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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현실논단

[현실논단] 전 한국인 공동체를 움직였던 한국교회

자유의새노래 2020. 12. 16. 08:17

입력 : 2020. 12. 16  08:17 | A30

 

마포삼열과 평양여자사경회. ⓒ한국교회사연구소

 

일천구백칠년의 일이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한 평안남도 겨울 남자 사경회에 참석한 신자들은 저녁 집회에서 성경 공부 후 통성으로 기도하자 청중들을 어떻게 통제할지 상의할 정도로 울음이 이어졌다.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회개의 위력은 진중했다. 주목한 건 그 다음날이다. 거리에서 서로 죄를 고백했고 배상했다. 도둑맞은 물건이 돌아왔다. 빚이 청산됐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은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한국인 공동체를 움직”였다고 한다.


장대현교회에 모인 신자들은 방언으로 기도했을까? 아니다.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방언으로 기도했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심금과 정서를 적신 통곡은 행동으로 옮겨갔고, 옮아가듯 반성과 회개, 돌이키던 삶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 속에 방언, 진화론, 동성애, 정치적 우파, 자유 대한민국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를 지나온 한국교회의 풍전등화(風前燈火) 상황에서 태극기든 사회참여에 반감을 가졌던 선교사도 있었다. 정교분리 원칙을 지켜 교회를 지키자는 주장처럼 제국주의 칼날 앞에 교회는 힘이 없었다.


조선의 신자들은 제국주의 칼날뿐만 아니라 현실을 살아야 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듯(로마 5,20) 조선 신자들과 목회자는 죄 많은 곳에서 육이 아닌 것들과 싸워야 했다. 인구 만 명 중 절반이 기독교 신자였던 평안북도 선천은 경제가 침체되자 일본인 매춘부가 역 주변을 자리 잡았고 회칠한 무덤을 인용하며 ‘조선의 예루살렘’이 아닌 ‘예루살렘의 조선’을 거들먹거린 사회주의자들이 조선 교회 타락을 비판했다. 일천구백이십오년 개벽은 기록한다. “현실 도피적인 인물만 모여 사회정의와 평화와 빈부문제를 외면하고 있으며 정치경제적 학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서 마음의 평안이나 구하며….”

 

 

부흥을 꿈꾼다는 착각
8년 새 100만 명 이탈
여전히 평양부흥인가?
웃기는 소리들 마시라

 


치유사역도 현대 교회 전유물이 아니었다. 목사 김익두의 치유 중심 부흥회는 사람들을 구름처럼 모았고, 옥성득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20년대 초기 반짝 성장한 이유는 삼일운동이 아니라 김익두 부흥 운동 덕분이다. 신학적 토대가 세워지지 않았던 20년대, 춘원 이광수의 《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은 너무 유명해서 언급하지 않아도 될 지경이다. 기독신보에 실린 1910년과 16년, 27년도 교인 수는 흥미롭다. 1910년에서 16년까지 20만명에서 27만명으로 성장한 개신교는 27년이 되자 25만명으로 7.3% 감소했다. 1910년대에 성장 1920년대에 쇠퇴, 1980년대 성장, 2010년을 기점으로 쇠퇴하는 양상에서 부흥이 찾아오지 않겠냐고 묻는다면 웃기는 소리다.


통계청이 아닌 한국교회가 자체 집계한 주요 교단 6곳 교인 수를 합산하면 부흥의 조짐은 찾을 수 없다.  2011년 기점으로 8년만 지났을 뿐인데 백만 명이 교회를 이탈했다. 100만 명이다. 경기도 고양시 인구만한 사람들이 10년 새 사라진 것이다. 1920년대 한국교회는 사회주의자들과의 갈등, 신학의 근본주의화, 가나안 신자의 증가, 교회 내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일제와의 싸움이 전부가 아니었다. 2020년. 100년이 흘러 과거의 똑같은 몸살을 앓는다. 교회 내 금권 선거, 과학 앞에 무능한 신학, 교회를 대체할 즐거운 문화와 여가, 근본주의화와 정치 이데올로기, 신의 위로가 없어도 정신의학과 상담은 마음을 보듬어 안는다. 코로나와의 싸움이 전부가 아니다.


코로나 파동을 겪으며 명백히 드러난 한국교회 민낯은 국민들에게 뜨거운 낯을 넘어 분노마저 일으킨다. 분노한 사람들 앞에서 “예배 금지 자제”같은 말이 무슨 소용이고, 교회의 기부가 얼마나 관심을 끌어낼까. 코로나가 다가오기 전부터 물었어야 할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사하고 교회라서 살아남을 방법만 궁리하는 다채로운 풍경에 역겨움을 느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방언 없이, 스피커와 방송 시스템, 현란한 설교 기술 없이도 눈물과 통곡의 반성과 회개로 훔쳐온 것들을 돌려주며 용서를 구했던 100년 전 조선 교회의 참담함은 이제 더는 없다. 교회는 오늘날까지 평양대부흥을 추켜세운다. 웃기는 소리다.


윤리 어쩌고 말할지 모른다. 그래서 성경으로 인용하련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마태 12,33) 그래서 지키고들 있는지.