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마음 박물관④] “너에겐 상처밖에 줄 수 없는데… 내가 없으면 세상이 더 나아질까”

2025년 05월 20일

눈을 뜬다.

새벽 중 유일하게 보이는 건, 창문 너머 달의 뒷면. 다른 빛에 의지해 간신히 보이던 뒷모습은 어쩐지 하릴없이 처량해 보인다. 누가 달에게 돌을 던졌을까. 그의 등엔 온통 파란 멍들 뿐이다. 상처에 연고조차 발라본 적 없는 것처럼 우주의 침묵을 닮은 흉터들. 난 그 흉터에서 태어났다.

우주의 침묵을 먹고 피어난 아이. 누군가는 나를 눈물이라 부른다. 어떤 이는 내게 우울이란 병명을 붙이곤, 역겨운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그래도 난 그 시선조차 고마웠다. 드디어 내게도 이름이 생긴 걸까.

“끔찍해. 다시는 ‘우울’에 발붙이고 싶지 않아.”

나를 향한 온갖 말들은 보이지 않아도 귀를 관통해 들어왔다. 처음엔 사람들이 주는 관심이 마냥 좋았다. 축복받지 못한 탄생, 난 모두가 외면한 존재였기에 무시와 조롱조차 나에 대한 애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 번은 누가 내게 그러더라. 넌 해만 끼치는 존재인데, 뭐가 그리 떳떳해서 지금까지 죽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있는 거냐고. 나도 살고 싶지 않았다. 단지 죽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 그때부터 죽음이 나의 탄생 이유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태어나지도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나요?”

사람들은 내게 죽으라고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지만, 정작 그 방법을 알려주진 않았다. 하루하루 살아있음이 죄책감의 연속이었다.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정작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 나는 뻔뻔하게 살아있다. 그게 날 더 목메게 만들었다. 

죽는 법을 안다는 도사를 찾기 위해 인적이 드문 외길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안녕? 여기 버스 기다리는 사람, 우리 둘뿐이네. 어디 가는 길이야?”

누구지….

햇살이 물결로 번지듯, 그의 머리칼은 금빛으로 흩날렸고, 웃음은 그에 따라 일렁였다.

“너 나 처음 보는 눈빛이다! 우리 구면인데, 너 우울이 맞지?”

그의 목소리가 퍼지자마자, 내 안에 존재하는 줄 몰랐던 심장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이런 게 바로 첫눈에 반했다는 걸까. 그의 환한 온기 앞에서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으응 ….”

앗, 내 마음은 이런 게 아닌데….

어영부영 말을 흐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기쁨이라고 해.”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확신을 더 굳히게 됐다. 내가 살아있다면 기쁨이란 존재는 더 흐려질 거야.

“말 걸지 말아 줄래. 머리 아파.”

그래서 더 차갑게 대꾸했다.

“으응 …. 미안해.”

말의 잔은 비었고, 그 빈자리에 어둠이 자랐다. 보이지 않는 가시 하나가 내면을 더듬었다. 그의 뒤에 드리운 그림자도 한층 두터워진 듯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기쁨이가 내게 물든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공기를 채우는 어색한 침묵과 계속해서 귀를 관통하는 저주의 말들을 지겹도록 들을 때쯤, 우리 둘 사이로 버스의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누구랄 것도 없이 조용히 발을 옮겼다. 별빛만이 어설프게 내려앉아, 상처 입은 그의 표정을 비췄다.

버스 안에서도 우리는 마주 앉지 않았다. 창밖의 별을 새며 그저 도착지만을 기다렸다. 곧이어 기쁨이가 내렸고, 버스 안에 나는 처절히 홀로 남았다.

버스는 그 뒤로 한참 가파른 골목길을 달렸다. 참 머나먼 여행이다. 죽음은 늘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죽음의 도사를 찾으러 가는구나.”

고요함이 마음을 누르던 순간에 버스 기사님이 입을 뗐다.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바로 그 죽음의 도사란다.”

시곗바늘이 실처럼 죽 늘어졌다. 시간은 숨을 죽인 채 벽을 타고 흘렀다.

“그럼…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아는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자, 내 손을 잡아보렴. 그럼 모든 게 끝날 거야.”

가슴팍에서 불덩이 같은 피가 훅 솟구쳤다. 그의 손을 잡은 순간 모든 피가 역류해 그에게로 달려갔다. 숨이 가빠 왔다. 몸이 한순간 고꾸라졌다.

‘이게 바로 죽음의 감각인가….’

비릿한 피의 진동 속에서 기쁨이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난 상처밖에 줄 수 없는 존재였나 봐. 마치 가재와 개구리의 이야기처럼. 그리고 이건 내 마지막 기억이 될 테지.

힘들고 아프고 괴로워
어느 날 내가 죽는다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까

사랑 받지 못하는 난
눈물이란 이름으로
우울이란 병명으로
역겹다는 눈빛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들리는 벼락같은 음성
“나는 늘 너와 함께야
너 없인 나도 없는 걸”

“정신 차려!”

벼락같은 음성이 귀를 후려쳤다.

‘뭐야… 나 아직 살아있는 거야?’

속눈썹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조심스레 시선을 돌렸다.

“기… 쁨이?”

말도, 표정도, 숨결도 모두 거짓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마음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네가 왜… 여기에?”

“일단 여기서 나가자.”

“어떻게 된 거야?”

“버스에서 발을 내딛는 찰나, 내가 바람처럼 희미해지는 걸 느꼈어. 그때 알았어. 네가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걸.”

“그게 무슨 소리야?”

“우울아, 그거 알아? 너와 나는 언제나 같은 숨을 쉬고 있었어.”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기쁨과 우울은 늘 함께해. 무언가 있다는 건, 그 반대도 존재한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없으면, 난 존재할 수 없어.”

그 말이 닿는 순간, 오래 잠들어 있던 마음이 꿈틀거렸다.

시야가 흐려졌고,

어느새 난 그의 품 안에 안겼다.

“우울아, 너라는 자리는 처음부터 비워둘 수 없는 것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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