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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자유의새노래 칼럼

살기 위해 뭐든 하는 세상

자유의새노래 2019. 8. 23. 07:00

입력 : 2019. 08. 21 | 수정 : 2019. 08. 23 | A28

 

“신학을 그만두고 약학을 전공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2018. 4. 18). 이미 미국 유학길 채비를 마쳤기 때문이다(2018. 1. 6). 목회학석사를 밟을지, 신학석사를 밟을지 고민하던 목소리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긴장감에 사로잡힌 상태였다(2018. 1. 10).


한 차례, 식어버린 치킨마요덮밥 앞에 훌훌 털듯 “아르바이트조차 부담스럽다”고 고백한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2018. 3. 20). ‘하긴, 나도 힘든 헬조선 너라곤 버텨낼 재간이 있겠니’ 생각하던 차 머지않아 그는 회심을 선언했다(2018. 3. 14). 썩어 문든 보수 교회와 운동권에 잠겨버린 진보 사이에 갇힌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로의 신앙인을 축원했다. 그 자유를 곧 과제 보이콧으로 행사했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지만(2018. 4. 29).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희망의 메시지, 부흥을 주도한 교회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빈자리로 가득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뒷좌석에 마주 앉아 두 손 들고 축도 중인 남자 앞에 고개를 떨궜다. 그 시절 희망과 할 수 있음은 지금 시대에 먹히지 않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제는 교회서 울리는 너스래미 들을 시간이면 콘서트와 뮤지컬로, 하다못해 넷플릭스로 시간을 때운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인구가 종교 가진 인구를 앞지른 지도 오래다.

 

번영신학의 별이 져가는 시대의 십자가(2017. 4. 1).

 

두 손 들고 여의도에서 퍼져간 복음의 메시지가 그 시대에 희망이지 않았냐고 묻는다. 가끔은 빨래판에 올려둔 흰 교복 셔츠를 칫솔로 쓱싹쓱싹 문지르던 때가 향수로 돌아온다. 대형교회 향한 꿈은 내겐 빛나는 희망이자 내일을 살아낼 용기였다. 노쇠한 여든살 노인이 복음성가 1장을 부를 때면 눈물이 나왔는데 여전히 조용기 신화를 잊지 않은 탓일까. 번영신학 정점은 현실과 함께 허무하게 스러졌다. 왜 잘못을 논하는데 업적을 들이대나 싶을 테지만, 그렇다 치자. 시대가 변한 만큼 메시지도 발전해야 하지 않나. 그 시대에 은혜였다 셈 치자. 교인들을 무기력한 허상으로 좇아가게 만든 현실을 목도해도 된단 말인가.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한 1,2) 고백 앞에 눈물을 훔친 것처럼. 신앙으로 막 전향한, 알바조차 힘겨워한 남자 앞에 고개를 떨궜다. 나약해 보이던 남자는 누구보다 마음 속 진실함을 요구했다. 곧 관계가 파탄 날 것을 알았는지, 약학 전공한단 진솔한 연기도 보였다. 하나님 은혜가 필요하다던 신앙으로의 전향자에게 “희귀병을 앓고 있으니, 쉬어도 된다”고 말하자 당당히 조별 과제를 보이콧한 주체성에 감복했다. 자기보다 나약한 인간을 병신과 머저리로 치부한, 은혜를 가장한 연기에 감탄했다. 어차피 학부 시절 인간관계 파탄 내도, 당당히 아버지 빽으로 미국행 유학길에 오르면 될 테니까. 유학이 문제가 아니다. 갈 수 있다. 가면 된다. 가보라. 언젠가 신까지 팔아먹은 도피성 인생이란 현실 앞에 또 다시 좌절하고 죽음을 묵상할 테지만.


10년 전, 기독교 채널만 넌지시 시청하던 어머니께 조용기 실체를 토설한 아들이 떠올랐다. 저런 인간에게 돌아갈 헌금을 그만 내라던 아들에겐 그 시절도 은혜가 아니었다. 자유로운 인간이라 믿었던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죄라는 구도에 가둔 전략적 틀이란 사실을 선지자가 되어버린 아들이 말하고 있었다. 그 진실한 말을 그는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