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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시대성의 창

[시대성의 창] 가해자 文法

입력 : 2021. 03. 01  19:38 | A29

 

 

 

 

모든 사람을 두 부류로 분류할 수는 없다. 인간의 다양한 결을 관찰하다 마주치는 아름다움이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내 편과 네 편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은 비정상이고, 나는 정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문법을 발견했고, 이 문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고등학교 1학년 입학하고 실장으로 자처한 녀석도 같았다. 나보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미모가 누가 봐도 호감을 주었고 선생님의 신임을 받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와 사이가 틀어졌다. 실장이란 녀석이 특정 과목 선생님을 왕따 시키려고 모의하질 않나, 철없는 친구들의 주먹 다툼에도 아랑곳 않으며 말리지도 않으니. 그 녀석의 인간적 평가를 저급하다고 평가한 마지막 이유는 다름 아닌 내 사랑하는 친구를 어렵고 힘든 지경에 밀어 넣은 사건들 때문이다. 하나의 날(日)도 아니라 오랜 시간 내 친구를 격투기 경기장으로 밀어 넣고서도 침묵으로 방조한 역겨움을 보고 가장 정상적인 인간이야 말로 가장 역겨울 수 있다는 교훈을 알아차렸다.

석식 다 먹을 시점에 또 다시 내 친구의 말꼬리를 잡으며 괴롭혀대기에 나서서 사실은 이게 아니고 저게 진실이라 말하기에 이르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네 녀석이 무엇이관대 끼어드느냐.’ 침묵으로 일관하자던 선동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 날 보충 1교시 수업에서 유일하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업에 성실히 참여하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친구들의 흥미로운 재밌거리가 사라졌다. 그 광경, 실장이 주도해 반 아이들이 싫어하던 영어 선생 왕따 시키려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분위기가 느껴지자 웃음이 나왔다. 즐거웠다. 내 뒤에는 내가 믿는 신념, 야훼 하느님이 자리했다. 괴롭힘 당하던 친구와 학교 바깥에서 놀고, 공부했다. 그 친구를 제외하면 반 아이들과 딱히 소통하지 않았다. 성경 보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돌에 관심조차 없었던 시절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옳은 일은 옳다고
그른 일은 그르다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멋있는 거라고


철저한 외부인 자리에 서자, 누구와도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자유인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외롭지 않았다. 늘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했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생각으로 매일매일 가슴이 설렜다. 바람이 부는 하늘 구름 바라보며 하느님의 손길에 감격했고, 성경 읽지 않은 날이라면 꽃과 나비를 보면서 사귀자고 고백도 했다. 그걸 지켜보던 문학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았고, 순수 문학 청년이라며 외부인의 공원을 지나쳤다. 실장이란 놈은 학기가 끝나갈 무렵까지도 왕따 당하던 또 다른 친구 하나 보살피지 못했다. 탄핵도 이런 인간이 당해야 하지 않은가. 일 하나 못하는, 왕따 하나 대처 못해 기어이 친구의 사진속 얼굴이 압정으로 뚫리는 광경을 보고만 있는 무능한 정권. 담임은 실장이 아니라 나를 불렀다. 그 친구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고.

언제부터 실장 녀석 괴롭힘은 사라졌다. 담임을 욕하며 미워하는 말들을 쏟아내자, 선생님께 말씀드린 직언이 잘 통했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은 체육계와 연예계 폭력 논란이 벌어지는 작금의 상황에 무슨 감정을 느낄는지. 10년이 지나서도 스스로를 정상으로 상정하는 인간들의 문법을 접하거든 가장 비정상일 가능성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다양한 군상에 불과하다. 엄연한 사실 앞에 정상과 비정상의 분류가 무슨 소용인가. 멋들어지게 꾸며낸 아이돌을 예찬하고, 찬미하는 근거도 멋있기 때문이다. 순환논리가 만들어낸 아이돌의 허상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실장 아우라에 보이지 않았던 그간의 민낯. 담임의 충격도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1학년으로서 마지막 등교가 다가왔다. 평소라면 성경책을 읽었어야 했다. 그날은 읽기 싫었다. 복도 끝 같은 자리를 뒷짐 지고서 맴돌았다. 브로콜리너마저 ‘졸업’을 불렀다. 가사가 완전히 와 닿지는 않았다. 담임께서 나를 불렀다. 자신의 마음을 담은 파란색 봉투를 건넸다. 두 장 빼곡 담긴 선생님의 문체에서 마음과 마음이 통한 그간의 관계가 생각났다. 나는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에 맞설 힘을 갖춰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 힘은 옳은 일에 옳다고 말하며, 그른 일에 그르다고 말하는 사람과의 연결된 관계에서 갖출 수 있다.

옳은 일은 무엇인가. 코로나 파동에도 광화문에 떠들어 댈 자유? 예배당 문 열어 놓고 일천 명이 예배할 자유? 웃기지 마라. 정의란 인간마다 다르다는 정의로 우매한 인간 등쳐먹는 거짓말쟁이 참교육시켜주는 게 그게 옳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