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하기 싫어서 대강당을 나가려던 차에 동급생과 눈이 맞았다. 점심을 먹자기에 식사했고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대학원 카페에서 2차를 보냈다. 세 시간 이어진 대화는 지난 번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신학교에 입학해도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며 한 숨 지었다. 기나긴 대화는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이끌어 가셨는지 재차 확인하던 자리였다. 그러나 그 뒤에 찾아오는 빈 공간, 다음 인생사 이야기를 어떻게 써내려가야 할지를 모르는 막막함이 느껴졌다. 촉. 그 때의 촉은 빗나가질 않았다. 미소는 밝지 않았다.
일찍이 자퇴한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 사진까지 보여주며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영적인 세계에 몰두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은 내 앞에 앉아서 곱상하게 웃기만 하던 이 자매는 인터콥 회원이다. 7년 전에도 인터콥이 어떤 단체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들 회원을 강하게 붙잡던 거대한 이야기 하나. 복음의 서진(西進)이 이스라엘에 이르면 예수가 다시금 재림할 거라는 강한 믿음체계 신봉하던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단체 인터콥 창시자 최바울은 5년 전 목회자 국제선교 컨퍼런스에서 구속사적 신학으로 알려진 신약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를 인용했다. “사도바울 관점은 구속 역사 그 자체의 사실이 중심이다. 그것은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다.” 구원에는 순서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갈 보이지 않는 손에 주목한다.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도 하나님이 만들어가는 마지막 시대, 종말의 때에 인터콥과 대한민국을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다는 믿음체계다. 따라서 통치자가 나타나 세계를 통합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다던 80년대 세대주의 종말론을 재인용한다. 우리 손으로 마지막 시대를 만들어가자는 거창한 구호쯤으로 보일 테지만. 거대한 하나님 나라 비전에 이끌려 기꺼이 헌신하는 착취 구조를 들여다보거든 눈에 띄는 ‘빈 공간’이 거대 담론으로 가득 차 있는 모순이 보인다.
인터콥서 벗어난 심정
누구보다 이해하니까
신앙에서 벗어나 함께
모름의 바다 유랑하자
따라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끌림을 받았다는 선민사상과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던 우월감은 현상에 불과하다. 너는 꿈이 있니? 그런 시시한 세상의 꿈? 열강으로 가로 막힌 가련한 이 나라 대한민국 통하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헌신이 필요해 같은 꿈꾸는 자의 담대한 포부는 성경의 특정한 구절을 견지망월(見指忘月)하게 만든다. 압도하는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면 지식쯤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기도와 복음 전파에 힘쓰자는 구호로 한 사람 한 사람 인터콥을 움직이는 부품으로 전락한다. 지금도 바벨탑 세우려던 ‘벽돌’에서 세상지식을 초등학문으로 비유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기술쯤으로 묘사한 최바울의 설교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인터콥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낯설지 않다. 40년 전 오정현이 상품으로 내다팔던 무브먼트였다.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은 탈합치(De-coincidence) 개념을 꺼내들었다. 미완성 같은 피카소 작품에서 가장자리를 주목했다. 칠하지 않은 그림과 캔버스가 합치(coincidence)하지 않고 이탈한(de) 어긋남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교회에서 무리에서 집단에서 제도권에서 이탈하면 지옥 간다고 겁박한다. 네 마음의 빈 공간을 내가 우리가 만든 별이 끌어당겨야 한다고 말한다. 선한 의도 안에 숨겨둔 악마의 미소로. 내 앞 자매의 미소를 관찰하자 곧바로 감성주의(感性主義)와 척을 두었다. 기독교 신앙을 벗어나기까지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지옥에도 갈 수 있다는 불안감 말이다. 사람을 물건처럼 부려먹는 허황된 별. 그 별 좇아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는 비정상 구조. 그 때의 촉은 지금도 발동한다. 누군가 신념에 차 별을 말하면 믿지를 않는다. 그 별은 머지않아 신념과 함께 빛바랜 청사진처럼 타버리기 때문이다. 모름의 바다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변해가고 모든 전통이 무너지는 시대라서 이해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고, 불안할 수 있다. 불안 행위 그 자체가 잘못되고 나쁜 현상이 아니다. 때로 불안한 마음이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게 만드는 친구 역할도 한다. 이 길이 옳은 건지, 신학을 전공한 자신의 선택을 돌아본 동급생의 눈에서 불안을 읽었다. 교회 다니지 않는 남들과 다른 시간표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무렵, 나 역시도 남들 신학생과 다른 시간표를 살아갔다. 실체 없는 불안은 사라졌고, 다시금 신앙을 재정립했다. 이탈한 어긋남. 프랑수아 줄리앙이 발견한 탈합치의 경계에서 유랑할 때 발견하는 새로움은 교회를, 신앙을 벗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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