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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서

행운, 조금씩 틈으로 벌려내어 박살내는 것:『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

자유의새노래 2022. 12. 4. 21:53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0쪽 | 1만1500원

 

처음 세 가지에 놀랐다. 형수라고 부르기에 형의 아내를 일컫는 단어인 줄 알았다. 웬걸 남자애 이름이었다니. 은재라는 이름으로 PC방을 오가며 다크나이트로 불리는 모습에 남학생인 줄 알았는데 여학생이었다니. 이 모든 광경을 CCTV로 지켜보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행운이란 실체 없는 존재가 관찰 중이라니.

 

그렇다. 행운이란 주인공이 불행과 죽음 사이에 선 아이들을 지켜본다.

 

 스포일러 주의  

 

상처가 만들어 낸 냉소적인 은재

여중생 은재는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해왔다. 다크나이트라 불린 이유도 얼룩진 상처를 가리려던 검은색 카디건 때문이다. 은재가 아버지로부터 머리채 잡힌 모습을 지켜본 건 같은 반 우영과 형수였다.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등교한 은재를 보면서 속삭인다. “괜찮은가 본데?” “다크나이트가 뭐 잘못한 게 있었겠지.”(24)

 

형수는 가정폭력이면서도 가정폭력 같지 않은 은재의 사정이 궁금했다. 그러기엔 아버지의 행동이 심각했다. 뒤쫓아 다녔다. ‘한국가정법률사무소, 대한법률구조공단, 여성긴급전화, 경찰민원.’ 연락처 담긴 쪽지도 건네 봤다. 형수에게 돌아온 건 얼음 같은 은재의 냉소였다. “남의 일에 신경 끄고 네 일이나 잘해. 너나 나나 인생 불쌍한 건 똑같으니까.”(42,10)

 

장난 끼 가득한 브라더스 형수와 우영

신경 끄라는 따가운 눈빛에도 포기하지 않는 형수와 우영이 은재의 뒷조사에 나선다. 실은 형수와 우영은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녀석들이다. 은재를 처음 목격한 PC방도 시간이 남아돌아 방문한 놀이터였다. 그러나 하고픈 일이 생겼다. 이들 시선을 주목하게 만드는 검은색 카디건과 아버지에게 끌려간 그날의 은재였기에.

 

형수의 시선이 은재의 카디건에 가닿는 동안 우영에겐 또 다른 여자애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 그만해.” “뭐가?” “뭐든. 괴롭히는 거 그만두라고.”(51-52) 우영의 볼을 찹쌀떡마냥 꼬집으며 숙제나 청탁하는 여자애에게 단호하게 그만두라 말하는 반장 타노스가 나타난 것이다. 단호한 데다 힘까지 세 보인 반장의 또 다른 이름은 타노스였다. 중학생 여자애한테 타노스라니.

 

, 네가 무슨 상관이야? 우영이가 해 주겠다는데. 네가 우영이 여친도 아니고.” “맞는데.” “?” “우리 사귄다고. 그러니까 김우영 건드리지 마.”(53) 반장의 도움은 우영에게 망신일 뿐이다. “솔직히 말해 봐. 너 반장한테 타노스님 한 대만 때려 주세요, 그러냐?” 결국 브라더스는 고민 끝에 타노스와 관계를 정리할 방법을 찾아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우영이가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이다. 장미꽃 바치면서 내 공주가 되어줘라고 말이다. 까이는 부끄러움보다 타노스 남친 소리 듣는 게 싫었나보다.

 

고마워.”(67,1) 예상과 다르게 타노스는 우영의 고백을 받아준다. “고마워. 타노스랑 진짜 사귀게 해 줘서.”(65,1) 형제 같은 대화, 천방지축 발상이 웃음을 마르지 않게 한다.

 

 폭력성 주의  

 

쥐려고 했지만 더는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은 행운

육상 안해요.”

 

단호하고 냉정하게 한 말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남자는 육상을 안 한다는 말에 얼굴이 더 환해진다.’(63)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은재에겐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다. 아버지에게 맞고 또 맞은 탓이다. 행운은 지켜만 볼 수 없었다.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저 멀리 날아가 최 감독의 머리 위를 지나간다. 은재의 비참한 삶도 저렇게 멀리 날아가 버리길, 나는 바라고 또 바란다. 내가 지금 이 두 사람의 인생에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같은 쪽)

 

이봐 학생, 공을 함부로 차면 위험하지.”(같은 쪽)

 

아무 생각 없이 찬 은재의 공을 보자 최 감독이 발견한 건 희망이었다. “이리 와서 라면 먹고 가.”(92,5) 며칠 지나 다시 만난 은재에게 행운의 손길을 건넨다. 최 감독도 위기를 맞았다. 축구부 인원을 충원하지 않으면 축구부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콘테이너 박스에서 은재를 부르고 라면 먹던 정겨운 풍경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설상가상 은재에게 남은 단 하나의 희망을 짓밟는 건 아빠라는 새끼였다. “에이 씨발. 이래서 자식은 키워 봐야 소용없다고 하는 거야. 밥버러지 같은 년.”(81,7) 축구부 가입을 허락해 줄 리 없었다. 달리기를 잘하게 된 이유도 아빠라는 괴물에게서 벗어나 살기 위함이란 것을 최 감독이 알 리가 없었다. 손에 닿을 듯 행운은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걸까.

 

그러나 행운이 연결해 준 축구부 식구들은 은재를 붙잡으려 한다. 운이었을까. 은재가 들고 있던 축구 열쇠고리는 형수의 아버지 최 감독이 선물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며칠 전부터 아빠 최 감독이 형수에게 축구부에 어울리는 아이를 만났다고 싱글벙글 웃던데 그게 은재는 아니었을까 의문이 서기 시작한다.

 

결국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에

과연 은재는 괴물을 뿌리치고 축구부에 가입할 수 있을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과정이라 하기엔 입에 담기 어려운 나날이 이어진다. 참혹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을 상황이 은재 자신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닐 텐데. 모든 것은 그저 운에 따라 발생하는 사건에 불과할까. 우영·형수 브라더스와 은재의 상황은 서로 떼어진 것 같으나 고통으로 연결 되어 있었다. 우영은 부모에게 모자란 자식 취급을 당했다. 형수는 진로로 인해 평범한 고통으로 보이는 고뇌를 온몸으로 지고 있었다.

 

고통을 알아본 건 우영이와 형수였다. 그리고 축구부 해체라는 불안을 짐처럼 떠안았던 최 감독과 아이들이었다. 검은색 카디건을 벗기려던 축구부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은재의 상처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장을 비롯한 주변의 아이들이 갇힌 은재를 찾아내지 않았더라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은재 자신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포기해 죽음으로 걸어갔을지 모른다. ‘은재는 용기가 나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켜 주려 지옥 구덩이 속에 손을 내밀던 친구들을 위해서, 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더는 지옥 절벽에 매달려 있지 않을 작정이다.’(191,3)

 

저자는 행운이 발생하는 요소에 한 가지 전제조건을 말한다. 고통 중에서라도 공동의 공간을 발견할 때 행운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글에서 공동의 공간은 고통인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말한다.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의 눈길 한 번, 마음 한 번이 누군가의 삶에 구원이 될지도 모르겠다.”(199,2)

 

고통을 통해 연결 된 두 관계에 집중한 저자의 글에서 흐르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고통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고통이라면 오히려 고통을 통해 공동의 공간을 발견해야 하는 것. 그 발견하는 과정이 말 그대로 고통스럽고 불가능한 것 같으나 조금씩 틈을 내어 벌려내어 박살내고야 마는 것.

 

신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은재는 밖으로 걸어 나가는 대신 아무 말 없이 언제나 몸을 가리고 있던 검은 카디건을 벗는다. (……) 소녀의 팔뚝은 시퍼런 피멍으로 가득 차 있다. 멍을 본 두 경찰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떡 벌리고 만다. 열다섯 살의 몸에 있어서는 안 되는 멍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 이게 다…….”

 

경찰은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말을 다 잇지 못한다. 경찰의 얼굴은 붉어지고 잠시 동안 말이 없다. 그래. 지금 경찰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죽어 가는 아이를 모른 척했다는 부끄러움이자 용기를 낸 아이를 무시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나는 은재의 다음 말에 무너지고 만다.’

 

도와……주세요.”(190-191)

 

기독교 신학에서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를 죄의 번영으로 해석한다. 개신교회는 우상숭배로 곡해하곤 하지만 사실 패망의 이유가 성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이사59,1-2)

 

그리고 다른 본문에서 명백하게 가리킨 죄악이 적혀 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예레5,28-29)

 

신은 가난한 자들의 아픔에 침묵할 뿐이다. 왜 침묵만 하는지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저서 속 행운도 야훼처럼 말없이 지켜만 볼 뿐이다. 신이 알아서 처리해주길 바라는 인간의 욕망 때문일까. 행운도 무책임하고 파렴치한 편의주의를 경고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형수와 우영, 최 감독과 축구부 아이들, 반장까지 나서자 비로소 행운은 소녀 김은재에게 구원이 되어준다.

 

이제 곧 여경이 달려올 터였고, 은재의 몸 곳곳에 쌓인 지독한 흉터를 보게 될 것이다. 병원을 찾을 것이고 지난 수년간 부러져 제멋대로 붙은 뼈를 발견할 것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화상 흉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경찰은 수년간 계속되어 온 학대의 흔적을 끝도 없이 발견하고 또 발견할 것이다. 소식을 들은 최 감독이 병원을 뛰어왔을 때, 은재는 그때서야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소녀는 그렇게 더는 죽지 않고 살아가기로, 진짜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진짜 삶을 살아가기로 한 소녀의 삶에 구원이 되어 줄 것이다.’(192,8-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