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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시대성의 창

[시대성의 창] 자기에게 주는 벌 그만 받아요

 

만민중앙교회가 지쳤나보다. 본지에 실린 글을 상대로 게시중단요청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명성교회와 인터콥, 신천지 같은 집단이 기사와 칼럼에 대고 게시중단을 요청하기 일쑤다. 당혹감은 무덤덤해졌다. 지난 12월 명성교회를 끝으로 특정 교회 문제점을 언급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지상파 방송국이 누구보다 발 빠르게 취재하기 때문이다. 문제 많은 교회를 대하는 사회 시선도 바뀌었다. 피해자 중심으로 생각해 더 나은 사회를 걱정하는 자세가 예전과 달라진 덕이다.

달라지지 않은 건 어머니의 친구였다. 풋풋한 청년 시절 만민중앙교회를 다니던 어머니 친구 이야기 말이다. 어머니는 친구 이야기를 자주했다. 걱정 때문이다. 자칭 목자라 불리던 이재록 씨가 구속되고도 목자의 권능을 강하게 믿었다. 구속 이후에도 변함없는 신앙과 흔들리지 않는 교회 분위기도 전해 들었다. 이재록은 상고심에서도 패소한지 오래다. 구로디지털산업단지 예배당이 무너져서도 다니고 있을지 궁금했다. 어머니는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전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쯤이면 현실을 마주하고 충격도 받아야 하거늘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신앙심이 놀라웠다.

언제나 모든 종교 피해자를 보노라면 안타까운 감정이 밀려온다. 대법원은 이재록에게 다음의 판결을 내렸다. “종교적 권위에 억압되어 항거하지 못하는 피해자들 상태를 이용해 여러 차례 간음하거나 추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원심 판단에 잘못이 없다.” 어머니는 어렸을 당시의 친구에게서 착한 성정을 발견했다. 착해도 너무 착한 게 문제라고. 너무 착해서 교회가 잘못해도 잘못으로 받아들이질 못한다고 말 잇지 못했다. 나도 참여교회 신앙이 옳은 줄로 믿었을 땐 방송실에 곧 빌 내 자리를 걱정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 누가 나 대신 일할지를 두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난다. 내 인생 걱정하기도 바쁜 시대에 교회 걱정이나 하다니. 어차피 신이 살아있다면 참여교회를 지켜줄 텐데. 어머니의 친구도, 나도. 교회가 무너지면 어떡할지를 걱정한 것이다.

 

 

늘 나는 내게 미안했다
교회에 맞서지 못해서
교회를 떠나지 못해서
돌아오잖을 시간 앞에
짊어진 짐 내려놓는다

 


어머니는 내가 교회를 탈퇴했을 2016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만민중앙교회 다니는 친구와 관계를 정리하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교회를 다녀도 걔는 내 친구야.” 독실한 기독교인에서 무신론자가 된 나지만 여전히 엄마는 엄마이기에 교회에 대한 분노가 확장되지 않았다. 무신론자에서 기독교인이 된 엄마는 종교가 달라진 것 말고도 변한 게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서 원망도 하면서 믿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믿어. 그 하나님을 느끼고 있어.” 엄마의 삶은 신의 숨결과 함께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하려는’(요한10,10) 예수의 말처럼 달라져갔다. 그리고 엄마는 또 한 가지 친구의 에피소드를 기억해냈다. “걔가 말이야 학창시절 때 가출하는 나랑 친구들을 붙잡아주지 못한 걸 미안하게 생각해하더라.”

사람이면 누구든지 보이지 않은 짐 하나씩은 들고 다닌다. 나는 교회를 향해 온몸으로 투신한 과거의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짐으로 들었다. 어머니의 친구는 지금도 학창시절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을 짐으로 들었다. 그런 어머니는 친구에게 말했다고 한다. “아니야, 학생 때 네가 얼마나 생글 맞게 굴었는지 아니? 나나 다른 애들 가출했을 때 네가 도와줬잖아.” 그 말을 들으며 친구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경화 작가 청소년 문학 소설 ‘안녕히 계세요, 아빠’에서 가슴을 울리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은 고등학생 되어서야 처음으로 아빠를 대면한다. 어머니의 거짓말과 달리 아빠의 집에는 불륜으로 바람난 여자도 없었고 자신에게 무심할 뿐이라던 상상 속 아빠도 없었다. 그저 아빠는 아빠로 서 있을 뿐이다. 자신에게 집착하던 엄마라는 세계에서 벗어난 주인공이 아빠에게 말한다. “이제 아빠도 엄마가 주는 벌 그만 받아요.”(161,7)

교회는 끊임없이 신의 이름으로 신자들을 기만한다. 죽음 이후를 보장한다고 거짓말한다. 만들어진 가치를 숭상한다. 아버지를 찾아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려간 주인공의 용기처럼 교회를 벗어나 신에게 달려가기까지 지옥에도 맞설 용기가 필요하다. 만민중앙교회 다니던 피해자들에게 진실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짐을 내려놓고 싶어도 놓기 어려운 마음은 당해본 사람만이 알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가혹하다. 놀랍게도 가해자는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못해 미안한 마음의 짐조차 지려하지 않는다. 모든 짐은 오로지 피해자 몫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미안한 짐만큼은 덜어도 괜찮다 말하고 싶다. 지나간 청춘은 돌아오지 않기에. 지금도 자기에게 주는 벌로 황량한 사막을 거니는 모든 피해자들에게 “다 지나갈 아픔”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