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야기를 먹어 줄게
명소정 지음 | 이지북 | 308쪽 | 1만4000원
참신한 소재라 하기엔 당장에 떠오른 두 영화가 겹쳐보였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그리고 ‘늑대소년’. 머지않아 여학생이 괴물 남학생을 쥐고서 흔들고 있겠구나 예상마저 들었다. 정해진 각본처럼 눈앞에 펼쳐진 내용이 낯설지 않은 이유였다.
우연한 밤 도서관을 방문한 여자 주인공 세월이 괴물의 형상으로 나타난 남학생 혜성과 마주친다. 정체를 들키고 만 혜성이 세월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굽실댄다. 혜성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의 기억을 먹어야만 했다고 해명한다. 사람의 기억을 먹으면 단박에 정체가 탄로 날 것을 우려해 기억이 담긴 책을 몰래 먹으면 괜찮을 거라 말했다. 세월은 비밀로 해줄 테니 상담 동아리를 만들면 어떨지 제안한다. 자발적으로 찾아온다면 걸릴 일도, 윤리적 하자도 없을 테니 괜찮지 않겠냐고 물은 것이다.
혜성은 흔쾌히 승낙한다. 본격, 기억을 다루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스포일러 주의
◇단순한 법칙을 훼손하자 곳곳에 묻어난 어색함
세월이처럼 괴물을 보고도 놀라지 않을 수 있다. 허나 수백 년 차곡차곡 쌓인 상처 많은 괴물이 열일곱 열여덟 여고생 앞에서 쩔쩔매서는 곤란하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화괴는 세월을 죽일 수도 있고 붙잡아둘 수도 있었다. 화괴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혜성은 본래 화괴라는 괴물이었다. 오랜 기간 살아남으며 수많은 사람을 스쳤다. 살기 위해 기억을 먹어야 했다. 기억을 먹는다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돌봐줄 존재가 없다는 의미였고, 감정을 공유할 가족과 동지도 없다는 뜻이다. 괴물로 살아가며 그어진 상처 앞에 세월이 서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에 도리어 놀란 건 화괴 혜성이었다.
인격 자체가 없는 괴물이 단지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설정 하나로 당연한 법칙이 허물어졌다. 따라서 소설 초반부터 우연적 요소가 셀 수 없이 등장한다.
▲우연한 밤 학교에서 마주친 여학생이 세월에게 도서관에 분실한 물건이 있다고 말하는 장면(10쪽) ▲우연히 사서 대행을 맡았을 뿐인데 동아리 개설권을 준 국어 교사(19쪽 3문단) ▲우연히 학교를 다니는 무당의 딸 윤소원의 등장(52,2) ▲화괴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말하려는 찰나에 우연히 등장한 혜성.(116,8) 글 쓰는 입장에서 우연은 매우 편한 장치다.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울 때 우연으로 눙치면 손 쉽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한 요소도 적당히 배치해야 제 기능을 한다.
‘괴물은 무서워야 한다’는 법칙이 무너지자 혜성이 남고생으로만 보일 뿐 화괴로 보이지 않았다. 유난히 두 여자아이에게 순해지는 화괴가 남학생 혜성으로 완벽히 변신했기 때문일까. 화괴는 괴물이지만 사과도 할 줄 알고(141,2) 배고픔을 견딜 줄도 안다.(148,4) 이성을 갖추고 인격적인 존재라야 가능한 자기 통제를 괴물에게서 발견한 순간 더는 괴물로 보이지 않았다. 내담자 양지혜에게 몰래 찾아간 혜성이가 친구들과 지내는 게 불편하다면 “나랑 같이 다녀도 돼”라고 말한다.(132) 화괴로서 기억을 먹기 위해 회유하려는 걸까. 아니면 남자로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을까. 분명한 건 회유로 알아챈 세월과 소원이 분노하자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넨다. 이렇게 카리스마 없는 괴물이 또 있을까.
◇디테일하다가도 허술한 주인공 주변과 자신
초반에 기억을 지울지 말지 고민하던 해원이 에피소드 중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빵 터졌다.
“조금 늦었구나.”
“죄송해요. 독서실에서 공부하느라 시간을 제때 못 봤어요.”
“다음부터는 주의해라. 아, 오늘은 네 형도 집에 온다고 하는구나.”(34-35)
이렇게 대화하는 가정이 어디에 있나. 국어 교사 말투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래, 그러렴. 등록하려면 며칠 걸릴 것 같구나.”(23,6) 수학 문제를 국어책 읽듯 설명해주는 남학생. “그 부분은 함정이야. 사실은 이 방식을 쓰면 더 쉽게 풀 수 있는데….” 방금 자살 시도한 여학생을 뒤로한 채 침착한 설명도. “뒤뜰에서 자살을 시도한 학생이 발견됐어. 다행히 숨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 발견돼 구조되긴 했지만.”(75,6)
무당의 딸 윤소원의 존재 이유도 모르겠다. “난 유명한 무당인 어머니의 딸이었지만, 영적 재능은 그다지 없었어.”(125,5) 차라리 윤소원을 없애고 세월이의 고뇌만을 담았으면 어땠을까. 도서관 사서 역할을 한껏 살려내어 다양한 문헌을 파헤치는 과정 속에서 화괴의 정체를 직접 찾아내었다면 혜성이를 향한 세월이의 마음도 애틋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세월이도 비범하고 독특한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전부터 느꼈지만, 너도 평범하지는 않구나?”(128,2) 도대체 무엇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다만, 괴물인 그가 정말 인간인 듯 행동하는 것이 어딘가 애처로워 신경이 쓰이면서도 어딘가 나와 닮았다는 점에,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이 든다는 점에 짜증이 치솟았다.’(135,3) 세월이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감각이 뒤쳐진 점(245,4)은 캐릭터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성격이 소설 곳곳 드러나지 못했다.
꼭 혜성이가 “평범하지는 않구나” 같은 직설적인 표현이 작위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 애는 나(세월)와 닮았어. 사람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누구보다 감정을 가지길 열망하지.”(238,3) “그녀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240,3) 그런가? 세월이가 감정에 무감각하고 인간의 보편적인 동질감을 애써 가지려던 여고생인 건 알겠다. 곳곳에 드러난 세월은 진한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었고 사람을 이용하려는 혜성을 가로 막은 지극히 평범한 여자애 모습일 뿐이다. 세상은 미쳐 돌아가고 혜성은 괴물일 뿐이고 이와 중에 무감각한 나, 세월은 아이들의 기억을 더듬거리며 평정심을 배워간다는 중2병스러운 자의식을 고등학생이라서 용납할 수 있었다.
여태껏 열 권 넘는 청소년 문학 소설을 읽으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라는 물리법칙을 준수한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이다. ‘우리는 시험 준비를 위해 한동안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다.’(73,1) 저자 학력을 보고서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단 한 가지
시점도 여러 번 바뀌었다. 누가 세월인지 누가 혜성이 독백인지 까먹었다. 말투도 비슷했다. ‘소문이 돌지 않았으니까’(99.1,4) ‘~전까지는’(99.1,6) ‘~있으니까’(117,3) 같은 미완성 문장이 많아서 반말로 읽혔다.
좋은 표현이 없는 건 아니다. 다양한 아이의 기억을 맛(93,6; 94,3)으로 표현해 그 느낌 고스란히 다가왔다.
화괴로 살아가며 아끼는 이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혜성이의 과거 회상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저자가 처음부터 회상 장면처럼 써내려갔다면 분위기가 어땠을지 상상해보았다. 오히려 드라마로 보았다면 ‘너무 무거운’(111,2) ‘너무 절묘해’(116,8) 같은 쓸데없는 표현이 멋있는 혜성이와 어여쁜 세월이로 바뀌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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