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 03. 01 | 수정 : 2019. 03. 01 | A29
그동안 갇혔다는 표현을 줄곧 사용하다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말도 금기시하고 말았다.
“자신이 정의하지 않은 남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정진하지 말라”는 말에 움츠리고 고개를 마음속으로 휘젓고 말았으니. 폐기된 ‘자폐’ 뒤에 우리 세대의 박탈감이 자명하고 또렷하게 보였다. 어느 20대가 힘들지 않겠냐만 커뮤니티를 떠도는 90년대 생만 공감할 유머들은 허공에 웃음과 함께 흩날렸고, 머지않아 “뭘 해야 하지?” 물음이 들렸다.
만연한 패배감이 어디서든 등장했다. 모두가 불편하단 말에 희생자 의식은 논리로 둔갑해 시대를 덮었다. 꼰대와 개새끼는 쌍 벽을 이루어 386과 2030으로 양분되어 만연한 패배감을 더욱 완벽하게 감싸 안았다. 이제 만연한 패배감은 지금에서 과거로 옮아갔다. 자조적 헬조선이 가진 불만이 말 그대로 구한말로 옮겨간 것이다. 그래서 방시혁 대표가 한 그 말이 조심스러웠다.
진영에 발 빼고 개인이 되면, 누구 탓이란 말 만큼 무의미한 말은 없을 것이다. 지금을 푸념한들 나아질 건 없기 때문이다. 해소로써 타인을 향한 뒤집어씌우기가 조리돌림이란 정신승리로 완성될 때면. 나아지지 않은 지금, 여기에 공허감은 당연할지 모른다. ‘내’가 있듯 ‘너’가 있으며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너 때문이란 ‘타자’와 지금을 후회한다는 ‘여기’ 앞에 카르페 디엠이 무슨 소용일까.
하루 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단 기사를 읽다 우연히 노인 자살률이 말도 안 될 만큼 높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만이 아니라, 불안 속에 언제 자신도 외롭게 죽을지 모른다던 할머니의 메시지에 시야가 말도 안 될 만큼 좁단 걸 깨달았다. 90년대 생만 공감할 글에서 길가에 앉은 할머니들이 공허한 웃음에 소비될 동안 서른여섯에 노인은 감춰졌다.
나에서 너에게, 너에서 머물지 않고 세계로 외연을 넓히며, ‘과거’와 ‘타자’를 말해도 ‘지금’과 ‘나’에게 갇힌 왜곡된 타자를 발견했다. 왜곡된 타자는 타자로 보이는 또 다른 ‘나’들이 앵무새 되어 푸념을 노래해 지저귀었다. 어제는 오로지 지금 내가 소비할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푸념은 또다시 “뭘 해야 하지” 물음과 박탈감, 무기력을 건넸다. 과거를 말하나 지금을 가리키고 타자를 지칭하나 내가 보이는 건 우연일까.
하지만 방시혁이 말한 불만은 푸념을 넘어선 주체적 반성이다. 반성은 “자신과 주변에 대해 애정과 관용을 가”질 때 가능하다. 외연을 넓히듯 ‘지금, 여기’에 조금씩 한 발자국 옮겨간다면 지금 여기에 저 멀리 보이는 잔인하고 두려운 구한말이 자조감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를 반성한 것처럼 보이는 탈 맥락화란 환상이 깨어질지 모른다.
방시혁의 방점은 자기가 되어버린 타자에서, 타자 속 자신에게 돌아갔다. 또 다른 자신들인 타자는 불만과 함께 여기에 머물지만. 타자 속 자기에게 돌아가 분노할 때 주체적 힘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돌아간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행복할 힘은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이고, 방시혁이 말한 ‘상식’은 내가 결정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이다. 나를 나란 존재에서 내쫓고 나 아닌 타자에게 던져 소외시켰으니. ‘지금, 여기’로 살아갈 힘을 내가 아닌 외부 메시지로 채워 지금, 여기를 소외시켜왔으니.
100년의 봄을 맞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김윤아가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 ‘고잉홈(Going Home)’은 사기에 연루된 동생을 생각하며 만든 곡이다. 자신에게 돌아온 김윤아는 외연을 넓혀 20대에게 위로를 노래로 건넨 것이다. 나지막한 위로는 단지 2010년에 머물지 않았다. 독립을 소원한 이름 모를 독립운동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너의 일을 떠올리며 수많은 생각에 슬퍼진다.” 언제부턴가 얼어붙은 마음 속 희생자 의식이 녹아버리고 말았다.
사학자 임지현은 지적했다. 사회의 기억 문화가 과연 자기변명 중심인지 자기비판 중심인지를 물은 것이다(기억전쟁, 179). 일천구백십구년 삼월일일 정오로 돌아간 김윤아가 동생의 아픔을 외면하고 지금, 여기만 보였다면. 저 멀리 보이는 경성감옥의 아픔을 바라만 봤을지도. 자조로 변모한 헬조선이 여전히 지금, 여기이듯.
카메라는 김윤아에게 다가오며 어두워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나는 너의 일을 떠올리며
수많은 생각에 슬퍼진다.
우리는 단지 내일의 일도
지금은 알 수가 없으니까
그저 너의 등을 감싸 안으며
다 잘될 거라고 말할 수밖에.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아 초조해져.
무거운 너의 어깨와
기나긴 하루하루가 안타까워.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너에게 생기면 좋겠어.
너에겐 자격이 있으니까.
이제 짐을 벗고 행복해지길
나는 간절하게 소원해 본다.
이 세상은 너와 나에게도
잔인하고 두려운 곳이니까
언제라도 여기로 돌아와,
집이 있잖아, 내가 있잖아.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우리를 기다려 주기를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
이뤄지기를 난 기도해 본다.
김윤아, “Going Home”, 3집 315360, 201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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