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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신학; 신앙

[미망이의 신학 서재] 종교 다원주의: 기독교가 기독교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

자유의새노래 2021. 10. 5. 20:00

 

미망이의 평점
가독성│★★★
내용│★★☆
소장가치│★☆☆
보너스점수│☆☆☆
총점│6점

평점 기준
가독성
① 한 번에 읽기 쉬움 3점
② 두 번 읽어야 이해가 됨 2점
③ 세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
④ 세 번 읽어도 어려운 경우 0점

내용
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
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
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
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
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
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
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
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
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종교다원주의의 유형 - 교보문고

종교다원주의의 유형을 살펴보는 논문집. 저자는 서구 기독교계의 종교 전통간의 대화를 방법론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사람들의 왜곡된 이해를 교정하고, 보다 생산적인 토론을 불러일으킬 수

www.kyobobook.co.kr

 

 

다원주의와 종교철학을 크게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내가 속한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뿐더러 다른 세계 종교의 이해도 부족해 스스로 종교철학 본문을 읽으려던 마음이 없었던 탓이다. 피할 수 없는 전공필수 과목, 피할 수 없는 과제는 어쩔 수 없이 본문을 열고서 저자가 인도하는 종교 다원주의 세계로 향하게 만들었다.

본문의 1부는 학자 별 종교 다원주의를 유형에 따라 분류한다. 아쉽다면 저자가 소개하는 대부분 학자들이 기독교적 배경에서 이야기를 하는 점 하나. 만일 ‘기독교 다원주의’라는 제목으로 구성했다면 문제없을 테지만 이 책의 이름은 분명히 ‘종교 다원주의 유형’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학자들 대부분 기독교, 혹은 영미권 학자들로(파니카 한 분 빼고)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려면 다른 종교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슬람, 불교, 힌두교, 도교, 유교 학자들 목소리는 전무했다.

언어란 사고에 대한 표현이며 사용에 따라 권위가 부여되기도, 부여되지 않기도 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분명히 종교라는 상위 개념을 말한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종교 다원주의가 기독교 하나님의 배경, 혹은 영미권 학자들 사이에서만 이야기가 이어진다면 기독교 상위 개념인 종교라는 위치에서 말하는 게 아닌 기독교 그 자체 안에서만 이야기함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본문의 종교 다원주의는 언어가 가진 개념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며 나아가 힉의 지적처럼 기독교 제국주의적 성격이 가능한 게 아닐까.

◇기독교이기를 포기한 기독교 다원주의?
본문을 읽으며 고민된 지점은 기독교 다원주의에 대한 내 입장이다. 저자는 기독교 다원주의를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묘사하며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과 근거를 싣는다. 역사적 예수 연구 세미나 결과로 예수의 배타적 발언은 케리그마(κῆρυγμα) 선포일 뿐 역사적 예수의 발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88) 다시 말해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는 케리그마 예수와 케리그마 붓다가 만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 붓다가 만나야지, 케리그마 간의 만남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은 케리그마라는 선포에 불과하다. 타종교와 만나 차이를 인정하는 자세를 넘어 상호간 변혁해야 할 필요성은 저자가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근거다.(292) 저자가 정의한 신학은 틸리히(Paul J. Tillich)처럼 “기독교 메시지를 새로운 상황과 상호 관련시키는 작업”(297-8)이기는 하지만 종교 간 계속되는 대화와 상호변혁은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 부르는 집단에 대한 인정을 넘어 그들을 통해 ‘상호 변혁’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기독교가 이단으로 명명한 집단과 연합이 가능한 셈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엇일까. 사전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종교’(지식백과)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니케아-칼케돈 신조를 가지고 천 오백년 간 이를 부정하는 이들과 싸워온 종교다. 기독교 분파에서 기독교 기본 원리는 오직 성경이고 이를 이룩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피 흘릴 만큼 중요한 전통이자 규범이다. 문영옥 연구자는 논문(니케아, 칼케돈 신조로 본 종교다원주의 신관의 문제연구)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공통 합의인 니케아-칼케돈 신조를 근거로 비판한다. “유대인들의 배척이나 로마의 박해, 희랍의 철학이나 논리 앞에서도 결코 굽히지 않는 신앙을 보임으로써 진리를 수호하였는 바 이렇게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정리되어 공표된 것이 바로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다.”(60)

 

 

케리그마(Kerygma)
신약성서에서 선포라는 단어로 사용했으며 설교를 의미한다.(마태 3,1; 누가 4,18-19; 로마 10,14; 1고린 2,4) 설교자가 세상을 향해 좋은 소식,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파하는 일이 케리그마다. (장동진, 2010)

 

니케아 신조(Council of Nicaea)/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 공의회를 통해 예수는 아버지와 동질하다고 보는 입장이 채택되어 아버지인 성부와 아들인 성자가 다르다고 보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결정했다.

 

칼케돈 신조(Council of Chalcedon)/451년 소아시아 비티니아 도시 칼케돈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않는다며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알렉산드리아 사제 아리우스/아리우스는 성자 예수를 성부 하나님의 종속적 개념(이질)으로 주장했다. 성자와 성부는 본질이 같다고 발표한 니케아 신조에 의해 교회는 아리우스와 그 교리를 이단으로 분류했다.



진보 정당이 진보적이고, 보수 정당이 보수적일 때 당원들은 자신의 정당을 지지한다. 현실 정치에서 보듯 정당은 정당이 가진 강령과 색채를 잃을 때 몰매의 대상이 된다. 유권자가 각 정당의 강령을 보고 정당을 선택하듯 모든 사람은 종교의 자유와 선택의 권리를 가질 뿐, 하나로의 통합, 교리가 가진 정통과 역사를 부정하면서까지 변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현재의 종교는 하나의 집단 체제이자 개인화된 종교로 전락했다. 피터버거(Berger)는 “오늘의 종교는 사회적 기능보다 개인적 기능에 머물렀다”고 지적했고, 루크만(Luckmann)도 “종교가 다원화 됐기에 종교는 사적인 일만을 담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이원규, 종교사회학의 이해, 1997) 오늘의 종교가 자유로운 하나의 소비재가 되었고 집단성보다 개인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도구로 머물렀다. 종교가 굳이 자신이 가진 구호를 깨고 타종교와 대화를 넘어 변화를 추구하는 자세가 종교를 선택한(혹은 구매한) 이들에 대한 배신일 수 있고 그동안 지켜온 전통과 합의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다원주의에 대한 내 입장은 종교 간 상호 존중, 배려, 대화는 가능하지만 종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엔 의문을 던진다고 봐야 한다. 변화를 통해 종교는 종교가 가진 고유한 정체성을 잃을 수 있기에 대화와 만남에서 소극적일 수 있다는 점이 내 생각이다.

본문은 힉을 시작으로 캅까지 다양한 학자의 견해를 소개하지만 말 그대로 소개에 머물 뿐, 설득력을 지닌 내용은 없어서 학자들 의견에 동의하기 쉽지 않았다.

 

 

종교 다원주의는 필요한가
종교에 대화는 필요하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신앙
정체성 부정이 변혁일까


다원주의보다 토착화
다원은 본질에 영향주지만
토착화는 문화 변혁만 줘
문화-본질 사이 접촉해야


현실의 벽
문화와 본질은 무엇일까
분리·구분이 어려운 작업
끝없는 질문과 고민이 答



◇기독교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토착화 신학
저자는 기독교 다원주의가 아니라 토착화를 언급한다. 다원주의와 토착화의 차이를 캅(John B. Cobb)과 신학자 변선환의 개념 차이로 설명한다. 캅에게 다원주의는 기독교와 불교가 만남의 결과로 ‘불교적 기독교’를 지향한다면 변 교수에게 토착화란 불교와 만남을 통해 기독교가 상호 보충되는 작업이다. 상호보충이란 비기독교적 종교의 통찰로 기독교를 더욱 심화하고 확대하며 더욱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251) 따라서 저자에게 다원주의는 종교가 가진 본질을 변화할 위험을 가지지만 토착화는 본질과 문화를 분류해 본질은 고수하고 문화를 변혁시키는 일이다. 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갈등을 다룬다면 토착화 신학은 종교 내 갈등을 우선적으로 다룬다. 저자는 토착화를 옹호하고 긍정하며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260)

기독교 경전인 성서도 히브리즘과 헬레니즘 문화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토착화 작업을 거쳤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현재 문화와 토양 안에서 토착화 작업은 필요하다. 다만 토착화가 저자의 말처럼 본질은 고수하고 문화를 변혁시키는 일일 텐데, 어느 순간 변화한 문화가 본질이 되어버린 경우. 예컨대 한국의 새벽기도, 찬양 문화, 기복 신앙은 한국 문화 안에서 자란 토착화 된 신앙인데 이게 어느 순간 본질의 개념으로 자리 잡아간 것처럼 대안 없는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토착화는 쉽지 않았다
토착화 신학의 한계와 대안을 잠시 고민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토착화 신학을 고민하기 위해 본질과 문화를 구별해야 하는데 이 작업부터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질과 문화는 성서 안에서 구별해야 한다. 기독교의 규범이자 기독교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인 본문이 성서이고 이를 규범화한 종교가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 시대 문화에 감춰진 기독교(혹은 야훼 종교)가 아닌 원시 기독교 사상과 그들이 전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문제는 원시 기독교를 찾는 작업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 성서 안에서 증언된 신의 모습은 계속해서 바뀐다. 단일신론, 유일신론, 삼위일체, 때로는 엄한 아버지, 사랑 많은 아버지처럼. 기독교인 관점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신으로 이해되지만 단순히 성서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는 신이라면 기독교가 지닌 종교적 특성은 사라지고 만다. 누군가는 삼위일체 중 제2위격인 성자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죽은 사랑으로 다른 종교와 비교하지 못할 특성으로 주장하지만 이미 다원주의자들이 밝히듯 다른 종교 안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토착화 신학 연구자가 해야 할 두 번째 과제는 무엇일까. 현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작업이다. 쉽지 않다. 한국의 문화는 빠르게 변화한다. 기독교 본질과 문화, 이 땅의 문화 분석이 마쳐지면 첫째, 둘째 단계에서 적용점을 찾고 이 과정에서 교회사를 통한 토착화 성공과 실패를 분석하는 작업이 세 번째 단계다. 동시에 토착화된 신학이 교리화하는 현상을 계속해서 경계해야 한다. 토착화 신학 과정은 이처럼 오랜 시간과 사유, 많은 신학적 지식을 요구한다. 한 순간에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현대 문화와 기독교의 본질을 접촉하는 흐름이며 이를 멈추는 순간 문화의 개념 속 토착화 신학은 어느 순간 본질의 개념이 되고 만다.

대안은 무엇일까? 아직도 모르겠다. 변명으로 보이겠지만 ‘끊임없는 고민’이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자신의 신학을 하나의 교리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신학의 문제를 찾으며 보완하는 시도만이 토착화 한계를 깨는 답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질문을 던지지 못해 아쉬워
서평을 ‘종교 다원주의’에 맞춰 할지, ‘토착화’에 집중할지 많은 고민이 됐다. 분명 본문에서 원한 내용은 종교 다원주의지만 저자는 토착화에 방점을 둔다. 독서는 본문을 통한 저자와의 대화이기에 토착화 부분에 무게를 실어 서평을 써 내려갔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저자가 소개하는 학자들 견해에 더 깊은 생각을 이어가지 못한 점, 저자가 소개한 학자들 이론만 간략히 정리한 점이다. 예를 들면 힉(John H. Hick)에게 사이비 종교의 진실성, 도덕적 기준과 비전, 가치가 있으면 참 종교라고 주장하지만 진정한 기준이란 게 있는 건지, 월프레드 스미스(Wifred C. Smith)에겐 종교 간 만남에서 자신의 종교 전통에 대한 확신이 강해지는지, 거꾸로 개종 당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지를 묻고 싶었고 파니카(R. Panikkar)에게 우주와 신을 구분한 구체적 근거를 묻고 싶었다. 니터(Paul F. Knitter)에게 가난한 자에 대한 해방이 구원이라면 부유한 자에겐 구원이 필요 없는지, 네오마르크시즘(neo- marxism)에 의하면 부유한 자에 대한 배려가 존재하는데 니터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학자들과 다양한 대화를 생각으로 이어가고 싶었지만 과제로 인해 학자들 생각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소득이라면 본문으로 제대로 고민 한 번 해보지 못한 토착화에 대해 한 시간 가량 통학길, 함께 공부하는 이들과 대화하고 생각할 수 있어 과제임에도 꽤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