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3년 만에 찾은 대전점
의자와 카페 사라지고 말았지만
차곡차곡 쌓인 기억 지나치면서
오늘 살아갈 힘으로 북돋아준다
학부 시절 매일 가다시피 찾아갔다. 지금도 첫 순간을 기억한다. 이 좋은 델 이제야 오다니. 특유의 향기 속에서 탄식 섞인 감탄이 흘렀다. 몇 년 만일까.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 11월 입구 앞에 서자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머금었다. 익숙한 글판. ‘이토록 넓은 세상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 중에 나는 당신을 만났다’ 이젠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로 바뀐지 오래인 듯하다.
중앙에 위치한 카페를 지나쳐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기독교 코너였다. 늘 그랬듯 ‘볼 게 없다. 볼 게 없어’ 내뱉을 뿐이다. 음악과 철학, 인문 코너에 이르자 학부 시절 조별과제가 생각났다. 항상 총대를 메었기에. 오래된 책을 찾거든 도서관으로, 싱싱한 책 찾으려면 이곳으로 향했다. 간학문(間學問) 명목으로 과제에 필요한 책을 이곳에서 헤매었다. 하여 단행본과 논문까지 포함해 열군데 인용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기독교윤리 최종점수가 떠올랐다. 과제는 열심히 했지만 수업을 세 번이나 빠진 고로 처분 받은 C+이 되살아났다.
선배와 마주친 우연도 생각났다. 한없이 신세만 졌으므로 모른 체 넘어가고 싶었다. 정다운 인사를 건넨 선배를 피하지 못했다.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대답만 흘린 매대 앞, 교복 입은 여학생 남학생 무리가 스쳐갔다. 선생님 향하여 가리킨 손가락이 그저 부러웠다. 소설 코너에 이르자 청소년 문학을 살폈다. 잠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낯익은 책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인생에 몇 없는 힘든 시기에 접한 소설 앞에 섰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허상의 세계에 몸을 기대었을까 물었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가능성으로 돌아온 상상의 힘이 이 자리에 설 때마다 솟아났다. 그 힘은 다채로운 지식을 모아 하나의 소설로 엮어낼 능력을 안겨주었다.
지금은 낯선 직원만이 곳곳 돌아다니며 서고 정리 중이다. 의자도 사라진지 오래다. 핫초코 마시며 과제 위한 독서에 여념인 내 모습을 생각했다. 그때 나는 참 열심히 살았지. 지금 이 일로 먹고 살 줄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야. 괴로워하고 불안해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속까지 따끈한 핫초코 내음을 졸업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즐겼다. 추워지던 가을이었다. 카페에선 항시 스탬프 이벤트를 진행했다. 열 번 다 찍으면 음료 한 잔 무료로 준다기에 성실히 사 마셨다. 사실 눈여기던 직원이 있었다. 그분 계실 때만 주문한 덕분에 마지막 도장도 그분 계실 때 찍으리라 다짐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지나서도 안 보이자 그만뒀나 싶어 마음의 갈등 속 마지막 한 잔 사먹었다. 다음 날 거짓말 같이 출근했다. 새 카드 내밀자 “다 찍으신 거예요?” 물었고 서로가 아쉬워했다. 코로나는 그조차 모른다고 말하듯 카페를 매대로 치워버렸다. 덕분에 수많은 이름들 속 문예은도 지워져버렸지만 나는 기억한다.
저녁 9시 45분이면 영업 종료 방송이 나온다. 지겨운 학교로 돌아갈 생각에 발걸음은 무겁지만. 헤어짐이 있으면 다시 만날 그날도 온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나설 채비를 마치곤 했다.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마감 음악 ‘Good bye’. 그때마다 꼿꼿하게 서서 가사를 음미했다. 오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노래는 오르골 멜로디였다. 낭만적으로 기억을 연주하는 작은 음악가 앞에서 바뀌어가는 그림을 가늠했다. 오래도록 머물고픈 그리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교보문고 대전점은 복학하기 1년 전인 2016년 재입점했다. 2007년 이후 9년 만에 다시 연 셈이다. 입점 무렵 글판이 인상적이다. ‘네가 돌아온다니 벌써 가슴이 뛰어. 우리 몇 년 만이지?’ 희망과 불안, 부끄러움과 감탄이 뒤섞인 다채로운 공간. 상상과 망상의 중간에서 현재 위치를 찾게 만드는 자유로운 공간. 우연과 계획이 맞물려 지금을 살아간다. 글판을 보면서 다시 만날 약속을 기약했다. ‘네게 돌아와서 가슴이 뛰어. 우리 몇 년 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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