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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자유의새노래 칼럼

성장 서사가 가르친 한 가지

입력 : 2019. 01. 12 | 수정 : 2019. 06. 07 | A28


“모든 것은 성장하며, 모든 것을 용인한다”는 말은 어느새 낭만이 되고 말았다. 무사고 300일이 무의미한 이유는 일상이며 굳이 의미를 부여한 말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일상을 살아가면 저절로 이루어질 무사고 300일에 성장 서사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대안으로 등정한 성장 서사는 성숙 내러티브라는 이름을 붙이며 과거사를 재해석할 여지를 남겨줬다. 한 시각으로 바라본 과거를 다시 해석하는 과정에서 ‘아닐 수 있다’는 희망을 안긴 것이다. 성숙 내러티브는 선이 아닌 여러 점의 새로운 선이라는 차원에서 대안이 되었고, 한 마디로 수렴했다. “모든 것은 성장하며, 모든 것을 용인한다.”


젠더 갈등이 지지도 차이의 원인은 아니며 특별한 것이라 생각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이 성장 서사를 말했다. 갈등을 겪으며 사회가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70년이 지나 비로소 평화의 길로 들어섰다고 믿기 때문일까. 그 동안 발생한 아픔과 고통은 악수 한 번으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무엇이 달라졌나.


대안으로 등장한건 성장 서사뿐 아니라 진보라는 이름으로 정치, 교육, 젠더, 심지어 종교 영역에서 등장했다. 적폐 청산이란 이름으로 이명박과 박근혜 흔적을 지우려 노력했고 이는 곧 ‘아버지 죽이기’로 이어졌다. 가부장과 권위로 등장한 존재에 대항해 촛불을 들었다. 캄캄하게 가려진 밤하늘 아래 홀로 남은 광화문은 반짝였다.


그리고 김용균이 죽었다. 이민호가 발견됐고, 구의역 스크린도어는 싸늘했다. 제주도 해안가는 적막했다. 진보로 등장한 이들은 노조로, 진보 정치인으로, 진보 신학으로 적폐청산으로 정의를 강조했다. 원하는 정권을 획득하자 입을 슥 닦고선 한 마디 했다. “모든 것은 성장하며, 모든 것을 용인한다”고. 노오력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정의를 위해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들에게 정의는 먹고 사는 것. 이들에게 정의는 최저임금에 겨우 맞춘 급여였다.


티비를 장식한 정의로운 세대의 극악한 범죄를 보며 젠더 문제는 20대 남성이 젠더 감수성이 부족해 벌어진 문제로 보였다. 잃어버린 2년은 누군가에게 뼈아픈 과거사임에도 모두가 힘들고, 성장한다는 이유로 감춰졌다. 그리고 정의로운 세대는 젠더 문제 해소를 20대 남성에게로 돌려버렸다. 무임승차론, 노오력, 헬조선 담론은 인생을 더 살아야 이해된다는 성장 서사로 귀결됐다. 부동산 투기, 노인 비하, 우리식 카르텔. 진절머리 난 20대 남성은 정의로운 세대에 등을 돌렸다. 이쯤 되면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약자를 생각해왔을까 고민은 해야 하지 않나.


성숙 내러티브는 무사고 300일 팻말과 다르지 않은 구호다. 그나마 팻말이 지시한 한 가지가 있다면, 진리는 확정될 수 없으며 인간은 정의될 수 없다는 교훈이다. 따라서 논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민주화의 낭만이 젠더 감수성 부족으로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일까. 군대 얘기하는 20대 남성이 문제라며 축구도 하고 롤하는 동안 여자에게 불리하다고 웃으며 말한 농담이 마냥 씁쓸했다.


맞은편 직원 보는 앞에서 송명빈에게 쳐 맞아도. 양진호한테 따귀를 맞는다한들 20대 남자 청년은 다시금 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아니, 살아내야만 한다. 그래도 모든 것은 성장하며, 모든 것은 용인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