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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시대성의 창

[시대성의 창] 신연수 동아일보 논설위원 사표를 바라본다

자유의새노래 2020. 12. 29. 06:30

입력 : 2020. 12. 29  06:30 | 수정 : 2020. 12. 29 06:50 | A29

 

 

 

 

4년 전 겨울에도 논설위원이 사표를 내고서 신문사를 떠났다. 그의 마지막 칼럼 ‘아버지, 지지자, 국가에 상처를 준 박근혜’는 허상의 공포심을 완화하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저런 사람이 중앙일보에 남아 있었냐”고 힐난했다. 사람들은 같은 편이 되어주지 않은 그를 비난했다. 대통령의 불통(不通)을 지적하자 침몰하는 박근혜호(號) 갑판의 생쥐로 비유했다. 멀찍이서 바라보면 다르다. “모든 정권이 다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다”고 비호했다. 지금에까지 박근혜 향수에서 머무른 그를 바라본다. 달라지지 않은 존재는 김진 뿐만이 아니다. 중앙일보가 그렇다. 편집방향은 신문사 어디에나 존재한다. 기자윤리강령상 취사선택도 어디까지나 진실을 존중하는데서 유효하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문구가 무색하다.


지난 달 큰삼촌에게 전화 걸어 몇 가지를 여쭈었다. 내년부터 한겨례가 토요판만 타블로이드 크기로 발행한다는 기사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보던 신문을 끊었다고 고백했다. 정반대 논조 싣던 신문임에도 삼촌도 안타까워했다. 사람들은 지면신문을 보지 않는다. 신문을 대체할 방송사와 나무위키 덕분이다. 전통 미디어에 균열이 생기자 사이버 렉카라 이름 짓는 인간들이 파고들었다. 바깥에서 떠도는 반응들과 감정들을 사실이라 포장한다. [바로잡습니다]도 [알립니다]도 없다. 선택적 사실들을 추종할 뿐이지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신문업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앞으로도 무너지진 않을 거다. 창간 백 년 맞이하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성대한 자축을 이어갔다. 타임캡슐 묻었고 100년 사(史) 단행본도 발행했다. 문제는 이름만 남는 두 신문사 풍경이다. 박근혜를 비호하던 사람들의 축하 메시지가 댓글로 보였다. 친문과 친박으로 갈라진 파도가 신문사 바깥에서 거세진다. 달라진 게 없었다.

 

 

한 논설위원의 사직표
바라보며 느끼는 슬픔
할 말하던 비판 앞에서
해야 할 말을 생각한다

 


구의역에서 외롭게 죽은 노동자를 향해 “걔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다”고 말한 변창흠이 임기를 시작한다. 조선·동아일보는 구의역 노동자 거론하며 사설 통해 변창흠을 비판한다. ‘부동산정책관’ ‘인사청문회 강행’. 그 사이에 낀 노동자는 부동산과 인사청문회 사이에 끼어서 죽어서도 고통당한다. 인공물 세계에서 사망한 김모 군의 죽음들을 막기보다 변창흠에 문재인을 엮어서 힐난한 독자들 반응은 기막히다. 우리 사는 세계의 문제는 무엇인가 되짚지를 않는다. 비난과 야유, 힐난을 넘어서 정권을 창출하고 세력 얻고 싶은 욕망들을 드러낸다. 인기몰이와 돈에 눈이 먼 이들은 이제껏 챙기지 않았던 사안들을 카드처럼 꺼내든다. 사이버 렉카가 한 순간에 외면당한 이유를 신문사만 모른다. 아직도 100년 역사 앞에서 사람들이 1등 신문, 민족의 정론지 칭찬해 주는 줄 안다.


그리고 어제 또 한 사람 논설위원이 신문사를 떠났다. 사람들은 “동아일보 맞아?” “저 사람 아직 안 짤렸어?”라고 힐난했다. 스스로 동아일보 이미지를 바꾸는데 기여한 자신을 생각했다고 한다. 착각이었다는 일곱 글자에 31년 언론인의 세월이 뒤집혔다. 짧은 문장 속에 하고픈 말들을 함축해 적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회사가 필요하니까 나를 쓰지” 생각했다. 착각이었다고 한다. 신연수 논설위원이 써내려간 짧은 문장들을 바라본다. 어렵지 않은 단어들 사이에 숨은 분명한 말들이 보인다. 옳은 말, 해야 할 말들 앞에서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 모두가 이해 가능한 단어를 나열한 노고가 보였다. 외면 받은 사건들과 이름들을 기억에서 건져내던 그가 보였다. 많은 이들이 알아야 할 정보들을 모아 놓은 신문의 강점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다를 때면 가르친다. 감정부터 내세우는 한 민족을 저주하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내부에서 올라오는 비판들을 거부하고 진영 논리를 앞세운다. 이 신문 자유의새노래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다. 반(反) 기독교 논조가 정론직필의 자유보다 먼저냐고 묻는다. 멋있게 보이려고 만든 문구보다 중요한 건 해야 할 말이다. 생각이 달라도 힐난을 던져도 해야 할 말은 정의와 정직이다. 믿었던 목사의 민낯을 드러내야 하고. 토대가 흔들린다 하더라도 교회 안 노동 착취는 폭로해야 하고. 소수자를 탄압하여 교인들을 남겨두는 정치적 술어를 걷어내야 하고. 집단 유지 위해 세습하는 대형기업 향해서 “정의롭지 않다”고 외쳐야 한다. “이제 입을 벌려 말하고, 손을 들어 가리키고, 장막을 치워 비밀을 드러내야 한다”던 드라마 속 이창준의 자필이 내레이션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