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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일과속기록

[일과속기록] 네 삶 속으로

자유의새노래 2023. 6. 6. 21:46

 

 

지상천국에 숨겨놓은 욕망들
폼만 잡고 신의 이름만 되뇌니
신이니 정의니 저 세상 타령만
그 무엇이 속일지라도 현실로

 

 

불가지론자인 내 취미는 기독교인 관찰이다. 한국에서 꽤 많은 종교인을 보유한 개신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게 사람들이 다채롭다. 시간 순으로 나열하자면 상고적 토테미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부터 우주를 뚫고 신과 한판 승부 보려는 이들까지 광활한 경계가 흥미롭다. 개신교인 분류 속에 다시 샤머니즘과 현대 기독교로 나뉜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넓디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관찰한다.


한 달에 두 번 방문하는 전문의도 대상이다. 처음엔 교회 집사나 장로라고 짐작했다. 책장에 가득한 조직신학서, 성경책, 컴퓨터 화면 속 숨은 신학 논문까지. 어쩌면 목사일지 모른다. 지하 약국 들렀다가 낯익은 이름의 기독교 서적을 집에서 검색해보았다. 같은 사람이었다. 의사를 겸하면서도 목사를 하다니. 대단했다. 약사도 읽던 중인걸 보면 이곳저곳 전도에 충실한 모양이다.


진료를 마치자 시간이 남았다. 내 직업이 기자라는 것 정도는 알던 사이다. 슬쩍 교회를 다니냐 묻기에 나도 모르게 “전공은 신학”이라고 답했다. 그리 답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필 전문의가 졸업한 학부와 같은 학교였다. 자신이 집필한 창공한 하늘색 저서를 가져다 싸인 후 선물했다. 보름 지나 진료 예정이니 그때까지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성서신학이 아니라면 읽지도 않는데.


더는 나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기독교 핵심 교리를 일부 변형해서 믿거나 어떤 건 아예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원죄론은 믿지 않지만 부활은 희미하게 믿으면서 재림은 또 믿지 않는 짬뽕 신앙이다. 늘 종교는 없지만 신은 믿는다고 말하는 이유다. 열에 일곱은 무책임한 정체성에 의문을 가한다. “그런 신앙도 있나요?”라고. “그게 왜 불가능하냐”고 반문한다. 신학 박사까지 취득한 전문의도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전문의 전공처럼 조직신학은 경직된 성서를 촉촉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은 드넓은 이 땅 지구의 문제를 다루기엔 한정적인 메시지다. 변론이랍시고 부드럽게 내뱉은 대답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미약하게나마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저 믿기 때문이고 믿어야하기 때문인 신앙이다. 그럼에도 경직된 교리는 신자들에게 일시적인 위안 정도는 제공한다.


며칠 전 나는 신을 죽이고 싶었다. 고단한 삶 틈으로 스며들 경직된 교리란 없었다. 신 정도는 믿으니까 내뱉은 원망이었다. 그래도 성서는 지혜문학을 통해 ‘겸손히 살라’고 일갈한다. 그 시간 너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라고 말이다. 짜증나게도 신은 하룻밤 불평불만에도 오늘의 마실 공기와 시간을 베푸는 것처럼 군다. 까닭 없이 지구가 존재함에도 신은 인자한 미소나 지으며 자기 세상인 마냥 근엄한 척한다.


나그네 되어 묵묵히 임차 받은 지구를 가꾸며 사는 삶. 내 것처럼 소유하는 게 아니라 내 것처럼 쓰다 돌려주는 삶을 생각했다. 어차피 이 지구는 인간의 것도 신의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욕망 섞어 천국을 만들어갈 때 끔찍한 지옥을 마주할 뿐이다. 어차피 자기 것도 아니면서. 서신서는 나그네의 삶을 강조한다. 이 땅, 너의 것이 아니라고. 신조차 이 지구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할 때 심판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신의 이름으로 이 지구를 가지려 할 때 등장한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이 뒷받침한다.


이제는 죽어서 받을 심판 개념을 믿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받을 업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인 척하면서 기독교 시장에서 돈 벌어먹는 인간도 그렇다. 쓰다 뱉어버릴 그런 인간에게선 ‘나사렛에서 선한 것 찾기’(요한 1,46)일 뿐이다. 신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직책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당신이 믿는 이념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 받듯, 그저 아픔조차 받아들이며 사는 ‘네 삶 속으로’를 입술로 되뇌며 병원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