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가 재건축조합으로부터 예배당 침탈을 당했을 때의 일이다. 교인들은 향린교회 바깥 어두운 골목길에서 초라해 보이는 고난주간을 보내야 했다.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힘없이 부르는 침참속 교인들 풍경이 낯설었다. 낯선 것은 예배뿐만이 아니었다. 기도하는 신자 분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았다. “십자가도 없이 싸늘하게 식은 저 예배당 안에서 홀로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그 예수를 우리가 구원해야 할 때”라고 규명한 그분은 예수의 힘없는 무력한 광경을 목도했다.
기독교인에게 신의 전능성은 ‘무소부재’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엇이든 구해낼 수 있는, 무엇이든 가능한, 미래의 일들까지도 감찰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러나 현대인에게 기독교적 신은 허상으로 보일 뿐이다. 전쟁을 막지 못했고, 죽어가는 사람들조차 구하지 못했으며, 고통 속에 신음하는 노동자와 절망으로 스러지는 노인들의 고의적 자해를 막지도, 없애지도 못한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유행처럼 번진 현대 찬송 ‘nothing is impossible’은 말 그대로 신은 인간에게 성도 무너뜨리고 눈먼 자도 눈 뜨게 할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새능력교회도 그렇다. 이름 자체에서 느끼는 것처럼 무능력한 기독교인을 일깨울 담임목사의 욕망 그 자체를 담았다. 이들이 믿는 모든 것 가능한 신 개념과 이들이 살아가는 무능력한 신이 다스리는 지구와 충돌하며 벌어진 불일치는 인지부조화로 이어진다. 전 교인을 상대로 저지른 노동 착취와 “회개하지 않아서” “예배 생활하지 않아서” 행위 중독을 신앙 덕목처럼 설파하는 현상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예수는 모든 이들이 바랬던 로마의 해방을 이뤄내지도, 제자들이 바라던 인사도, 손목에 묶인 포승줄조차 풀어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교회생활 하고, 매일 매일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슬퍼하며 통곡함으로써 기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나는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예수를 믿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부활의 희망은 미동조차
느낄 수 없던 새벽 여명
가장 어둔 절망적 순간
시간에 갑자기 찾아왔다
흥분한 나머지 고린도 서신서를 인용하며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 믿음도 헛될 것”(1고전 15,14)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당시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나귀 탄 예수에게 “호산나!” 소리친 인간들의 욕망이 지금의 한국 개신교회와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다. 어차피 예수는 부활할 테니까. 어차피 예수는 헬조선의 압제를 끊고 우리를 해방시켜줄 테니까. 따라서 갑작스런 예수의 무능함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의 당황한 표정이 교회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무기력하게 죽지 않았다. 예수는 동성애를 배격하기 위해 힘없이 죽음으로 내딛지 않았다. 예수는 이 지구에 기독교 왕국을 만들기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예수는 단지 살아났다는 쾌감을 선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았다. 예수는 그 따위 인간의 욕망을 이뤄내기 위해 이 땅에서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았다.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그 예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번역하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그 예수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 했고,(누가 4,18) 마음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했다.(마태 5,3) 그러나 이미 자신의 욕망과 함께 예수를 부활시킨 이들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려는 목적’을 부정한다. 그 예수를 무능력한 예수가 아니라 파워풀 초특급 새능력 예수로 만들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으리라고 지껄이며 성경을 부정한다. 무력하게 죽은 예수를 다시 죽임으로써 내가 만든 예수를 내세우는 행동이 예수를 시험하던 마귀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묻는다. 당신은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어도 그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 설령 당신을 구원하지 못하여도, 당신은 예수를 사랑할 수 있는가. 로마의 압제에 그저 힘없이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는 그 예수를 따를 수 있는가. 예수가 부활할줄 모르던 제자들은 그 예수와 먹고 자던 긴밀한 관계였음에도 줄행랑(마가 14,52) 뿔뿔이 흩어지고(마태 26,56) 말았다. 그런 예수의 시체 앞에 옥합을 바치던, 니고데모처럼 덤덤한 마음으로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말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여전히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며 선지자로 취급하던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예수는 빛의 강렬함을 내보이기 위해 가장 어두움을 택했다. 점차 어두워지는 새벽 여명이 오기까지 기나긴 시간을 침묵하며 죽음 상태에 이르렀다. 니고데모도, 제자들도, 여인들도 그 어두움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부정해도 반드시 그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예수의 부활도 예정되어 있다. 그 밝음 속에서 적나라하게 비치는 인간의 모습에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즐거워한다. 욕망으로 얼룩진 인간이라면 두려워 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인간이라면 나약한 예수라도 당장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지 않아도. 권력의 오른편에 자리를 내주지 않아도 그 힘없는 예수의 부활을 가장 기뻐할 것이다. 교회는 예수의 죽음에 기뻐할 자신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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