈이 없는 삶. 그런 여러분들을 위해 제가 노래 한 곡을 가져왔는데요. 바로 리도어의 ‘세상:소음’입니다. 노래를 듣고 마음껏 울어도 됩니다. 대신 아프지만 않으면 돼요. 그러니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따스함으로 가득찼으면 좋겠습니다.] 어렸을 적, 할머니와 즐겨 들었던 라디오였다. 인사도 없이 떠난 할머니. 타계하신 후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던 내게 한동안 그 빈자리를 채워준 서하의 라디오. 노래는 화음이 되어 추억 속을 함께 거닐었다. 부서질 추억을 걷듯 아주 조심스럽게. 눈물샘을 건드리면 쌓아둔 수많은 추억들이 일그러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걸음걸이였다. “울면 추억이 상할 텐데…. ”

[편의점은 요지경①] 어색한 낯, 언짢은 투, 살가운 척… 완전 꼰대 같은 교대 근무자

2024년 11월 01일
“’또 오세요’는 또 오란 소리 같잖아. ‘좋은 하루 되세요.’ 정돈돼야지.” 기분이 팍 상했다. 또 오란 말이나 좋은 하루 되란 말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첫 만남부터 어긋난 것 같았다. 다른 시간대 근무자 말이다. 나의 근무 시간은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다. 사장님이자 점장님은 연습 겸 오후에 나오라고 하셨다. 첫 만남은 순조로웠다. 가벼운 캡 모자를 쓴 중년 아저씨였다. 인상이 좋았다. 아르바이트생이 될 나에게 음료수 한 잔을 건넨 후덕한 인품이 마냥 좋았다. 그 할아버지(진) 근무자가 마음에 걸렸지만 말이다. 사장님은 너그러웠다. 포스기를 다루는 방법부터 냉장 진열대에서 매대 각 분야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가르쳤다. 어려울 건 없었다. 갑자기 손님이 밀려왔다. 계산과 거스름돈 돌려드리기를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실수 남발이었다. “천천히. 천처~니. 거봐. 서두르니까 실수하잖아. 잘못 알아듣고.” 아직 멀티태스킹은 어려웠나 보다. 머쓱했다. 3박 4일 훈련은 끝이 났다. 할아버지 근무자를 만난 것도 훈련 기간 중에서였다. 본격 투입에 나섰다. 밤 10시 45분. 첫날은 사장님과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아들에게 집을 맡기고 떠나는 사람들 같았다. 둘째 날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아까 말한 그 할아버지 근무자 말이다. 되게 꼰대 느낌이 낭낭했다. 좀 긴장이 됐다. 괜히 첫 단추 잘못 끼우면 서로 곤란해지니까. “안~녕.” 앞으로 매일 볼 얼굴일 줄은 몰랐다. 15분. 인수인계가 이뤄졌다. 결과를 말하자면 군기를 잡는 것도 아니었고, 꼰대도 아니었다. 뭐랄까. 같이 있다 보니 불편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일하는 동안 참 많이 웃었다. 장난도 곧잘 치는 할아버지였다. 어느 날은 “매일 쓸고 닦기 전 먼지부터 털고 청소한다”고 자랑했다. 그랬더니 그가 퇴근 직전에 먼지 하나 있나 검지로 슥 닦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뱉은 한 마디. “흠. 인정.” 말없이 따봉만을 날리는 뒷모습에 넙죽 절했다. 편의점 야간 업무는 힘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자도 자도 피곤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근무자를 생각해서 한 번도 지각한 일이 없었다. 그만큼 넉살 좋은 사람이었다. 편의점에서 일할 때마다 느낀 게 있다. 사람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른 존재였다. 할아버지 근무자도 그랬다. 그는 심심하면 내 이름을 불렀다. 하나하나 하고 싶은 말들을 챙겨주었다. 회사 나가는 아들 옷깃 여미는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런 아버지 같은 분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별다른 호칭도 없었다. 그냥 이름도 별명도 직함도 없이 주어를 생략하고 그분을 부른 것 같다. 아, 그분의 이름. 한 번이라도 여쭈어볼걸.

[주마등] 너에게만큼은 찐따로 보이지 않길 바랬는데

2024년 10월 22일
“진성아, 나 좋아하지 말아줘.” 이게 무슨 말이지. 싶어 쭉 읽어 내려간 글은 320자 분량. 꺼림칙한 기분으로 속독했다. 대충 내용은 이랬다. “네가쓰는ㅋㅋㅋㅋㅎㅎㅎㅎ과도한자음들말야날남들보다좋아하는느낌이란생각이들어나는너한테관심없고좋아하는것도아니야난너와친하다고생각했지좋아하는그런사이로생각해본적없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 호감. 호감 정돈 가진 건 맞다. 하지만 좋아했다는 건 억울한 오해다. 고백한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디펜스하는 게 어딨나. 불쾌한 답장에 기분이 꽁했다. 의자에 기대에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그 애랑 둘이서 채플에 빠지던 날이 떠올랐다. 교통사고는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치기에 교통사고겠지 우리 학교는 매주 화요일, 목요일 점심이면 채플에 참석해야 한다. 채플은 기독교 학교라는 구색에 맞춘 과목에 불과하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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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8월 24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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