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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서

고딩의 탈을 쓴 소설, 차라리 수필이었다면:『서울 사는 외계인』『대한 독립 만세』

서울 사는 외계인들
이상권 지음 | 자음과모음 | 256쪽 | 1만3000원

 

고등학생 나이의 남자 아이가 무화과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집 2층으로 이사 왔다. 덥수룩한 머리, 신문지로 창문마저 덮어버린 음침함, 자퇴한 듯 짱 박혀 지내는 어두운 분위기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 미친! 개쓰레기! 양아치 새끼! 이거 정신병자 아냐?”(10,4)

 

딸의 험한 욕설에도 주인집 아주머니는 친히 끓인 팥칼국수를 문 옆에다 두었다. “너 말 조심해.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또라이, 또라이 하니? 내가 보니까 아주 선하게 생겼더구먼.”(28,7) 2층에 세 들어 사는 자퇴 소년 사우에게 집주인 아주머니가 한글을 배우면서 서로 위로를 건네는 내용의 소설이다.

 

2010년대 후반에 나온 소설이라기엔 믿기 힘든 문장들

소설을 읽을 때 나이와 학력을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문뜩 책날개를 펼치곤 한다. 독특한 소재라거나 본문이 오래된 문체라면 그렇다. 오랜 느낌의 문체에서 작가 본인을 투영한 주인공 냄새를 지우기 어려웠다. 60년생이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낯선 표현이 심증을 단단하게 했다. “그 모습 또한 사춘기 때의 제 모습이랍니다.”(253,2) 맞췄다.

 

저자 이상권 작가는 1964년생으로 1994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젊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생각지 못할 발상을 젊은이 탈을 쓰고 벌이는 게 어색했다. 미미의 말투는 절대로 10대 후반의 여자애답지 않다. “이 양아치 새끼야! , 뭐라고? 너한테 관심 있냐고? 이 새끼 보니까 완전히 선수네. 은근히 순진한 척하면서.”(41,3)

 

성경책 한 권 갈기갈기 찢었다고 다짜고짜 뺨 때리는 기독교인 고모(33)도 짜증스럽다. 아무리 기독교인이라도 폭행은 일반적이지 않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 진구도 386할아버지가 꾸역꾸역 교복 입은 느낌이다. “우리 가끔씩 연락이나 하고 지내자. 우리 핸드폰이나 트자!”(61,1) 졸업장도 못 받은 진구를 쫓아다니는 여자친구 새민이는 도대체 어떤 여자 애를 복제한 건지를 묻게 만든다. “쟤가 네 친구야? 중딩 친구라고? 쟤가 너보다 더 멋있게 생겼다. 짱이네! 헤어스타일이 죽여주네!”(107,5)

 

문제의식은 좋으나 묻혀버린 작중 문제

소설 속 이야기의 본류는 따로 있다. 워낙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캐릭터가 혼란해서 그렇지 소설이 말하려는 바는 재건축과 약자의 설움 그리고 미성숙한 어른이다. 한글을 모르는 집주인 아주머니는 대형교회를 건축하려는 개신교인의 횡포를 견뎌내는 약자였다. 우울증 약까지 복용할 정도라고 하니 가벼운 괴롭힘은 아니었다.(28,1) 고등학교도 다니지 않는 사우를 의지해 자서전을 집필하며 서로의 아픔을 주고받는다. 사우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사별했다. 어머니처럼 대해주는 집주인 아주머니를 찔레꽃이라 부르며 관계가 깊어진다.

 

문제의식은 좋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 기어이 베어 내고 그 자리에 대형예배당 짓겠다고 설치는 기독교인이 좀 많은가. 무화과나무 한 그루의 가치보다 콘크리트 발라놓은 건물에 집착하는 인간들이 좀 많은가. 저자 인생 전반에 흐르는 재건축에서 비롯한 환경과 생태, 약자를 거칠게 다루는 갑()의 횡포를 읽었다. 읽었지만 주인공을 비롯한 전반적 캐릭터가 세상을 완벽히 복제해 묘사한 것도 아니었고, 상징적인 요소만 따온 자신만의 언어로 구축한 캐릭터도 아니었다. 어디선가 본 삽살개 덥수룩한 머리의 남학생과 어디서나 반겨주는 친절한 아주머니, 90년대에나 볼 법한 철없는 10대 아이들은 분위기만 혼란하게 만든다.

 

이 책은 2018년에 출판한 소설이다. 소설 속 배경은 2020년대와 거리가 멀다. 특유의 386세대 폭력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동창생 진구가 사우를 배신하고 합성 음란물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는 장면에선 어이없었다. 사우의 은밀한 생활을 촬영해 유포하는 현대의 성 착취 방식과 달랐다. 발가벗은 사촌 동생을 강간이라도 하듯’(174,2) 끌어안는 사우의 합성사진을 유포하겠다고 설치니 할 말을 잃었다. 아버지에다가 고모, 찔레꽃 아주머니와 미미한테까지 퍼뜨린다던 진구 새끼는 친구 놈도 아니다.

 

어른들을 별명으로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돈키호테 씨’ ‘찔레꽃 씨같이 입말로 부르기 어려운 단어를 애칭으로 사용하는 점도 오랜 느낌을 준다. 이름 없는 고양이의 존재도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고양이는 왜 말을 할 줄 알고 왜 소설 곳곳에 배치된 걸까. 존재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는 담백한 문체를 담을 줄 아는 사람

다른 소설도 같을지 궁금했다. 저자의 다른 작품도 읽어 봤다. 3·1운동 100주년 서해문집 청소년문학 단편소설집 대한 독립 만세는 어땠을까. 저자는 경기 용인시 수지구에서 발생한 고기리 만세 운동을 주제로 집필했다.

 

대한독립만세: 3·1운동 100주년 기념 소설집
정명섭·신여랑·이상권·박경희·윤혜숙 지음 | 서해문집 | 224쪽 | 1만1900원

 

서울도서관에서 펼친 단편소설 첫 줄부터 마지막 줄에 이르기까지 흡입력을 느꼈다. 해방 전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는 암울한 시대 풍조와 공포 속에서 만세 운동을 준비해 사건을 벌이는 조선 사람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다가왔다. “아이고, 여기다 선을 잘못 그렸네. 네 개 작대기 모양으로 해야 하는데.” “괜찮아요. 그런 것 하나 정도는 틀려도 됩니다. 마음이 중요해요.”(106,3-4)

 

깔끔한 문체에 놀랐다. 독립만세 운동이라는 본류를 지켜가며 형성한 주변 캐릭터들이 담백했다. 손기마을 구장 이덕균과 30대 초반 농부 안종각이 주도한 만세 운동 과정을 주인공 소년이 지켜볼 뿐이다. 소년의 아버지 안종각은 조상의 독립 운동으로 집안이 무너진 상태였다. 과연 안종각도 죽음을 무릅쓰고 만세 운동에 나설 것인지 긴장감이 흘렀다.

 

기어이 죽음을 불사하고 만세 운동에 참여한 안종각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눈망울엔 감동이 서렸다. 가슴 북받치는 주인공 아버지의 갈등 끝 결정에 통쾌했다. 사람들조차 일제의 눈에 띠면 곤란해질 게 뻔할 테니 돌아가라 만류하지만 안종각은 추운 날이니 만큼 따뜻하게 감싸줄 남바위를 선물한다.

 

이 담백함 그대로 현대 청소년문학도 집필하면 어땠을까. 아쉬움만 가득하다. 시대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면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쓴 수필은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