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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시대성의 창

[시대성의 창] 대안격 사랑의 죽음

입력 : 2021. 01. 23  23:51 | A29

 

 

갑자기 발생한 고열에 죽을 뻔 했다. 코로나는 아니었다. 올 겨울 한 번도 틀지 않은 전기장판 급하게 펴놓고 이틀 종일 앓아 누웠다. 내게 가장 어려운 일은 피아노 배우는 일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공부도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삶에서는 비로소 몸살에 걸려서야 주의를 기울인다. 피로가 누적된 만큼 생활 패턴이 올바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일에 중독된 듯 ‘이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감정이 거짓말 못하는 몸의 언어인 몸살로써 제동이 걸려서야 깨달을 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잘 못한다. 한병철이 아렌트의 ‘활동적 삶’을 지적한 것처럼 할 수 있음의 세계에서 타버리는 영혼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할 수 있음의 세계는 자기 착취적이다. 스스로가 경영인이 되어 자신을 부려먹는다. 제동 장치가 없어서 멈추지도 않는다. 문제는 대안으로 포장하여 괜찮은 상품처럼 전시되어 진짜처럼 행세하는 기만(欺瞞)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에 귀감을 준다. 초등학교 1학년. 매일 하교 후에 집을 나섰다. 자전거 타고 마을을 떠돌아 유랑했다. 갇혀 지내는 공간이 싫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음 속 어딘가에 이곳저곳 둘러보며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자리했다. 모르는 친구를 거쳐 갔다. 넓게는 남의 집 아버지와도 놀기도 했다. 하교 후의 놀이야 말로 진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반복되는 패턴 주입과 좌측통행 같던 교육은 우울하게 만들었다. 선생님께 반항한답시고 숙제도 해가지 않았다. 뺨도 뜨거웠고 손가락도 부어올랐다. 그러다 이런 질문과 마주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살아가는 건 무엇일까.’ 다음 날 선생님께 얻어맞기 싫은 불안감에 던진 질문이었지만 지금 나 자신을 추동하는 근본 질문(root question)으로 남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냐.’


전통적 기반이 무너진
틈 사이에 자라난 代案
이렇게 질문해 보시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


모든 것이 대안으로 등장했다. 기존의 전통이 무너진다. 학벌이 나댈 만한 근거조차 되지를 못한다. 그렇다고 돈이 제일일 수는 없다.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돈을 벌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고 철학은 어렵다. 아니 사람들이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윤리적일 거라 믿어온 종교도 외면당한다. 그제서 전통의 틈 사이에 피어오른 독버섯이 대안이란 가면을 쓰고서 자라난다. 전통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통이 아니기에 매력적이다. 보수도 진보도 해결하지 못하기에 대안이 필요하다는 논변을 늘여놓는다.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과 함께 새로운 직업을 붙여 준다. 아티스트, 디자이너 같이 중립적인 요소를 극대화해 아름답게 포장한다. 나답게 살아가는 삶을 아름다운 미덕으로 여긴다. 실은 나다운 것도 사회적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데. 디자인은 죄가 없는데….

포장은 질문을 숨긴다. 질문을 꺼내어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집단이란 영향력으로 틀어막는다. 멋들어진 교회 건물에 피피티 화면 속 영양가 없는 설교만 문제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엘리야 단 한 사람 대 팔백오십명,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가짜의 개수를 부풀리며 소수자의 목소리를 쥐어 튼다.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피아식별이 어렵다. 내일은 내가 그 적이 될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도 않은 진짜들은 에덴의 숲으로 숨는다. 가짜만이 남은 사회에 횟수와 개수를 가지고 득세한다. 이들이 성과주의와 능력중심 사고를 가질만하다. 이들은 전통이 무너지는 혼란한 사회에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냐’를 질문하지 않는다. 살아남아야 할 공포 속에 백지장 같은 표정으로 연대라는 단어를 들먹인다. 분명히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이들을 대항할 방법은 이들 문법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질문이다. 아니라고 말하면 적으로 간주할 테고, 맞다고 말하면 동조하는 꼴이 될 테니. 이도 저도 아닌 되묻는 자세로 물어보라. 그들이 누군지 모를 때야말로 유효하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냐’라고 물으면 피아식별이 쉬워진다. 디자인처럼 모두가 올바르게 보이는 구호나 이념을 걷고서 구체적인 방법들을 늘여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구체적일수록 민낯을 드러낸다. 내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냐’고 묻는다면. 이달의소녀 걸 프론트(Girl Front)를 시청하라고 답할 것이다. 그럼 당신의 러블리즈는 어디가고 벌써 딴 아이돌이냐고 물을 것이다. 당신이 대안 아닌 그저 흘러가는 농담쯤으로 여기는 것처럼 피아식별이 분명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