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과 건네주면 된다고
믿는 목사의 순진한 믿음과
교단으로 복귀한 성범죄자
물리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1초 만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지 못하고, 죽었다가 깨어나도 과거라는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듯이 물리 법칙도 거스를 수 없다. 큰 폐를 끼치고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 생각날 무렵, 사과 한 마디로도 끝나지 않는다는 일종의 물리법칙을 깨닫곤 한다. 아무리 보상해도 보상으로 위로할 수 없고 잘못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사과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사과문에는 건조한 잘못을 저지른 사실 관계, 경위, 재발방지, 반성, 잘못하기 이전으로 최대한 복구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상심한 마음을 풀어주는 것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과에는 진정한 마음이 담겨야하기에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진짜’를 내걸 이유도 없으며 ‘미래’라는 명분을 가져다가 용서를 요구할 수도 없다. 사과하는 가해자가 어떻게 사과하는지, 이후 화해와 복구의 의지 여부에 따라 용서할 수도 있고, 용서하지 않을 수 있다.
사과와 용서를 지켜보는 사회 역시도 사과의 정황에 포함 돼 있다. 가해자를 어떻게 받아주어야 할지, 영구히 분리해야 할지. 그리고 잘못 이상의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의 일방적인 주장도 바로 잡기 마련이다. 이 과정을 통해 사과와 용서는 결코 ‘사과가 과거를 풀고 용서는 미래를 연다’ 따위의 구호들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과를 해본 적 없는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 인간일수록 속 시원하게 사과하면 된다고 착각한다. 용서를 해본 적 없는 인간이기에 경제적 신앙적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 어제의 적군도 오늘의 아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게 사과이고 용서라고 말하는데, 참 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만사 돈에 의해 돌아간다고 믿는 순진한 사고방식이다.
참여교회는 한 해를 마치기 전, ‘사과데이’라는 이름으로 이벤트를 내걸었다. 교회는 실제 사과를 건네며 사과하면 용서해주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사과를 주고 싶은 사람이 딱 하나 있어요. 우리 성도님들에게 사과를 다 드려야 돼.” 그러나 왜 사과해야 하는지를 빼먹었다. 청년단체 목사로 활약하다 여학생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른 인간이 다시 교단으로 복귀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이게 한국교회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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