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대화를 마쳐도 미동 않는 녀석을 쳐다보며 한 숨만 쉬었다. 휴학을 선택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자명했다. 4년은 마쳐야 않겠냐는 지극히 당연한 말들에도 대답이 없었다. 신학교는 졸업해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목회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세상에서 시작해야 한다. 악수조차 건네지 않는 목사의 철없는 행보를 오냐오냐 챙겨줘도 모자랄 판. 신앙은 고사하고 생계조차 챙기지 못하는 현실에 퇴학을 결정한 녀석의 행보를 마냥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
교회와 신학은 괴리 그 자체다. 오죽하면 현장이란 말, 필드(field)로 나와 보면 시선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을 지경이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써먹지를 못하니 전도부터 성서신학, 조직신학에 이르기까지 무의미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교회 성장 위해서 이것저것 프로그램 가동하는 교회들의 눈물의 똥꼬 쇼를 보다보면 신학생은 생각한다. 오직 예수만 말하면 되지 않겠냐고. 순진한 아이들 장난을 뒤로하고 신학교 졸업해 보면 현실의 벽을 맞닥뜨린다. 아, 오직 예수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구나. 열심히 기도만 하다가 강동헌 감독의 ‘기도하는 남자’처럼 아내도 위험해지고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겠구나.
주옥같은 교회의 현실 괴리
하나, 둘 떠나는 신학생 보니
빠르게 등지고 제 살 길 찾은
녀석, 너의 삶을 보고 싶구나
생각해보면 학문과 현실의 괴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학문은 현실의 환경과 상황을 망라해 분석과 연구를 통해 정리한 지식 체계다. 이미 현실과 괴리를 가진다는 말은, 그 학문이 문제거나 아예 학문에는 접근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국의 다른 분야야 말할 것 없겠지만, 유독 교회의 학문과 현실의 괴리는 골이 깊다. 오직 예수는 소꿉장난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치를 섞거나 타 종교의 상품을 섞어서 판매한다. 순수 기독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몰리기 위해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교회에서 예수를 발견하지 못하고 떠나간 신학생들이 한 둘이 아니다. 녀석도 그런 신학생 중 한 사람이다.
선교단체를 통해서 해외로 여행하겠다던 그의 바람은 실현됐다. 군화에 짓밟혀 옥수수 밭 갈려 나가는 나약한 미얀마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100원 짜리 국수를 먹으며 그곳 공기의 냄새를 말해주던 그도 선교단체는 못 미더울 것이다. 그러나 꿋꿋하게 신학교 4학년을 보내고 하고 싶지 않을 일을 할 바에야, 선교단체 발판을 밟고서 세계를 유랑하는 그의 선택이 어리석었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떻게 살아가든, 삶은 자신만의 것이라는 사실. 정형화된 정답이란 없다는 당혹. 녀석에게서 흥미로운 삶의 향기를 느꼈다. 그리고 1년 만에 다시 연락했다. 이제는 요르단이라고 한다. 이스라엘과 맞닿은 지역에서 선교가 아닌, 녀석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움직인다. 5일의 합숙도 괜찮은 모양이다. 선교단체 특유의 불편함에도 상관없다. 자신만이 걸을 수 있는 방향을 개척하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을 응원해 마지않았다.
니체는 긍정적 허무주의를 말한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것을. 신의 시체 냄새가 적나라하게 풍기는 현재의 시간 속에, 죽은 신의 사체를 끌어안기보다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지금의 시간 속에 오로지 내 삶을 살아가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 즐거움과 행복을 버리고 마는 수많은 청춘의 슬픔 앞에 할 말은 없지만. 그럼에도 다가올 내일을 즐겁게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깨달았다. 내가 나 다울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사치스럽다. 경제계획5개년도 우습다. 당장 1년 후도 예측할 수 없는 유동하는 시대에 무엇을 계획할지보다, 무엇을 실현해 갈 수 있을지부터 물어야 하지 않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1년 후, 네가 돌아온 서울에서 술 한 잔 기울이는 게 실현할 수 있는 첫 계획인 것처럼. 보고 싶다 이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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