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버뮤다순복음교회가 문 열었다.(2022.09.03) 한국교회 유일 메타버스 교회가 2016년 8월 23일, 6년 지난 그 모습 그대로 게임 퍼피레드에 복원된 것이다. 감회가 새롭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다. 다시금 기억을 마주하자 감격했다. 흠이라면 접속조차 불가했던 정식 출시 첫 날의 퍼피레드 로그인 오류, PC버전과 다른 조작감, 생각보다 모자란 그래픽 퀄리티는 때론 짜증을 불러왔다. 그렇지만 어두운 예배당을 따뜻한 조명으로 비추자 한줄기 빛처럼 감동이 밀려왔다.
교회와 퍼피레드 복원은 기억이 오브제로 되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오로지 바뀐 것은 우리의 몸, 성숙한 정신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한 신학자는 20년 전 교회의 ‘역할 독점’을 비판했다. 교회는 중세시대 이후 한 번도 자신의 절대적 역할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역할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구원의 대리자였다. 구원은 오로지 교회를 거쳐야만 이룰 수 있기에 천년 넘는 시간 독점해 왔다. 버뮤다순복음교회는 달랐다. 종교를 초월해 모든 이들을 반겼다. 교회가 처음이어도 괜찮다. ‘추천’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말 그대로 누구든지 환영하는 공간으로 자리했다.
앞에서 ‘몸의 성장’ ‘성숙한 정신’을 말했지만 나는 여전한 것 같다. 혼자이기를 바랬던 고등학생 시절, 누구와도 마주치기 싫어 몸과 정신은 움츠릴 뿐이었다. 게임하고 농담하기 바빠야 했지만 극도로 예민했기에 언제나 손에는 성경책이 들렸다. 말도 섞지 않았고 마음과 생각에는 ‘예수를 기억하라’던 이념만 가득했다. 장래희망은 목회자였다. 담임도 걱정했다. 사람을 상대해야 할 직업인데 움츠린 몸짓이 전혀 목사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망가질 영혼이 될 거라고 걱정한 어른도 있었다. 그러나 선택은 오로지 내가 하기에 말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인가’ 절망했다. 졸업 이후의 삶은 모두가 알 듯 처참함뿐이다. ‘달라져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달라지지 않은 성정
변함없는 가치 앞에
과거의 나에게 내민
용서와 화해의 손길
10년이 흐르고 성향이 바뀌었다. 출발은 교회를 탈출하는 데서 시작했다. 기독교라는 옛 옷을 벗으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나만의 세계에 찾아와 준 사람들을 맞이했다. 잦은 왕래에 조금씩 빗장을 열었다. 1년 365일 내내 어둡던 하늘이 개었다.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누구보다 사람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계 같던 깡통뿐이던 내게서 감성을 느꼈다. 망가져가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내용의 에피소드에 눈물을 머금었다. 먼 것만 같았던 여자애가 다가왔다. MBTI 따위엔 관심도 없던 내게 성향을 물었다.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었다. 10년 전 내가 궁금했다. 그 시절 MBTI는 ISTJ였다. 한 자리만 빼고 정반대 성향으로 바뀐 것이다.
달라진 줄 알았건만 퍼피레드 복원에서 과거의 나를 느낀다. 한 몸에서 서로 다른 두 성향의 존재를 느낀다. 죽은 신(神)을 믿고 저돌적인 인간이 되었으며 누구보다 다채롭고 풍부한 감성적으로 바뀌었지만 달라지지 않은 성정(性情)을 마주한다. 달라진 것들 사이에서 달라지지 않은 게 있었다. 달라지지 않은 것 앞에서 꼭 달라지지 않아도 된다는 교훈을 배웠다. 교회를 나와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허물어졌다. 후회와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한 과거를 에둘러 지우거나 부정할 필요도 없었다. 퍼피레드와 버뮤다순복음교회 앞에 옛날의 내가 발현되어도 그 때의 나를 품어줄 용기와 마음이 샘솟는다. 비로소 내가 나를 이해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데서 시작한다.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듯,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지금도 농담처럼 묻는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기겁하지 않을까라고. 지금은 대답이 달라졌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며 기겁할 테지만,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바뀌어 온 삶의 족적을 알기 쉽게 설명해줄 거라고. 체념과 후회로 과거의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극복해야 할 존재로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다르다. 과거의 나도 나 자신이다. 과거와 현재는 연결되어 있다. 과거의 나에게 설득하는 마음으로 오래 참으며 친절하게 대한다면 나와의 화해뿐만 아니라 누군가와의 화해도 가능한 틈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김혜진 작가 청소년 문학소설 ‘밤을 들려줘’에서 발견한 ‘다층적 공간’은 틈을 의미한다. 지금은 지나가기 불가능한 좁은 공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끊임없이 조금의 틈을 낸다면 언젠가 허물어질 벽일지도 모른다. 10년 후, 이렇게 달라졌을 줄 몰랐던 것처럼 퍼피레드가, 버뮤다순복음교회가 그 공동의 다층적 공간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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