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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시대성의 창

[시대성의 창] 지옥에도 맞설 수 있는 용기

자유의새노래 2022. 7. 24. 20:48

 

인간이라면 “미안해”
이 한 마디 당연한데
말할 용기도 없으면서
지옥을 어떻게 이기나

 

사이비 종교 S집단이 미인계를 사용한 모양이다. 고개를 흔들며 “그런 인간, 거르는 게 답”이 나올 만큼 친구 얼굴은 찡그린 상태였다. 누가 순박한 내 친구에게 미인계를 사용했는지 몰라도 그 종교 참 몹쓸 집단이란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순수한 감정을 자극해 불러일으킨 연민에 느끼는 감정을 부정하던 가스라이팅 수법이 저급했다. 진지한 대화 끝에 아는 사람을 소개시켜주고 특정 교리를 공부하도록 이끄는 과정이 S집단 자체를 가리켰다. 인간이라면 충분히 느낄 불편함에 대고 “그런 감정 느껴서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냐” 물었고 불쌍함 최대한 끌어 올려 도움 받으려다 선 긋는 실력은 다시 봐도 하수(下數)였다.

코로나19 첫 집단감염이 특정 종교 집단에서 출발하자 그 무렵 빠져나온 탈퇴자를 만났다.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따로 있었다. 내가 알던 그 집단 시스템은 대개 10년 전 정보이기에 지금도 이어지는지부터 가볍게 물었다. 성경공부 마치고 신앙생활하며 이전처럼 계속 공부하는지, 체감상 젊은이가 많은지 늙은이가 많은지, 메신저 통해서 실시간으로 보고한다는 설이 사실인지, 보통 몇 년 차에 탈퇴하는지. 이제껏 접하지 못했던 전도 단계 매뉴얼부터 등급, 심리적 전술, 실적에 따라 분류되는 신도, 전도실적 등 경험해보지 못하면 모를 정보들을 나열했다.

탈퇴자가 지적한 S집단 포교 방법은 심리 전술에 강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찾아가 성경을 건네며 “이게 해답”이란 답과 함께 교리를 권하는 방법이다. 철저히 조사해 찾아간 준비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우연을 가장해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포교도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지만 여전히 교활했다. 순수하고 순박한 사람 마음 이용해 정보를 얻고 획득한 정보를 가지고 장악하려는 가스라이팅이, 다시 말하건대 저급했다. “심리적 상담을 약속하고 만남을 약속하는 단계가 있는데 흔히 우위자라고 하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결하는 건데 우위자란 물질적으로 심적으로 대상자보다 높아 보이는 사람을 끼워 넣는 거야. 그런 우위자가 있으면 마음 속 얘기도 꺼내기 쉽기도 하고.”

이 하수들의 낯짝은 교회에서도 익숙하다. 신앙생활 잘 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윽박지르는 참여교회 목사 설교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려 자기 죄를 고백하게 만드는 방법도 그렇다. 자기 잘못을 토로하니 목사와 교역자는 교인 한 사람의 비밀을 속속히 알 수 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서 구원 받겠어요?” “하나님 일에 쓰임 받으려면 시험 잘 넘겨야 해요” 다 똑같은 조련(操鍊)이다. S집단만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성경적이라는 단어로 정통이라 자부하는 참여교회도 저급한 수법을 이용해 사람을 교회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런 교회가 천국일까.

철저히 군대 방식과 계급 사회로 자라온 S집단의 최종 목적은 돈이다. 사람을 끌어 모아야 노동력을 착취하고 헌금을 얻어낼 수 있다. 세계에도 유례없는 십일조를 강요하고 지옥 운운하는 한국교회 풍토도 다르지 않다. 교회 성장은 곧 하나님 뜻이라던 교회성장론도 S집단과 다르지 않다. 타 종교에 비해 사회봉사는 하지 않냐고 묻는다. S집단도 자원봉사는 한다. 벽화도 그리고 어르신도 돌본다. 그래서 몇 명 전도했는지 물었다. “이건 노코멘트 할 게.” 더는 묻지 않았다. 심리 전술은 탈퇴 이후에까지도 작동한다. S종교 시스템 상 탈퇴자와 교류하지 못하니 먼저 탈퇴한 사람의 감정조차 모르지 않겠냐고 물었다. “절대 모르지. 생각도 안 해 보고. 그래서 무서운 거지. 그냥 딱 주어진 만큼만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그리고 가장 궁금했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탈퇴하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 “죄책감.” 자격지심인 줄 알았다. “전도를 시도했던 많은 사람이지. 정말 수백 명을 말 걸고 방해했겠지. 그게 좋은 건 줄 알고.” 그는 신과의 모든 관계가 무너진 후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 고통이 어떨지 가늠이 되어 위로를 건넸다. “나도 ‘용기 내어 교회를 벗어났다’ 이렇게 표현 많이 해. 고백하자면. 용기가 없어서, 지옥에도 맞설 용기가 없어서 교회를 못 나왔거든.” “그렇지. 다들 그럴 거야. 나도 나온다는 결심이 가볍지 않았어.”

이쯤 되니 전도한 숫자에 대답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미안한 마음의 죄책감이 허탈감을 앞서다보니, 숫자조차 자랑거리 되지 못했다. 그저 미안한 마음에 허탈감이 앞선 수준이었다. 지옥에도 맞설 용기는 미안한 마음을 불러왔다. 미안한 이들에게 찾아가지 못해 실제 사과나 들고 와 ‘사과데이’ 따위나 만드는 참여교회 목사는, 지옥에도 맞설 용기조차 없는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