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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앙/미망이의 신학 서재

[미망이의 신학 서재] “호오, 의외네요.” 非전공자가 쓴 성경 통독서라니…

 

 

“호오, 의외네요.”

만화 드래곤볼에서 악당 프리더는 예상 못할 만큼 강해진 주인공 일행에 놀란다. “호오 전투력이 상승하는군요.”

한 페이지 펼치자 엇비슷한 입버릇이 나왔다. 저자가 신학이나 종교학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공자 아닌 사람이 성경 가르치는 책을 쓰다니. 그렇다고 전공자만 써야 한다는 편견에서 느낀 당혹감은 아니었다. 전공자도 어려워하는 성서에 관한 글쓰기를 일반 신자가 감당했다는 사실에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의외는 이어졌다.

본문 초반부터 다른 성경통독 서적에서 다루지 않는 성서 번역의 역사를 다룬다. 보통 신학을 모르는 일반 신자들은 성경에 과도한 신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신의 가르침과 의미를 성경이라는 문자로 가두어 또 다른 우상을 만드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책은 다르다.

 “우리는 ‘신이 메시지를 준 대상이 고대인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읽을 때는 현대 뉴턴적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정력을 소비하는 것보다 고대인들이 어떤 역사적 경험을 했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32쪽)

기독교인 다수가 가진 성경에 대한 생각에 도전장 내밀며 포문을 연 것이다. 신학교에선 저자의 주장은 너무도 당연하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자가 집필했다니. 흥미롭고 재미있다.

 

 

 

 

미망이의 평점
가독성│★★★
내용│★
소장가치│★
보너스점수│☆☆
총점│7점

평점 기준
가독성
① 한 번에 읽기 쉬움 3점
② 두 번 읽어야 이해가 됨 2점
③ 세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
④ 세 번 읽어도 어려운 경우 0점

내용
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
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
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
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
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
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
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
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
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내용은 쉽지만 구약의 존재를 묻게 만드는 구성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학자들이 그간 써놓은 내용을 정리했다”(머리말)

전체적으로 괜찮은 입문서로 보인다. 중간사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성경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충분히 읽을 정도로 쉽다. 하지만 ‘좋은’이 아니라 ‘괜찮은’으로 평가한 이유는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중간사(Intertestamental period)
구약 선지자의 마지막 활동 시기에서 신약 성경 시기 배경 이전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저자 남우현은 구약 예언이 종결된 기원전 433년부터 37년까지 기간으로 정리한다.(132쪽) 중간기 동안 페르시아 제국 점령-알렉산더 대왕-프톨레마이오스 왕조-셀레쿠오스 왕조-마카비 혁명-로마 점령이 벌어진다.

 

 

먼저, 구성이다. 전체적으로 다섯 개 대단원으로 구성한다. 첫 단원에서 창세기-왕정 전까지를 설명하며 두 번째 단락에서 왕정시대와 중간사를 다룬다. 세 번째 예수 그리스도 공생애를, 네 번째 초대교회 가르침을 다룬다. 마지막 다섯째 단원에선 교리를 벗어나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다. 허나 이 같은 구성은 성서 내용을 제대로 요약하지 못한다.

저자는 성경의 초점을 “예수 사건”(18)으로 설명한다. 실제 구약 990쪽과 신약 322쪽 모두 더해 예수가 활약한 복음서는 전체 분량 1312쪽에 비해 140쪽 안팎이다. 성서 전체에서 10% 수준이다. 이 책은 전체 355쪽으로 이뤄진다. 성경 990쪽에 달하는 구약을 66쪽(36-112)으로, 성서에 나오지 않는 중간사는 30쪽,(113-141) 복음서는 약 110쪽(146-268, 293-308)으로 구성했다.

구성은 이 책 입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다른 성경 통독 서적에 비해 성경은 적게 다루며 중간사는 월등히 많이 다루기 때문이다. 반면 조병호 저자 ‘통성경 길라잡이’(현재 출간 된 개정판 이전 버전 기준)는 전체 380쪽에서 구약 180쪽, 중간사 20쪽 신약 130쪽 분량으로 구성한다. 필립 얀시 작 ‘맥잡는 성경 읽기’ 또한 전체 340쪽 분량으로 구약 180쪽, 신약 140쪽, 중간사는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평균 350쪽 구성인 다른 성경 통독 서적에 비해 중간사는 많고 구약은 월등히 적기에 성경 통독 서적으로는 애매모호하다고 보았다. 중간사를 다루는 부분은 다른 대안격 서적과 비교했을 때에도 경쟁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복음서라는 특정 사건 중심으로 요약하고 나머지는 부차 요소로 요약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신약성서의 주된 사건은 예수다. 성서 사건을 예수에게만 맞춘다면 우리에게 분량대로 조정된 성서도 필요할까? 이 질문은 한걸음 나아가 ‘예수의 사건만 중요하다면 복음서만 읽으면 되지 굳이 성경공부를 통해서 구약을 알 필요가 있을까?’ 묻게 만든다.

따라서 성서의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압축하는 건 일장일단(一長一短)이다. 나는 이 문제가 장점보다 단점이 더 부각된다고 생각한다.

 

 

의외라고 생각한 이유
전공 바깥 신자가 연구한 책
과도한 신성 부여하기보다
고대 문헌으로 전제해 집필


불편한 두 가지 이유
①구속사로 편향된 분량
②바울 해석vs예수의 말



◇공감은 가지만 호불호가 강한
마지막 단원에서 저자는 성서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주장을 적었다. 성화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는 어떤 종교적 사실을 믿는 것이나 어떤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믿어야 할 것을 믿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중요한 종교적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구원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동생이었으며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였던(사도15,13, 갈라2,9) 야고보는 귀신들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여러분이 아는 대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야고2,24)’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야고보는 ‘여러분이 아는 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초대교회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321)

저자에게 성서는 예수의 삶을 기록한 문헌이다. 저자는 인간의 주체적인 믿음이 아니라 삶의 모습으로 믿음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달리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다.

“법도 상위법과 그 밑의 시행령이나 시행규칙과 같은 하위법이 있듯이 그리스도교의 구원론도 사도 바울의 편지를 그리스도인 예수의 가르침보다 상위에 올려놓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론에 대한 교리도 예수의 가르침을 기본 틀로 하고 그 기본 틀 안에서 바울의 편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개신교의 교리는(믿음으로 얻는 구원) 성경을 입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동등하게 보아 해석했고 예수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개신교의 교리가 대립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 패러다임으로 분해하고 바울 패러다임으로 짜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내용의 오류이기보다는 명백한 신학적 또는 해석 방법론적인 오류이며,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가톨릭 신학자들은 ‘루터식 읽기’라 비난하고 있습니다. 또 신약성경 스스로(베드로후서) 바울 편지의 읽기 방법론을 직접 거론하며 무식한 사람은 바울의 편지를 잘못 해석해서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라며, 성경이 읽는 방법론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져 파멸 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317)

예수의 가르침이냐, 바울의 편지냐. 갈림길 앞에서 나는 저자가 옳다고 생각했다. 일반 신자에게 성서 읽기란 성서에 대한 지식 획득을 넘어 예수의 삶을 재현함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때의 심판의 기준이 어떤 사상이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며 이 기준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아니면 박해했느냐로 구분 될 것이고 이것으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것(마태25,31-46)이라고 성경은 답하고 있습니다.”(334-335)

물론 반대의견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위 견해가 결과적으로 ‘행위구원’을 형성하게 하며, 초기 종교개혁 정신과 상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참된 신자면 자연스레 행위가 뒤따라오는 것이지, 결코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 의견이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건 예수의 삶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따라서 이 책을 호불호 갈리는 애매모호한 그러면서도 꽤 괜찮은 책이라고 평가했다. 독자로서 예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편집에는 불호(不好)를, 예수를 믿는 게 그 삶을 재현함이라는 저자 의견에 호(好)로써 동의했다.

모두가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는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찾아 주었다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한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마태25,34-40)

이 말은 장애인들을 보살핀다고 하면서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착취한 것이고, 나이든 노인의 노후자금을 등친 부흥사는 예수를 등친 것이고, 성직자의 지위를 이용해 여신도를 성적으로 농락한 목회자는 예수를 농락한 것이며, 종교를 이유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경멸한 사람은 바로 예수를 박해한 것으로 심판 받는다는 의미입니다.”(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